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지는 조정
오디어스에게서 빠져 나온 세틴을 저스틴과 카스텔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틴과 오디어스의 만남이 그리 화기애애한 자리가 아니었음을 전혀 모르는 카스텔라는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세틴을 맞이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세틴.
얼굴만 봐도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겠네.
우리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얘기는 들었겠지 ?”
세틴은 먼저 저스틴과 눈으로 인사를 나눈 후에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전에 얘기가 한 번 나왔었는데 이렇게 빨리 성사가 될 줄은 몰랐네요.
형도 축하해.”
저스틴은 할 말이 엄청나게 많다고 표정에 쓰여 있었으나, 카스텔라가 있는 자리인지라 얘기를 꺼내지도 못해 답답하다는 인상이었다.
“황녀님, 제국군에서는 제가 세틴의 부하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임무 완수에 대한 보고를 정식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가 조금 마음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카스텔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
군인들이 어떤 모습인지 이번 기회에 한 번 볼까요 ?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세요.”
카스텔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스틴이 차려 자세를 하고 군례를 올린 후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 보고 드립니다.
맡겨 주신 임무를 틀림 없이 완수했습니다.
우살리드 군 2 만 여명을 사살했고, 우리 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랑가 고원으로 퇴각하는 우살리드의 패잔병 2 천 여 명을 추격하여 씨를 말리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사령관님의 명에 입각하여 추격은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인명을 한꺼번에 살상했다고 사령관님께 꾸중을 들을까 걱정하는 장수도 있고, 우살리드를 추격하지 않은 일에 대한 질책을 걱정하는 장수도 있습니다.
사령관님께 보고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황도에 와 조정으로부터 작위를 비롯한 포상을 받은 일에 대해서도 송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 간략한 보고 마치겠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서류로 보내드렸으니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세틴도 정자세를 하고 답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스틴 대장.
염려하고 있다는 질책은 모두 당치 않습니다.
조정에서 포상을 받은 일도 법도에 어긋나는 점은 없습니다.
백작이라는 작위를 받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국군에서는 저스틴 대장에게 3 등 장군의 직위를 부여하는 포상을 결정했습니다.
이하 장수들도 이에 준하는 포상을 이미 결정한 바 있습니다.
오늘 보고를 마쳤으니 별동대는 공식적으로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별동대는 현재 세벤 항구에 있는 본대로 귀환하지 않고, 황도의 사령부로 전원 복귀합니다.
또한 저스틴 장군은 현재 대기 발령 상태입니다.
제국군에서 별도의 임무를 부여하지 않은 이유는 황태자 전하와 저스틴 장군의 거취에 대해 상의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결정이 나지 않은 상황으로 대전회의에서 이번 전쟁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나고 나서야 결정이 될 듯합니다.
이상.”
정식 보고 절차를 마치고 나서야 세틴이 저스틴에게 다가가 어깨를 끌어 안고 형제의 정을 나누었다.
카스텔라는 이런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와우, 둘 다 너무 멋져.
이런 게 남자들의 세계, 군대라는 거군.”
세틴이 물었다.
“그런데 결혼 날짜는 잡았나요 ?
이미 결정이 된 마당이니 두 사람만 큰 문제가 없다면 빠를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
저스틴이 말했다.
“아직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어.
조정에서 이번 전쟁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나고 거취가 정해진 이후에 결혼식을 열자는 황태자 전하의 생각이야.
내가 도저히 불가한 일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전하께서는 내가 제국군 사령관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신 듯해.
어쨌든 그 문제가 마무리되고 나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열고 나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하겠다고 하시는구나.”
세틴이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문제라면 걱정 마.
방금 전하를 뵙고 안되는 일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어.
제국군을 통솔하는 일이 지위나 신분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씀드렸지.
날더러 승상을 하라는데 그것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
카스텔라가 만면에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왜 ?
지금 세틴 만큼 큰 공을 세우고 제국을 안정시킨 사람이 누가 있다고 ?
세틴이 승상을 왜 못해 ?
사람들이 반대할까 봐 그러는 거야 ?”
세틴이 카스텔라를 보며 웃었다.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두 분이 얼마나 알고 계신지는 모르나, 지금 황궁이 얼토당토 않은 자들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나를 승상으로 올리고 저스틴 형을 제국군 사령관으로 삼겠다는 생각도 전하의 생각이라기보다 비언차이라는 시종장의 생각이 분명합니다.
만약 두 분마저 그 황궁의 요물들에게 휘둘리게 되면 향후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내가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승상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저스틴 형이 사령관이 된다면 제국군 내에 분란만 야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스텔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엊그제 황도에 돌아왔다면서 벌써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었어 ?
세틴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내가 벌써 까맣고 잊고 있었군.
네 말이 맞아.
