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게스트 강
건진은 두루마리를 회수할 생각도 없는지 세틴을 한참이나 노려보고 몸을 돌렸다.
세틴은 정찰대장 고진과 함께 16 일이라는 시간을 들여 정찰에 나섰다. 게스트 강을 건너 게스트린 산맥에 있는 관문까지 돌아보았고, 관문이 아닌 다른 계곡들을 통해 몇 군데의 봉오리에 올라보기도 했다.
게스트린 산맥은 게스트 강에 가까운 편이고, 게스트 강 쪽이 산맥의 북사면인지라 그 중간에는 거주민도 많지 않았으며, 게스트린 영주성도 산맥 너머에 있고 대다수의 인구가 산맥 남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세틴이 군영으로 다시 복귀한 날은 새해를 맞기 하루 전이었다. 바늘 요새에서 16 세가 된 세틴이 노스롭과의 전장에서 1 년 이상을 보낸 셈이었다.
어느덧 세틴의 턱에도 잔털이 자라고 있었으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체구가 좀 더 단단해져 늠름한 청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바네사는 찬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여러 날을 보내다 돌아온 세틴을 집 나갔던 아들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목욕부터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일일이 쫓아다니며 챙긴 바네사가 몸을 데워주는 차를 내오며 말했다.
“굳이 직접 나가지 않아도 유능한 부하들이 많은데 왜 이 추운 날 고생을 사서 하시는 거에요 ? 대공비 전하께서 아셨다면 저를 무척 나무라셨을 겁니다.”
세틴이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 말했다.
“다녀온 보람이 있어요. 내가 몸을 조금 더 굴리면 수많은 병사들이 고생을 덜 하고, 그만큼 적은 희생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될 거에요.
이번에 다녀오면서 고진 장군과도 많은 의견을 나누었고, 이 전쟁을 어떻게 마무리할 지에 대해서도 대략 구상을 완성할 수 있었지요. 내가 애도 아닌데 찬바람 좀 맞은 게 대수겠어요 ?”
“고진 장군이 지끔까지도 정찰대는 충분히 잘 이끌어 오셨잖아요. 그분은 휘하 장수와 병사들뿐 아니라 부리는 하인들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하고 빈틈 없는 분인데 어련히 잘 하시려구요.”
세틴이 미소를 지었다.
“고진 장군이 둘째 가라면 서러울만큼 유능하고 훌륭한 장군일 줄은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나나 호아니 군사와 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어요.
가끔 회의를 통해서 생각을 맞춰 가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이번 정찰을 통해 내가 고진 장군께 배운 것도 적지 않고, 또 내가 무엇을 중시하고 어떤 상황들을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그도 알게 됐어요. 바네사가 날 걱정해주는 마음이야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 없는 동안 난다와 완다는 잘 하고 있겠지요 ?”
바네사가 말했다.
“원래 하던 일이야 잘 하고 있겠지만, 요즘은 시간만 나면 시에나님을 찾아 가서 의술을 배운다고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답니다.”
세틴이 놀랍다는 얼굴이 되었다.
“의술이요 ? 뭐든 흥미를 갖고 배우기를 좋아 하는 줄을 알았지만 의술은 조금 의외인데요 ? 그게 하루 이틀에 뚝딱 배울 만한 게 아닐 텐데요.”
“재밌는 건 시에나님이 두 자매에 푹 빠졌다는 거에요. 똑똑해서 가르치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맘에 쏙 든다면서 친 손녀들 대하듯 한답니다. 아무튼 그놈의 천방지축은 정말 못 말린다니까요.”
“세레스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다가 얼마 안 가서 그만 두었다더니 이번엔 의술이라...... 시에나님 워낙 명의로 유명한 분이라니 잘 배워두면 좋기는 하겠네요.”
다음날은 새해 첫날이라 전군에 푸짐한 음식과 약간의 술까지 제공하도록 했다. 세틴군의 지휘부가 모두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노스롭군영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이틀 전 세틴이 게스트 강을 건널 때에는 얼어붙기 시작하기는 했어도 강 전체가 얼지는 않은 상태였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연일 맹추위가 계속된 것을 감안하면 조만간 도강에 충분한 결빙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세틴은 곧바로 연회를 정리하고 비상회의로 전환하도록 했다.
희의 준비가 갖춰지자 세틴이 결연한 표정이 되었다.
“노스롭이 슬슬 퇴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찰대장님과 내가 확인한 바로는 하루 이틀 사이에 게스트 강이 완전히 얼어붙지는 않을 것이나, 지금같은 추위가 며칠 더 계속되면 때가 올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시간이 많이 없으니 우선 이번에 고진 장군과 내가 게스트린 산맥까지 정찰을 다녀오면서 구상한 작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술 목표는 이번 전투에서 노스롭의 군대를 대부분 흩어버리고 가능하면 노스롭을 생포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로 저들이 군영을 버리고 철수를 시작하면 군영의 물자를 제대로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공격을 퍼붓습니다. 단, 적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데 주력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게스트 강을 건너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집중 공격을 가합니다. 이때의 중점 타격 대상은 노스롭 본대입니다. 여타 부대와 병사들은 사로잡거나 도망치도록 방치하고, 노스롭 친위군을 집요하게 따라붙어 공격합니다.
세 번째 단계로 철수 시작 단계에서 별동대를 파견하여 게스트린 산백의 주 관문을 선점합니다. 이 작전은 나와 친위대의 단독 작전으로 진행합니다. 우리 군의 최정예인 300 여 친위대 만으로 충분히 가능한 작전입니다.
여기까지 이견이나 질문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숄츠 보급대장이 말했다.
