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황제는 누구 ?
세틴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오늘 밤에 즉시 조사에 착수할 것이니 차츰 전모가 밝혀질 일입니다.
근위대나 제국군이 황제를 시해하고서 내관들의 짓으로 꾸민 것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수로 황궁에 있는 거의 모든 내관들을 일시에 완전무장시켜서 폐하의 처소로 달려가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하께서는 몰랐던 일로 해드릴 것이니, 너무 급하게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오디어스가 계속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처량하게 말했다.
“아버님이 올해 연세가 90을 넘기셨네.
두 형님들마저 이미 돌아가셨으니 실로 오래 사신 셈이지.
하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그토록 험악한 일을 당하실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슬픔을 주체할 길이 없으나 나라에 하루라도 주인이 없어서는 안된다고들 하니 어쩌겠는가.
내일 바로 폐하께서 승하하셨음을 공표하고 내가 제위를 물려받아야 할 것이야.
설마 자네가 날 훼방 놓을 생각은 아니겠지 ?”
세틴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결코 제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그리 험악한 죽음을 맞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 편안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삶을 놓으셨습니다.
진작에 눈치는 채셨겠지만, 저는 오늘 내관들이 쓸 데 없는 일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채 하고 계신다는 사실도요.
제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했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
오디어스가 무척이나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 ?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
나, 나는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어.”
세틴이 말을 이었다.
“바로 전하께서 제위에 오를 수 없는 이유와 같습니다.
저는 전하께서 황제 폐하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수 십 년 동안 황궁 전체가 한 통속이 되어 폐하를 기만해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그 사실을 수 년 전에 알게 되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전하는 제가 이 사실을 천하에 공표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
그렇다면 계속 제위를 고집하셔도 좋습니다.
당장 전하에게 나를 막을 방도가 있다 해도 이런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다고 보십니까 ?
이제부터라도 황실을 지키고 제국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을 이성적인 대책을 함께 찾아 보셔야 합니다.”
오디어스의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흙빛이 되어 있었다.
“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
아, 아, 아, 그렇단 말이지 ?
다 끝났구나.
그래,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아,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
세틴이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모든 황비들과 내관들을 포함해서 황궁 전체를 이 세상에서 지울 생각입니다.
그것만이 돌아가신 폐하를 위로할 수 있는 길이자 이제라도 황실을 제대로 세울 수 있습니다.”
“전부 다 죽인단 말인가 ?”
“아니지요, 저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살인마는 아닙니다.
한 명도 남김없이 세상과 단절된 곳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폐하의 핏줄도 아니고, 그럼에도 수 십 년 동안 그것을 감추고 황자 행세를 하신 분들도 더 이상 황도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전하께서 내관들의 거사를 전혀 몰랐던 것으로 해드리겠다고 한 말은 적어도 전하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며, 황태자로서 마지막 체면 만은 지켜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면 전하께서 꼭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일 폐하의 승하 사실을 공표하면서 제위를 잇겠다는 대신에 폐하께서 내관들에게 시해를 당하는 참변에 일말의 책임을 벗을 수 없으니 황태자로서 자격이 없노라 하십시오.
부마이자 전하의 후계자인 저스틴에게 제위를 넘기겠노라 발표 하세요.
사실 황자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직도 자신이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도 못하고 있는 황자도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언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책임은 오로지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황비들과 그녀들을 부추겨 황궁을 복마전으로 전락시킨 내관들에게 있지요.
하지만 전하에게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오디어스의 정신이 조금은 돌아온 듯했다.
“정녕 그런 결말밖에 없단 말인가.
나는 평생 황자로, 황태자로 살아왔네.
내가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상상이라도 했을까.
나도 비교적 최근에 비언차이에게 협박을 당하면서야 알았지.
그러면서도 반신반의 하고 있었는데 자네까지 내막을 상세히 알고 있다면 아마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계속 제위를 고집해도 소용없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겠지.
일단, 자네 말대로 제위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내려 놓겠네.
염치없지만 나도 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스틴에게 제위를 넘긴다는 건 그나마 나를 배려한 일이라 무척 고맙게 생각하네.
하지만 황도를 떠난다면 내가 어디 가서 뭘 하고 살겠는가.
제발 그것 하나만 빼 주게.
남은 여생을 내 딸과 새로운 황제 곁에서 지낼 수 있게만 해달라는 말이네.”
자기 말대로 염치없고 어이없는 오디어스의 말에 세틴은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내가 비밀을 지켜준다고는 했지만, 내게 당신은 썩어 문드러진 황실의 찌꺼기일 뿐이오.