사실 나도 아버지가 비언차이에게 휘둘리는 꼴이 보기 싫어 죽겠어.
궁내의 내관들과 황비들까지 전부 비언차이 한 사람에게 꼼짝을 못하는 지경이라서 나도 말 한 마디 하는 게 조심스러울 정도라니까.”
세틴이 말했다.
“하루 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일단, 조만간 황궁 전체에 대해 대대적인 감찰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궁내의 요사스러운 자들을 쳐내지 않고서는 황태자 전하께서 제대로 정사를 이끌어 나가기도 어렵고, 본인의 안위마저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되고 맙니다.
다행히 황태자께서 저스틴 형을 좋게 보고 있으니 두 분께서 전하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은 황제 폐하의 용태가 어떠신지 매일같이 살펴주시고, 내관들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방비하는데 오클린 근위대장과 협력해주셨으면 합니다.
폐하께서 워낙 연세가 많으시니 언제 돌아가신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만약 누군가 의도적으로 폐하를 시해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저스틴이 말했다.
“그 문제라면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예비 부마의 신분으로 황궁에 머물게 되면서 오클린 대장과는 수시로 만나고 있다.
문제는 황궁에서 실질적인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폐하의 황비들인데, 연로하신 분들은 대부분 이미 돌아가셨거나 살아 있어도 큰 소리를 내는 분이 없지만, 폐하께서 노년에 맞은 젊은 황비들은 작은 일이라도 간섭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야.
그래서 사실상 폐하의 침전을 철통같이 지키고, 드시는 약과 음식을 감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지.”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기는 오클린에게서 몇 번 전갈을 받아서 충분히 알고 있어요.
신분상 그나마 황궁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분이잖아요.
두 분께서 내관들과 황비들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 보셔야 할 거에요.
내가 황도에 오기 전부터 마치 내가 황태자 전하의 가장 큰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람을 불어넣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내가 이미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아마 조만간 어떤 움직임이 있어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두 분께서 잘 대처를 해주셔야 일이 커지지 않습니다.”
세틴은 저스틴, 카스텔라와 그간의 일들에 대해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다가 황궁을 나왔다.
관저에 돌아오니 바네사가 호아니와 단 둘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세틴은 호아니에게 황태자와 만난 이야기와 황궁의 동태, 향후 황궁을 밑바닥부터 정리할 계획을 들려주었고, 호아니의 이야기는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보고가 주를 이루었다.
호아니에 따르면 지금 조정은 약 삼분지 일이 황태자와 밀착해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고, 나머지는 관망, 중립, 혹은 다른 황자들에게 밀착한 자들이었다.
황태자를 추종하는 세력이 다수가 아님에도 그동안은 주로 그들의 의도대로 조정이 운영되어 왔다.
최종 결정권이 황태자에게 있고, 황태자를 견제하는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할 만한 대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일, 이 황자의 병이 깊어져 조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 세틴이 귀경한 이상, 세틴을 앞세워 황태자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바로 시작될 거라는 호아니의 예측이었다.
세틴은 호아니에게 당분간 조정의 주도권을 가지고 황태자와 맞설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 의도를 가진 자들이라면 세틴에게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면 필시 호아니를 통할 것이기에, 호아니가 세틴의 방침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세틴은 조정은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던 말던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제국군이 갈리온 후작과 동부 왕국 문제에 대한 대처를 주도해 나가는 일에 주력할 생각이었다.
한편, 각지의 총독들을 모두 황도로 불러 총독회의를 개최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제국의 행정 전반을 쇄신할 계획임을 밝히고, 호아니에게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수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틴의 이런 방침을 가장 잘 보여준 대목이 황궁 증축건이었다.
정사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제국군이 할 일을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울 생각이었다.
며칠 후, 세틴이 귀경해서 처음 참여하는 대전회의가 열렸다.
대전회의 전에 황궁 앞에서 제국군의 개선을 축하하는 환영식이 열렸고, 세틴은 제국군 장수, 병사들과 함께 조정 대신들, 황도의 귀족들, 광장을 발디딜 틈 없이 메운 일반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세틴은 인사말을 통해 황실과 조정의 지원에 대해 형식적인 언급을 했을 뿐이었고, 적과 아를 떠나서 전쟁에서 희생당한 병사들에 대한 추모에 훨씬 많은 발언을 할애했다.
또한 제국은 아직 반석 위에 올랐다 할 만큼 안정되지도 않았고, 북부와 북동부의 예를 들어 가며 백성들의 삶이 여전히 비참한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국내에는 아직 조정에 반감을 가지고 버티고 있는 세력들이 적지 않고, 언제든 제국을 노리거나 적반하장 격으로 원한을 갚겠다고 벼르고 있는 동부 왕국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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