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랑가 고원의 서쪽 끝자락
젊은 장수들이 너도 나도 나서는 이유는 분명했다.
누구라도 이번 전투가 모그란데라는 역적을 무찌른, 역사에 남을 전투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전공을 놓칠 수 없다는 공명심이 있을 터였다.
또한 이번 임무는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런 임무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이라도 던지겠다는 의기를 보이고 싶어 하는 측면도 있었다.
‘친위대는 사령관님의 곁을 지켜라’, ‘기병대를 지휘하는 데는 누구에게도 질 생각이 없다’, ‘자신이 나설 자리를 보고 나서라’ 등등 자칫 인신 공격으로 비칠 수 있는 말까지 난무하면서 입씨름이 이어졌다.
세틴도 누구를 보낼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네 명 중에 누구에게라도 중대한 임무를 맡겨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한편으로 한 명씩 따져봤을 때 어딘가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제비뽑기로 정할 수도 없었다.
세틴이 난감한 기색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젊은 장수들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던 고진이 손짓으로 모두를 제지하며 말했다.
“이번 임무는 제가 맡겠습니다.
내가 젊은 장수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번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저는 오로지 정찰이라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 전장에 목숨 걸고 나서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님은 늘 내게 최고의 공적을 부여해 주셨지요.
내가 공명을 탐해서 이 일을 맡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임무에 기꺼이 나서 주는 젊은 장수들의 의기에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할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는 일입니다.
지금 경험 많은 장군들 대부분이 한 발작 물러나 있는 상황에서 내가 셈프라 장군과 함께 가장 고참에 속하는 장수입니다.
셈프라 장군은 이런 일은 장기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틴은 고진이 나설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열나게 입씨름을 벌이던 젊은 장수들도 고진의 말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고진의 말 한 마디의 무게감이 달랐다.
세틴은 ‘그런 위험한 일을 맡기에는 당신은 너무 중요한 사람이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서로 가겠다고 나서는 젊은 장수들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던 고진이 스스로 임무를 자처하는 이유를 세틴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고진의 말대로 성공할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려면 고진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세틴은 이 상황에서 나서준 고진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렇게 필사의 돌격대를 지휘할 장수가 고진으로 결정되었다.
고진은 한마디로 ‘군인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정찰을 중시하는 세틴의 군략에 그도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었고, 적군의 상태나 움직임, 전장 주변의 지형과 날씨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승리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임을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는 그였다.
꽤나 오랫동안 세틴의 최측근으로 함께 하면서도 고진은 ‘충성을 다하겠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고, 필요할 때에는 세틴의 요구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는 역할에도 주저없이 나서 주었다.
그것이 바로 그에 대한 세틴의 신뢰가 누구보다 깊은 이유였다.
‘죽쑤기 작전’, 즉 모그란데의 방원진을 안으로부터 완전히 무력화시킬 필사의 돌격대를 맡은 고진은 부장으로 베른과 울브린을 선택하였다.
최근 들어 친위대에서 세틴과 손발을 맞춰온 가우디와 배커는 세틴의 곁에서 본진을 이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5 천에 달하는 기마돌격대에 대한 선발까지 마치고 몇 가지 전술 훈련을 진행하면서 며칠이 흘러갔다.
마우니 평원에서 세틴과 모그란데가 일대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때, 하랑가 고원의 서쪽 끝자락에서는 또다른 역사적인 전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저스틴의 별동대가 황도 주변을 지날 무렵, 호아니도 합류하였다.
하지만 호아니는 별동대에서 군사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별동대의 군사로 토마스가 있는 만큼 그가 끝까지 직무를 다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호아니는 별동대와 동행하기는 하되, 어디까지나 조정의 지원과 북부 총독인 베그던과의 협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못박았다.
별동대는 북부의 중앙이라 할 수 있는 모그란데령에서 베그던과 만났다.
미리 연락을 받은 베그던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별동대와 호아니를 영접하였다.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지나 북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에게 공유된 상태였다.
모그란데의 저택에 마련된 조촐한 연회장에서 저녁 식사를 겸한 대책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베그던이 주인으로서 먼저 운을 뗐다.
“우살리드는 참 대담한 자입니다.
어떻게 하랑가 고원을 넘어 북부를 공략할 생각을 했는지 놀라운 뿐입니다.