“다른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데 게스트린 관문을 선점하는 건, 더구나 그것을 세틴 장군과 친위대 만으로 수행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한 작전이 아닐까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이기고 있고 병사들의 피해를 줄이는데 주력하는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
세틴이 말했다.
“내가 고진 장군과 함께 직접 정찰을 해본 결과 게스트린 관문이 녹녹치 않습니다. 관문에 이르는 길도 험하고 관문 부근의 경사가 급해서 병사가 100 명만 있어도 수만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경로로 정상에 올라 능선을 타고 공격을 하기에도 여의치 않습니다.
관문이 있는 경로를 제외하면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있지만 말과 수레가 갈 수 있는 길이 없어요. 게스트린 관문에서 막힌다면 희생도 희생이려니와 노스롭에게 많은 시간을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잘 맞추면 친위대 만으로 점령작전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현재는 거의 망을 보는 수준의 병력이 있을 뿐이니까요. 그렇게 길을 끊어 놓으면 노스롭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입니다.”
고진이 부연 설명을 했다.
“노스롭이 퇴각하면서 선발대를 보내서 관문을 먼저 장악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까지 감안해서 정찰대를 적절히 배치해 두었습니다. 세틴 장군께서 노스롭이 모르게 바로 출진하신다면 큰 무리없이 관문을 장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마대장 데일이 물었다.
“장군께서 먼저 출진하시면 전군의 작전 지휘권을 어떻게 하실 건지요 ?”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번 작전의 총지휘는 호아니 군사가 담당합니다. 고진 장군을 비롯해서 몇 분은 전체 작전의 개요를 잘 파악하고 있지만, 독자적인 임무를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이번 작전에서 새로 출범한 군사참모부의 지휘체계를 처음으로 실전 적용합니다. 나중에 군사께서 세부적인 지침을 주시겠지만 특히 통신체계의 활용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상카와 오클린이라는 복수의 리더십으로 운영되는 친위대는 오클린이 세틴의 호위에, 그리고 상카가 전투에 집중한다는 역할 체계였다.
세틴이 볼모의 처지가 되어 황도로 떠날 때, 멀린에게 요청하여 동행하게 된 청랑대는 오클린의 지휘 아래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세틴군의 중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의 충성심과 무력, 그리고 엄정한 군기는 세틴군의 귀감이 되고 남음이 있었다.
상카의 부대는 일족으로 구성된 40 명에서 200 여명이 보충되어 최강의 정예부대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핵심적인 지점에 투입되고 있었다.
세틴이 직접 이끄는 친위대는 깜깜한 밤중에 후방을 통해 군영을 나섰다. 친위대의 움직임을 최대한 노스롭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말이 30여 마리 따르기는 하였으나 말등에 오른 것은 세틴과 상카, 오클린 뿐이었고, 다른 말들은 모두 짐을 실어나르는 용도였고 친위대의 행군을 기본적으로 도보 이동이었다.
병사들은 모두 두툼한 옷을 껴입고 커다란 배낭을 매고 있었으며, 각자의 기본 무기 외에 방패와 활, 화살통까지 가능한 모든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관문에 도착할 때까지 얼어붙은 땅에서 야영을 해야 했고, 불도 피우기 힘든 것을 전제로 채비를 갖춘 것이었다.
개개인이 버거울만큼 많은 짐을 지고 있었으나, 친위대는 매우 빠른 속도로 군영에서 멀어져갔다. 노스롭의 군영을 멀리 우회해서 목적지인 게스트 강 상류에 도착하려면 서쪽으로 이틀을 이동해야 했고, 친위대의 움직임을 감추려면 날이 밝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야 했다.
친위대는 날이 밝기 전에 일차 목적지인 계곡에 도착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경사가 심해 깊은 계곡이었다. 날이 춥기도 하고 새해를 맞은 바로 다음 날이라 주민들이 주변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높은 산등성이가 바람을 막아주리라는 예상과 달리 이날 그 계곡에는 엄청난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계곡은 바람이 잔잔하기도 했으나, 풍향에 따라 바람골로 변하여 외부에 비해 훨씬 거센 바람이 형성되기도 했다.
어둡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산전수전 다 꺾어본 병사들은 거침없이 천막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바위와 흙벽으로 삼면이 막혀있는 지점에 세틴의 천막이 가장 먼저 설치되고, 오클린과 두 명의 병사가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갔다. 불을 피울 수 없으니 사람의 온기마저 없으면 천막 안이 냉골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틴의 천막이 가장 질 좋은 것일 테지만, 거센 바람소리는 사람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어디선지 모르게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모두 막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오클린, 천막 설치를 최소한으로 하고 한 천막에 가능한 많은 병사들이 들어가도록 해야겠네요. 경계병은 세우지 말고 전원 식사 후 취침에 들게 하세요. 경계는 내가 혼자 해도 충분합니다.”
오클린이 말했다.
“장군, 안됩니다. 장군께서도 쉬셔야 합니다. 경계는 짧게 돌아가면서 서게 하면 됩니다.”
세틴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날 경계를 서다가는 얼어 죽기 딱 좋아요. 지금 경계가 딱히 필요하지도 않고 내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병사들 열 명이 경계하는 것보다 나을 거에요. 테오의 등 위는 졸아도 될만큼 편안하니 나는 이동 중에도 쉴 수 있어요. 즉시 명령을 전하도록 하세요.”
식사를 마치고 오클린과 병사들마저 잠들자 천막 안에 점차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좀 더 지나니 침낭을 걷어차는 병사도 있었고. 세틴도 솔솔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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