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 숄키닌
우살리드가 제대로 정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투너미 계곡을 빠져나간 후,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는 다치고 지친 병사들 불과 이 천 여명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나마 살아나온 것을 다행스럽게 여길 여유조차 없이 고난은 계속되었다.
챙겨온 물과 식량이 태부족이어서 우살리드 자신이 거의 굶다시피 하고, 물도 입술을 축이는 정도로 만족하면서까지 병사들을 챙기려 하였으나, 험난한 하랑가 고원을 다시 돌아갈 일이 꿈만 같았다.
하랑가는 참으로 이상한 것이 완전한 사막은 아니면서도 중간에 오아시스 같은 것 하나 존재하지 않았고, 가끔 가다 말라 비틀어진 관목을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부족한 식량을 말을 잡아 해결하려 하였으나, 말고기를 먹기 위해서도 꽤 많은 양의 물과 불이 필요했다.
배가 고프면 생고기라도 먹을 거라 생각했지만, 말고기는 조리를 하지 않고 생식을 하기에는 너무 힘든 고기였다.
몇몇 장수들과 상의를 거듭한 우살리드는 마침내 귀로를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북쪽으로 이틀 가량을 더 올라가면 눈덮힌 설원이 나오고, 춥지만 오히려 나무들도 자란다는 것이었다.
물과 불의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게 우살리드가 하랑가의 북쪽 설원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무렵, 세틴의 정예군 4 만이 북동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상의했던대로 고진을 수장으로 난다와 잘낫 등 일부 장수들과 1 만 5 천의 병력을 동부 가도의 최종 정리와 세벤 항구 장악을 위해 남겨 두었다.
북동부로 나아가는 세틴군의 선봉에는 베른과 울브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
마우니 평원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둘은 이미 5급 장군으로 진급을 했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 자격을 얻었다.
이미 북동부군과의 정찰전을 비롯한 경험이 있는 베른이 최선봉을 맡았고, 그 바로 뒤를 울브린이 받치고 있었다.
페링 진지가 있던 커다랗고 완만한 구릉지대를 지나면 곧바로 만나게 되는 곳이 숄키닌 백작의 영지였다.
페링 구릉을 지나 숄키닌 영지로 향하고 있는 베른의 앞에 마치 길을 막고 있는 듯한 일단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기세를 뽐내기 위해 일시에 돌격을 해서 밀어버릴까 하는 충동이 울컥 일었던 베른은 다행히도 기분을 억제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도저히 자신들을 막기 위한 군대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른은 자신의 이끌고 있는 3 천의 기마 선봉대에게 전열의 재정비를 명했고, 대오가 반듯하게 갖춰진 다음에야 다시 차분하게 행군할 것을 명했다.
베른의 일행의 맨 앞에서 거대한 흑마에 높이 올라 위용을 자랑하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3 천의 기마대가 발을 맞춰서 전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밖에서 보기에는 마치 모든 말들이 발을 맞춰서 행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도록 베른은 훈련을 시켜왔다.
군대의 생명은 사기이고, 사기의 절반은 위용에서 나온다는 베른의 지론에 따른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베른 군의 행군 모습은 마치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거대한 괴물처럼 위압적이고 당당했다.
베른의 눈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한 사람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베른군이 행군을 계속하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30 여보 앞에 이르자, 베른이 오른 팔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일동 정지 !”
베른군은 당당하게 행군해오던 모습 만큼이나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시에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정지 명령에도 어떤 혼란이나 수선스러운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베른이 말을 탄 채로 전방의 사람들을 슥 하고 훑어보자, 그들 가운데서 화려하게 장식된 외투를 걸친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
저는 이곳 숄키닌을 다스리고 있는 아난 숄키닌 백작이라 합닌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는 군대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베른이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은 마우니 평원에서 모그란데군이 폭망하고, 모그란데는 혼자서 몸을 빼어 달아났다는 소식을 여태 듣지 못했소 ?
모그란데가 자군드라 강 건너편으로 도망갔으니, 이제 북동부 우살리드의 차례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오.
지금 정예 제국군 10 만 명을 세틴 사령관께서 직접 인솔하여 이곳으로 향하고 있소.
그런데 우살리드는 어디 가고 개 한 마리도 잡지 못할 당신같은 사람이 내 앞길을 막는 것이오.
나는 우살리드 토벌군의 선봉장을 맡고 있는 5급 장군 베른이라 하오.”
아난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힘을 내어 말했다.
“제국군 10 만이라 하시었소 ?
이곳에는 우살리드 장군의 군대는 없어요, 이미 다 철수해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설마 우살리드 장군이 항복하지 않았다고 10 만이나 되는 제국군이 복수를 하러 온단 말입니까 ?”
베른이 불같이 화를 냈다.
“아무리 시골 영지의 영주라 해도 그렇지 세상 물정을 그렇게도 모른단 말이오.
우살리드는 이미 제국의 반역자로 낙인이 찍힌 지 오래이고, 북동부의 영주 귀족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작위를 박탈당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소 ?