황궁을 청소하는 마당에 찌꺼기를 남길 이유가 있겠소 ?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시오.
내가 언제까지 당신을 외삼촌으로 대우해줘야 하지 ?
굶어 죽지 않을 정도는 배려해 줄 것이니, 황궁은커녕 황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시오.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의 최대한이오.
당장 내일 해야 할 일을 똑바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 땐 목숨이 온전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오.”
갑작스레 변한 세틴의 말투에 오디어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에게 무슨 명분이 있고 힘이 있어서 세틴에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
평소에 그렇게 알랑방귀를 뀌던 조정의 관료들조차 최근에는 슬슬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던 마당에 세틴이 굳이 자신이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 알겠네.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이게 다 황실의 명예를 보존하고 조용히 덮자고 자네가 하는 일인데, 내가 끝까지 주책을 떨었군.”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깥으로 한 마디도 새어나가지 못하는 가운데 길고 긴 밤이 흘러갔다.
황궁 전체에 대낮같이 밝게 불이 밝혀졌고, 간간이 어디선가 숨이 끊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쉬지 않고 흘러 나왔다.
황궁 안팎에 제국군이 철통같은 경계 태세가 취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오디어스에게 행여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부탁이자 협박을 마지막으로 건넨 세틴은 황궁에 있는 황태자의 집무실로 저스틴을 불러 들였다.
이미 깊이 잠들었다 깬 저스틴이 같이 가겠다는 카스텔라를 ‘무슨 일이 있어도 홀로 입궁하라’는 명이 있었다며 뿌리치고 황궁으로 달려왔다.
호아니, 오골보르, 토머스, 울브린, 배커와 회의를 하고 있던 세틴이 저스틴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모두를 물렸다.
“어서 와, 형.
이 밤중에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 ?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고, 앞으로 형이 놀랄 일은 더 많이 일어날 거야.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해.”
세틴은 내관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해서 황제를 시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는 바로 황태자를 곧바로 제위에 올림으로써 자신들이 살아날 길을 찾고자 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황제가 사망한 마당이니 다음 황제를 정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데, 그 지점에서 문제가 생겼기에 저스틴을 불렀다는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지 ?
그런데 황태자가 보위를 잇는 건 당연한 수순인데 무슨 문제라는 거야 ?”
세틴이 일어서서 저스틴에게 다가가 어깨를 껴안으며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할게.
다음 황제는 바로 형이야.
황태자는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
아무리 내관들이 간이 크다고 해도 어떻게 황태자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겠어 ?
상세한 내막은 지금 잡혀 취조를 받고 있는 내관들을 더 조사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황태자의 은밀한 내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황태자가 나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내가 자신을 쫓아낼 거라고 생각했던가 봐.
하지만 난 그 사실은 덮어둘 생각이야.
황태자가 친아버지인 황제를 직접 시해했다면, 그건 그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 되고 마는 거야.
카스텔라와 형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오디어스와 타협을 봤어.
그 사실을 덮어주기는 하지만 절대 당신이 황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형을 황제로 추대하라고 말이야.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최선의 방책이 바로 그거야.
내일 형이 차기 황제로 추대될 거야.
황태자의 후계자 자격으로 말이야.”
저스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니, 잠깐.
내가 황제가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불가능해.
내가 어떻게 감히 황제 자리에 앉고, 황제 노릇을 할 수 있겠어.
지금이라도 다른 대책을 세워 보자.
누가 보더라도 지금 황제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야.
황태자가 그렇게 지정을 하거나, 내가 양보하는 형식을 취해도 되잖아.”
세틴이 소리없이 웃으며 다시 저스틴의 어깨를 껴안았다.
“형, 갑작스러운 일이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니 무척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형 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지.
적어도 내가 마음에 없는 말을 극도로 싫어하고 입에 담지 못한다는 사실을 형 만큼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가 뭐라 해도 난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무엇보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과 해온 말들이 모두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해서 행한 일로 되기를 원하지 않아.
황태자의 죄를 밝히지 않고서는 내가 제위에 오를 명분이 없고, 죄를 밝히자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쳐야 해, 형과 형수도 포함해서.
그 또한 내가 절대 원치 않는 일이지.
상황이 그렇게 되었어.
비록 형이 원치 않아도 형은 천년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해.
적어도 당분간은 내가 사력을 다해서 도울게.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황제라는 그 자릴 감당한 준비를 해야 해.
지금 당장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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