황궁의 내막
호아니가 보다 못해 감찰 총책을 맡고 있는 내무부 참사관에게 한 마디 했다.
“제가 오래 전에 이미 법무부 참사관을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
사십 중반의 깐깐하게 생긴 참사관이 말했다.
“그럼요, 아다마다요.
조정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참사관이 되신 호아니 남작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라구요.
저는 당시에 나이는 남작님보다 십 여 살이 많지만, 참사관보다 두 단계나 낮은 서기관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
호아니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설마 하니 제 자랑을 하려고 그 얘기를 꺼냈으려구요.
지금 황궁 감찰의 총책을 맡고 계시는데, 하도 딱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확인한 보고서를 그대로 조정에 제출했다가는 제가 장담하건데 참사관님이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이런 엉터리 보고서를 인정할 사람이 조정에 몇이나 있을까요 ?
원래 있던 관련 서류들을 짜깁기 한 것은 그렇다 쳐도, 앞뒤가 맞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손을 댄 흔적이 너무 많습니다.
같은 조정 관료로서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겠습니다.
참사관님을 위해서도 이 보고서는 전부 다시 작성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참사관의 표정이 참담하게 구겨졌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창피하기 그지없으나, 나름대로 고심해서 작성한 보고서가 한 마디로 형편없다고 부정당하는 현실이었다.
“호아니 군사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평가 아닙니까 ?
감찰관들과 함께 며칠 밤을 세워가며 작성한 보고서를 너무 낮게 보시는 듯합니다.”
호아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감찰관들이 아니라 내관들과 함께 머리를 쥐어 짜내며 작성하셨겠지요.
이건 누가 보더라도 객관성 있는 감찰 보고가 아니라 내관들이 보여주고 싶은 내용들로 짜깁기 했다는 게 훤히 보입니다.
단적인 예로 근무 상황표를 보겠습니다.
근무 상황은 감찰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입니다.
내관들이 시간대별로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근무 상황표는 절대로 수정하거나 새로 작성한 흔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넣고 빼고 지우고 다시 쓴 걸레쪼가리 같은 근무 상황표는 모든 감찰의 결과를 시작부터 의심하게 만들지요.
근무 상황표를 고쳤다는 자체가 많은 내관들이 있어서는 안 될 시간에,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없는 장소에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가 됩니다.
조정에 나가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
참사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대목이 바로 근무 상황표였다.
한때 모든 황궁의 내관들을 거세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적도 있었으나, 제국에서는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에 내관들이 직접 황비들을 시중드는 일을 맡지 못하게 함은 물론, 황비들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조차 엄격하게 제한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어떤 내관이 어떤 황비의 처소에 몇 시간을 머물렀다면 합당한 이유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가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했다.
근무 상황표가 누더기가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관들이 황비들의 처소에 머물렀다는 자료는 있는데 분명한 이유와 근거를 댈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이었다.
사실 세간에는 부부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는 황비와 내관들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돈 지 오래였다.
답할 길이 없어 난감하고 망연자실한 참사관에게 호아니가 덧붙였다.
“근무 상황표도 문제지만, 재정 보고는 더 엉망입니다.
황비들이 너도 나도 거의 매일같이 연회를 여느라 쓴 비용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내관들에게 하사한 선물이나 금일봉 등에 상세한 내역이나 근거가 분명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감찰을 하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지요.
이번 감찰의 주역이 내무부이고 참사관님이 총책이시니 내가 구구절절 간섭하거나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볼 때 그냥 봐줄 만 하다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참사관의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돌았다.
“그러니까 호아니 군사님의 말씀은 일일이 문제 삼지는 않겠다는 것이지요 ?
사실 저나 군사님이나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현실이지 않습니까 ?
그럼 제가 군사님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군사께서 이만 하면 되었다 할 때까지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호아니는 직접 감찰 결과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대신에 감찰 보고서의 최종 결제자가 된 셈이었다.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그에 대한 근거 자료나 실상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으니, 호아니로서는 손 안대고 코 푸는 일석이조의 상황이 되었다.
애초에 호아니는 황비들이나 내관들의 비리를 까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굳이 세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황궁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 그들에게 ‘이러다 다 죽겠다’는 압박감을 최고로 높이는 데 있었다.
내무부 참사관이 나가고 나자 토머스가 호아니를 보며 실실 웃었다.
“헤헤헤, 오늘 제가 많이 배웁니다.
군사께서 참사관을 어린애 다루듯 하시네요.”
호아니가 정색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배울 생각도 하지 말게.
저 사람들이 일을 하도 엉망으로 해놔서 그렇지 조정의 관료라면 다들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야.
황태자 눈치를 보느라 내관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저들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지.
자네는 다 좋은데 장난기가 너무 많아 탈이야.