또다시 불측한 마음을 먹고 우리 제국군에 조금이라도 대항하는 기미라도 보인다면 모조리 몰살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아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소.
나는 조정으로부터 작위를 박탈한다는 통보를 받은 적이 없단 말이오.
내가 직접 반란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왜 작위를 박탈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소.
우리는 제국군에 저항할 생각도 없고, 맞서 싸울 생각도 없습니다.”
베른이 말했다.
“그거야 당신이 우살리드에게 얼마나 협력을 했고, 병사와 물자를 얼마나 지원했는지 나중에 조사해 보면 다 나올 일이니 여기서 나랑 입씨름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소.
맞서 싸울 생각이 없다니 그건 다행스런 일이오.
그럼, 다시 묻겠소.
아난 숄키닌, 당신은 우살리드를 토벌하기 위해 오는 제국군에 전적으로 협력할 것이오 ?
여기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오.
내가 당신을 위해 조언하자면 지금부터라도 있는 힘을 다해 제국의 토벌군에 협력하는 것만이 당신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고, 나중에 혹시라도 다시 작위를 돌려 받을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길이오.
여기까지 나와서 우리를 영접해준 성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니 그리 아시오.”
아난이 쭈뼛쭈뼛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사실, 우살리드 장군이 돌아가면서 내게 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제국군이 이쪽으로 쳐들어올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다 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제국군이 쳐들어 온다면 지체없이 가능한 모든 병력과 물자를 데리고 페리앙 후작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가는 길에 다른 모든 영주들에게도 같은 방침을 전해라 했습니다.”
베른이 물었다.
“그럼, 그대는 왜 우살리드의 말을 따르지 않고 여기까지 나와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오 ?”
아난이 지체없이 말했다.
“그야......
솔직히 말하면 페리앙으로 모여 봤자 북동부인 모두가 한 솥에 쪄죽는 짓이고, 하루라도 빨리 항복하는 길이 살 길이라고 내 스스로 판단을 한 것이지요.”
베른이 웃었다.
“하하하, 어수룩한 시골 사람인 줄 알았더니 속에 구렁이가 아홉은 도사리고 있을 엉큼한 사람이었구려.
아무래도 좋소.
당신이 항복할 뜻이 확고하다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해야 할 것이오.
우살리드는 어디로 갔소 ?”
베른은 이미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넘어 북부를 공략한다는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선택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이미 하랑가를 넘어 큰 전투가 한 바탕 벌어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틴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우살리드의 행방에 대해 묻는 것은 아난 숄키닌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한 의도가 컸다.
아난이 또한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는 모릅니다.
우살리드 장군이 페링에서 철수해 돌아갈 때, 그는 단지 군을 재정비해서 제국군을 확실하게 이길 대책을 마련해 다시 올 거라고만 했습니다.
제국군이 쳐들어오면 페리앙으로 모이라는 것으로 보아 페리앙으로 돌아갔다고 짐작할 뿐이었지요.
설사 우살리드 장군께서 다른 뜻이 있다 하더라도 나같은 늙은이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셨겠습니까 ?”
아난은 베른의 기세로 보아 다시 꼬치꼬치 캐물을 줄로 생각했으나 베른은 반응은 단순했다.
“그렇군.”
대답한 사람이 스스로 불안해지게 만드는 절묘한 단순함이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인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지 몰라 아난이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그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던 베른이 말했다.
“내가 말이요.
이곳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구석진 북서부 산골의 영주였소.
백작이라는 당신에게는 비할 수도 없는 조그만 남작령이었지.
그나마 작위는 동생에게 줘버리고 뛰쳐 나와서 제국군에 몸담았소.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하는 줄 아시오 ?
아무리 조그만 땅덩어리라도 소위 영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수가 없지.
더구나 북동부에서 중앙으로 나오는 관문을 맡고 있는 대영주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우리 솔직해집시다.
당신이 나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 사령관님의 눈을 벗어날 길은 절대 없을 것이오.
나중에 세틴 사령관님을 직접 만나 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단박에 알게 될 것이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한 말이 모두 우살리드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거나, 우살리드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고자 혼선을 주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내가 당장 당신을 잡아 가두고, 토벌군 본대가 숄키닌을 무력으로 장악한다 해도 세상에 우릴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 되었소.
하나, 연극을 계속 한다.
하나, 지금이라도 솔직히 털어놓고 진심으로 협력한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시오.
다른 변명은 듣지 않겠소.
제국군에 당신의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어리숙한 장수는 한 명도 없소.”
아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자신의 말이 천의무봉이라고 생각했고, 특별히 의심할 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베른이 어떻게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베른의 말 그대로 아난은 우살리드가 지시한 그대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페리앙으로 집결한다는 방침은 세틴군이 북동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미 자신이 주변 영주들에게 모두 전했고, 아난이 이곳에 나와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언젠가는 발각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세틴군의 일개 선봉장에게 간파당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