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틴의 천적들
세틴의 새로운 시녀를 뽑는 일이 예상 밖의 난항이었다.
바네사가 세틴의 시녀장으로 온 지 보름이 흐르고 며칠 후면 새해가 밝는 데도 시녀들이 정해지지 않았다.
“바네사, 색시감을 고르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나 당신이나 왜 그리 까다로워 ?”
세틴이 드물게 역정을 내는 이유는 시녀를 뽑는 소문이 궁 안팎에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세틴은 결코 그런 일로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색시감을 고르는 거 맞습니다. 나중에 공자께서 결혼을 하시고 나면 부인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정실부인이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그리고 어머니가 아니라 대공비십니다. 두 분만 따로 계실 때 말고는 호칭에 유의해주세요.”
바네사의 딱딱한 저음은 아무리 들어도 쉽게 적응이 힘들었다.
“하아, 대공비께서 어련히 신경써서 고르시겠어. 대체 왜 오는 사람마다 퇴짜를 놓은 거야. 이유나 좀 알자고. 두 사람이나 자리가 비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렇다고 바네사가 모두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잖아.”
“제가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점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을 최선으로 모시고 싶은 저의 마음은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얼굴만 그럴싸 하게 예쁘고 머리가 텅 빈 것들이나, 불여우 같은 아이들을 공자님 곁에 둘 수는 없어요. 지금 인정 많고 성격 좋고 능력 출중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13 공자 곁에서 한 몫 잡아 보려고,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처자들이 한가득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시지요.”
세틴은 반박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머리 나쁜 애’. ‘불여우 같은 애’는 세틴도 질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건 알아서 하시고. 새해에 6 백작령에 파견하는 순행 사절단 문제는 대공비께서 무슨 말씀이 없으셨나 ?”
“13 공자께서 공국을 전반적으로 한 바퀴 돌아보시는 건 저도 찬성입니다. 다만, 대공비께서는 걱정이 더 많으십니다. 제대로 대공께 말씀이나 하셨는지도 의문입니다. 공자께서 직접 대공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도 좋겠지만, 자제들 중에 ‘대공께 부탁할 일이 있으면 일률적으로 대공비를 통하라’는 방침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나도 성인인데 대공비를 다시 찾아 말씀드리는 건 보채는 모양새라 영 싫은데......”
“제가 시녀 문제로 대공비 전하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미쳐 챙기지 못했습니다. 기회를 보아 꼭 설득해 보겠습니다.”
‘대공비 전하와 신경전’이라니...... 어머니가 바네사를 자기에게 ‘보내 버린’ 이유가 납득이 되고도 남는 세틴이었다. 하지만 세틴은 바네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시녀장치고 대국을 보는 눈도 있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며칠 지내면서 세틴이 만나는 사람이나 보는 책, 오가는 얘기들을 지켜보며 세틴이 후계경쟁에 나선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하는 일에 빈틈이라고는 찾기 힘들었다. 세틴의 입장에서는 최상의 시녀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네사가 시녀를 그토록 까다롭게 고르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어떤 아이를 들이는 게 세틴의 앞날에 유리할지 주판을 열심히 굴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바네사가 오러를 각성한 무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대공비 곁에서야 싸움 솜씨를 보일 일 자체가 없으니 이는 대공비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틴은 바네사가 처음 와서 대화를 나눌 때 그 사실을 알아챘다. 서슴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논쟁도 마다 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세가 드러났던 것이다.
세력도 재산도 없는 집안 핑계나 대며 허송세월 하고 있는 오빠들을 대신해서 입신양명할 생각으로 죽어라 검을 연마했다 했다. 궁에 시녀로 발탁되어 들어오기 전까지는. 독학한 것 치고 바네사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이 되고 마는 바네사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을 거라 짐작한 세틴이었으나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조스핀이 멀린을 만나 세틴의 희망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세틴을 보내지 않았으면 하는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스핀에게 세틴이 순행 사절단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멀린은 꽤나 고심했다. 다가오는 새해에 떠날 사절단는 의례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3 년마다 대공의 사절단이 6 백작령을 모두 돌아보는 순행 사절단은 원래 의미가 작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6 백작령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이 심상치가 않았다. 1 대 선조 때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던 나바니아 백작와 브라스틴 백작의 분위기가 다시 또 흉흉해지고 있었고, 공국의 곳간이라 할만큼 곡창지대인 브라스틴 백작령은 3 년 째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 골치 아픈 문제는 제국의 유력 가문에 선을 대고 있는 놀란과 리스톤 백작은 황위 쟁탈전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멀린이 직접 나선다 하더라도 해결하기 힘든 난제들이 쌓인 상황에서 조스핀의 걱정이 아니라도 세틴을 보내기에는 꺼려지는 바가 없지 않았다. 브라스트 궁에 멀린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마당에 세틴이 후계 경쟁에 의욕을 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열 네 살, 1월에 태어난 세틴은 그래 봐야 열 다섯이었다. 나랏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공자를 멀린은 늘 환영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세틴의 희망을 수용하게 되리라는 것을 멀린 스스로도 알고는 있었다.