다행히 세틴 사령관께서 이를 미리 예측하시고 대비를 해주시니, 먼저 북부를 대신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북부는 만약 모르고 있었다면 우살리드에게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넘어갔을 것입니다.
내가 몇몇 영주들과 함께 북부로 돌아온지 몇 달이 지났지만, 북부의 상황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여기 저기서 굶어죽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었고, 봄이 와도 파종도 제대로 못하는 곳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나마 세틴 사령관의 직접적인 도움이 있었고, 호아니 경이 조정에서 힘을 써주어 적지 않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그럭저럭 파종이라도 마칠 수 있었고, 굶어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된 셈입니다.
사실 우살리드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도 병력을 동원해서 어떻게라도 막아보겠다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여전히 상황은 어렵습니다.
북부가 당면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또다시 제국군과 조정의 도움을 받게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으나, 그만큼 북부는 피폐해졌고 마음이 있어도 힘을 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도 죽을 힘을 다 짜내어서라도 우살리드를 막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채 1 만이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무장이나 훈련 상태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당장 우살리드를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니, 내가 직접 그들을 이끌고 힘을 보태겠습니다.”
저스틴이 이번 일의 주장으로서 베그던에게 화답하였다.
“북부의 상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그던 장군께서 그렇게 나서주시겠다는 말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북부에서 우살리드를 맞아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우살리드가 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장 가장 시급하게 하랑가 고원의 서쪽 끝자락 부근에서 우살리드 군을 저지하기에 적합한 지형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우선 장군께서 그에 대해 파악하고 계신 바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베그단이 말했다.
“이번 작전의 개요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쪽으로 급하게 사람을 보내서 세부적인 정찰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북부에 살지만, 인적 하나 없는 하랑가 고원을 통해서 누군가가 쳐들어 온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어서 나도 그쪽 상황이나 지형을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곳의 하랑가 접경, 즉 하랑가 고원의 서쪽은 마치 항아리와 같은 거대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랑가 방면에서 북부로 진입하려면 사막과도 같은 커다란 분지를 통과해서 벽처럼 늘어서 있는 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내가 정찰을 보내면서 우살리드의 입장에서 반드시 지나게 될 지점이 어디일지에 초점을 맞추라고 지시를 해두었습니다.
이번 일은 우리가 싸우고자 하는 전장을 선택한다기보다 우살리드의 입장에서 반드시 지나게 될 길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중에서 어느 지점을 공략할지를 정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가 말했다.
“여러 번 뵈어서 아시겠지만, 이번 별동대의 임무에 군사 역할을 맡게 된 토마스입니다.
역시 베그던 총독께서는 노련하십니다.
간단하게 보낸 전언을 접수하고 그만큼 대책을 세우셨다니 대단하십니다.
말씀하신 바가 바로 저희들이 가장 원했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랑가 고원의 서쪽 끝자락 어느 곳에선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살리드가 달리 우회를 한다거나 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봉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장군께서는 직접 전투에 참여할 병력을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투는 우리 별동대 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이쪽이 워낙 생소한 지역이다 보니, 북부에서는 정찰과 보급, 등의 지원 업무를 주로 맡아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병력은 만약을 위해 대비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추정하기에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통과할 시기가 그리 머지 않습니다.
늦어도 삼 사 일 내에 통과가 예상됩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찰 결과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내일 하랑가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군하기에 적합한 지점이나 길에 대해서는 장군께서 생각하신 바가 있으신지요 ?”
베그던이 말했다.
“실로 한시를 다투는 화급한 상황이군요.
원래 하랑가 방면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워낙 적다 보니 제대로 길이 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쪽에서 보자면 하랑가 방향이 병풍처럼 둘러진 높은 산인지라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캐러 드나드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습니다.
제대로 난 길이 없다는 말은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산 너머까지 이어진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해둔 곳은 투너미 고개입니다.
하랑가와 북부를 가로지르는 산맥에서 비교적 낮은 지점이고, 마차는 어렵지만 말이 다닐 수 있는 길이 고개 너머까지 나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이기도 하지요.”
토마스가 다시 말했다.
“마차가 다닐 수 없다면 수송과 보급선에 어려움이 많겠군요.
어쨌든 우리 별동대는 내일 아침 일찍 투너미 고개로 진군하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이곳에 남아 지원과 후속 대책에 만전을 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호아니 군사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
호아니가 말했다.
“나도 여기 남겠네.
장군을 도와 지원 업무가 충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무엇보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원을 계속 챙기려면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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