내가 참사관을 어린애 다루듯 가지고 놀았다고 봤다면 자넨 아직 멀었어.
얘기의 뒷면에 담긴 뜻을 봐야지.
저 참사관도 어리숙한 사람이 아닐세.
그는 오늘 제국군의 군사가 깐깐하게 군다는 좋은 핑계거리를 확보한 셈이지.
황궁에서는 내관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이야.
보나마나 참사관에게 ‘당신이 알아서 눈가림을 제대로 하라’고 다그치기나 할 테지.
참사관이 ‘그럼 당신들이 직접 호아니 군사에게 따지라’ 한 마디 하면, 어떤 간 큰 내관에 감히 내게 따지러 오겠어.
나는 오늘 참사관에게 큰 무기를 하나 쥐어준 걸세.”
토머스가 무릎을 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제가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저는 참사관도 군사께서 그렇게 나와 주시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새삼 제국 조정의 관료들이 브라스트의 관료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브라스트의 관료들만 해도 저마다 속에 구렁이가 몇 마리 씩은 있다는 사람들인데요.
저는 그저 군사님의 위명이 일찍부터 워낙 대단하시니 알아서 기는 걸로만 생각했습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구렁이가 아니라 속에 시커먼 귀신이 백 마리 씩 들어 앉아 있다 해도 정도를 걷는 사람을 속이진 못하네.
물론 나만 똑바르면 된다는 생각이 휠씬 위험하기는 하지.
대국을 보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과 관철시켜야 할 것만 확고하게 밀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허튼 수작을 부리는 자들이 스스로 파탄을 보이게 되어 있다네.
일일이 따질 것도 없고, 말로 이기려 들 것도 없고, 일의 중심을 단단히 세우라는 말이야.”
토머스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심정으로 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한편 호아니와 토머스는 감찰실에 나와 있기는 했으나, 그곳에서 제국군 내의 일들을 모두 처리하면서 간혹 심심파적이라도 하듯 하루에 한 두 명의 내관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모그란데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확인된 자들로 서로 간에 오간 서신들을 근거로 조사를 한다는 명분이었다.
호아니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취조하고 있는 토머스에게 간혹 제국군에 관한 일을 묻거나, 서류에 대한 확인을 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난 너에게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황궁의 내관들에게 호아니는 이미 호랑이보다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호아니는 일찌감치 승승장구하던 법무부 관료 시절부터 궁의 내관들에게도 이름을 알려져 있었으며, 최근 몇 년 간 제국 각지의 반란을 잠재운 제국군의 군사였으니 그 무게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감찰 총책인 참사관이 사사건건 호아니의 핑계를 대며 내관들을 압박하고 있으니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토머스에게 취조를 받으며 질문에 답하면서도 그들의 신경은 온통 호아니에게 가 있곤 했다.
언제 호아니가 끼어들어 직접 불벼락을 내릴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심정으로 조사에 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다가온 호아니가 토머스에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묻거나 하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토머스는 조사 받으러 온 내관들에게 몹시 상냥하게 구는 편이었다.
윽박지르거나 다그치기는커녕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보라는 식으로 변명을 들어주고 있었다.
불려온 내관들이 주로 답해야 하는 내용이 모그란데와의 관계였으므로, 그들은 어떻게든 별 일이 아닌 것으로, 모그란데와는 그저 인사치레로 서신이 오간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토머스는 그들의 얘기를 진심으로 믿고, 어떻게든 그들을 지켜주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그러다 보니 내관들이 자신이 왜 모그란데에게 어떤 선물을 보냈는지, 왜 어떤 소식을 알려야 했는지 등에 대해 사력을 다해 해명하고자 했다.
황궁도 사람 사는 동네다 보니, 세력 간의 고하도 있고, 내관들 사이에서도 알력과 다툼도 많고, 내관들도 사람이니 저마다 처한 사정도 있는 게 당연했다.
그들의 변명은 자신이 궁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누구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지, 그래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주였다.
토머스가 반박을 하거나 의심을 하는 눈치를 보이기는커녕 은근히 동조하고 동정하는 말까지 해주니, 불려오는 내관마다 며칠이라도 떠들 것처럼 자기 얘기에 열중하곤 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은 모그란데와 내통했다는 누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품게 되었고, 그것을 더욱 확고한 사실로 만들기 위해 별 관계도 없는 궁내의 이야기들까지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십 여 명의 내관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나자, 토머스는 궁내 내관들의 세력 관계도를 제법 세세히 그려낼 수 있었고, 황비들과 내관들이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지에 대해서도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호아니와 토머스는 황제의 병에 대한 내막을 알지 못했으나, 이미 수 십 년에 걸쳐 곪을대로 곪은 황궁 내의 내막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간간히 이런 저런 소문들이 밖으로 새어 나오기는 했으나, 황궁 전체가 한 통속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별세계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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