브라스트궁에서 새해맞이 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되는 동안, 멀린은 세틴에게 아무런 내색도하지 않았다. 다른 일을 맡아도 뭐든 잘할 자신이 있는 세틴이지만, 그에게 순행 사절단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기에 속으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순행 사절단에 참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토마스는 이렇게 설파했다. 멀린이 후계 문제를 선언하면서 뜻이 있는 공자라면 너도 나도 앞장 서서 멀린의 눈에 띄려 할 게 뻔한데,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옥신각신 하면서 설치는 공자들보다 멀리 나가 고생하고 있는 아들이 먼저 생각나지 않겠는가.
새해맞이 행사들이 모두 마무리되는 1월 3일에 바네사가 세틴에게 자신이 뽑은 시녀 둘을 선보였다. 어차피 최종 결정은 세틴이 해야 했다.
바네사가 그녀들을 소개했다.
“13 공자님, 대공비께서 슈타인 가문에서 어렵게 데려 오신 아이들입니다. 공자님께 인사드리거라.”
“13 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난다 슈타인이라 하옵니다.”
“13 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완다 슈타인이라 하옵니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복사하듯 인사하는 두 아이를 보며 세틴은 조금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래, 반갑네. 그런데 바네사, 너무 어린 아이들 아닌가 ?”
난다가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공자님, 죄송하지만 초면에 너무 실례되는 말씀 아닌가요 ? 저희는 결코 어리지 않습니다. 키가 약간 작을 뿐, ‘저희도’ 나이가 열 다섯입니다. 13 공자께서는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어리다는 말씀은 거두어 주시지요.”
좀 어이가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반박할 말이 궁한 세틴이었다.
그런데 완다는 한술 더 떴다.
“대공가 공자의 시녀 자리가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세상 모든 소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대공비 전하에게 홀딱 넘어가서 저희를 팔아넘긴 어머니가 저희는 아직도 원망스럽습니다. 공자께서 저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바로 내치셔도 저희는 결코 공자님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세틴은 그제서야 슈타인 가문의 별난 쌍둥이 자매에 대해 들었던 소문이 생각났다. 천방지축에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바로 그 자매였다. 세틴은 뭐라 대꾸하기도 난감하여 바네사에게 구원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대공비 전하와 제가 유일하게 의견 일치를 본 아이들입니다. 시녀의 본분이야 차츰 가르치면 될 일입니다. 여자는 여자가 잘 보는 법입니다. 저 아이들을 데려 오기 위해서 대공비께서 들인 공이 적지 않습니다. 장담하건데 장래에 저보다 공자께 훨씬 도움이 될 아이들이니 받아 주시지요.”
“미리 언질이라도 주면 좀 좋아 ? 대공비께서 그리 정하셨다니 아들인 내가 따르지 않을 도리야 없겠지. 난다와 완다는 듣거라. 이제 내 시녀가 되었으니 밖에서처럼 천방지축으로 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저희가 천방지축이라는 헛소문은......”
난다가 또 뭐라 반박하려는 걸 바네사가 단호한 손짓으로 말렸다. 물러가는 그들을 보며 세틴은 ‘이런 시대에 여인의 몸으로 너무 똑똑하게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인 것이가’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이 쌍둥이 자매를 자신의 사람으로 길들이려면 고생문이 열렸다고 봐야 했다. 바네사가 반 이상은 해줄 거라고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세틴이 아니니 설마 하니 시녀들에게 휘둘릴 리는 만무하지만, 저마다 녹녹치 않은 시녀장과 시녀들이었다. 원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시녀를 좋아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세틴은 필요한 일들을 알아서 해낼 줄 아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마음 먹었다.
새해 들어 울브린과 토마스도 정식으로 발령을 받아 호위로 오게 되었으니 이렇게 세틴의 사람들을 교체하는 일이 모두 마무리 되었다.
순행 사절단에 참여하게 된다면 길바닥에서 새로운 팀의 합을 맞추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다른 공자 중에 멀린이 믿어 마지 않는 사람이 나선다면 모를까 나랏일에 의욕을 보이는 공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세틴은 가지고 있었다. 공자들이 대공에 대한 충성보다 제각기 자치령이나 다름 없는 6 백작들이 대공 자신도 아닌 공자를 떠받들어 줄 리도 없으니, 순찰단에 따라 나서봐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별로 빛날 일이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울브린과 토마스, 바네사, 난다, 완다가 세틴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요리가 돌아가자, 세틴의 집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바네사의 주도 아래 집단장을 새로 하고, 생활하는 규칙들도 일일이 정해 나가느라 한동안 집안은 여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난다가 세틴의 일상 생활의 모든 수발을 담당하고, 완다가 의상과 음식을 맡게 되었다. 둘의 생김새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차이도 찾기 어려웠는데, 행하는 일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듯 며칠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의 말과 행동은 누구나 구별할만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틴의 기분을 고려하려는 노력을 보이긴 해도, 매사 깐깐하게 따지고 드는 버릇은 둘 다 버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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