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요새 점령 작전
초겨울인 데다 주변이 산악 지형이어서 해는 늦게 떠올랐다. 덕분에 세틴군은 꽤나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비는 그쳤으나 짙은 안개가 낀 새벽이었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얼굴을 내비치기 전, 부옇게 밝아오는 하늘에도 안개는 시야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었다.
세틴을 비롯한 100 명의 기습조는 바늘 요새에 오르는 바늘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150 보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세틴이 정찰대장 고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50 보 전방 길 양 옆에 두 개의 망루가 있습니다. 왼쪽에 4 명, 오른쪽에 3 명이 있는데 경계태세는 허술합니다. 제가 왼쪽 고진 대장이 오른쪽을 맡습니다.
일체 소음 없이 빠르게 제압해야 합니다. 모조리 숨통을 끊어 변수를 없앱니다.”
고진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세틴과 고진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진이 돌아와서 망루까지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아주 작은 비명소리조차 없는 깔끔한 처리였다.
세틴의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나와 고진 장군이 출발한 후, 속으로 백을 헤아리고 나서 진격을 시작합니다.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면서 가능한 빠르게 이동합니다. 우리는 중간에 혹시라도 조우하게 될 적군을 역시 소리 없이 제거하면서 길을 뚫습니다. 우리 둘이 요새 정문을 장악하여 문을 열어야 합니다.”
고진의 동그라미 표시와 함께 둘이 동시에 출발했다. 세틴과 고진은 도중에 때마침 망루 경계 교대를 위해 내려오던 노스롭군 8 명을 마주쳤고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진이 마지막 한 명을 처리하는 시간이 약간 늦어졌고, 날카로운 신호음이 하늘을 갈랐다. 노스롭군이 사용하는 신호용 화살이 발사된 것이었다.
세틴과 고진은 속도를 높였고, 뒤따르던 기습조도 신호음을 듣자마자 소음을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바늘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세틴이 관문 입구에 도착해서 보니 어이없게도 관문 위에는 병사 몇이 우왕좌왕 하고 있었을 뿐, 지휘관도 없어 보였다. 노스롭 군에서는 신호음이 퍼진 방향을 오인한 것이었다.
노스롭 방면에서 이변이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선입견 때문에 지휘부와 병사들이 북쪽 관문 방면으로 몰려가고, 남쪽 관문 부근은 오히려 텅 비어있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세틴과 고진이 손쉽게 관문 입구를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오래지 않아 기습조 전원이 관문으로 진입했다. 세틴의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전령은 전군 즉시 최고 속도로 관문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전하라. 우리는 바로 다리 건너편 관문을 장악한다. 그곳에서 후속 부대가 합류할 때까지 방어태세를 굳힌다. 즉시 진격하라.”
바늘 요새에는 모두 4 개의 관문이 있었다. 절벽 위 다리 양 끝에 작은 관문이 있고 거기서 다시 남쪽과 북쪽에 본 관문이 있는 형태였다.
원래 본 관문과 다리 관문 사이에 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남쪽 관문 쪽에는 공간이 넓지 않아 북쪽 관문에 본진이 있는 상황인데다, 신호음을 오인하면서 북쪽 관문 방향으로 노스롭 군 대다수가 몰려간 상황이었다.
세틴이 말한 관문은 바로 다리 건너편 관문이었다. 100 명의 기습조 만으로 노스롭군 본대를 곧바로 타격할 수 없으므로 후속 부대가 올 때까지 다리 관문에서 버티면서 대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바늘 요새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700 여 년 전 건설이 시작된 다리는 무려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서야 완공되었다. 그만큼 난공사라는 얘기였다.
비록 길이가 50 보 정도에 불과한 다리였지만 숱한 실패를 거듭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락사했다고 전해진다. 처음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으나 점차 확장하여 지금은 마차가 두 대가 지날 정도로 넓어졌고 양 옆으로는 튼튼한 난간도 설치되어 있었다.
다리 양쪽의 다리 관문을 점령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측 다리 관문을 점령하고 기습조 100 명이 방어 진형을 갖춘 후에야 적군에서 반응이 왔다. 이쪽의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파악한 노스롭군은 즉시 반격에 나섰다.
북측 본 관문 바깥 쪽에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음을 확인한 노스롭 군이 어느 정도 세틴군에 대한 대응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장을 갖춘 천여 군사을 서둘러 정비한 노스롭군이 다리 관문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스롭군은 심각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세틴군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병 100 명의 위력은 엄청났다. 기사급 이상의 장수 예닐곱 명이 속절없이 썰려 나가고, 막대한 물량 차이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기습조의 쓴맛을 본 노스롭군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를 물렸다. 세틴군의 위세가 보통이 아님을 실감한 것이었다.
150 보 이상을 물러난 노스롭군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한편, 궁수대를 앞세워 사격을 시작했다. 화살비가 수 차례 세틴군에게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태반은 세틴군에게 이르지도 못하고 떨어졌고, 겨우 도달한 화살들도 세틴군이 방패를 꺼내 들지 않고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는 사이 후속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세틴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기습조의 임무는 거기까지였다.
세틴군은 천 명 가량의 방패병을 선두로 서서히 진군을 시작했다. 후속 병력 1만 정도가 다리를 건너 관문 안쪽으로 진입했을 즈음에 세틴이 진군 정지를 명했다.
갑옷을 갖춰 입고 테오의 등에 오른 세틴이 전열의 앞에 나서며 외쳤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반역자 노스롭을 처단하러 온 세틴군이다. 나는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이자 황제 폐하의 외손자이며 제국의 백작위를 부여받은 세틴 브라스트다.
내가 보니 너희들은 오천도 되지 않는데 우리는 3만의 정예병이다. 계속해서 저항을 한다면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관대하신 폐하께서는 항복한 병사들은 모두 제국의 백성이니 결코 죽이지 말고 용서받을 길을 열어 주라 하셨다.
이에 나는 너희들에게 얌전히 항복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많은 시간은 줄 수 없다. 아침 안개가 걷히면 우리는 즉시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이곳의 수장이 있으면 나서서 할 말이 있다면 해 보라.”
노스롭군의 진영에서 한동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노스롭 진영에서 한 장수가 나섰다.
“나는 노스롭군에서 바늘 요새 방위를 맡고 있는 이벌튼 조아렌 자작이다. 그쪽의 군세가 3만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다. 전장에 나선 장수가 어찌 한 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 있겠는가 ?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이 남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세틴이 말했다.
“조아렌 자작, 끝까지 싸우겠다는 용기는 가상하다만, 천혜의 요새라는 바늘 요새 관문 셋이 이미 우리 손에 떨어졌다.
그대도 일군의 책임을 맡았다면 대세를 보는 눈이 있을 터. 마지막 남은 북쪽 본 관문 밖에 너희들의 아군이라도 있는가 ? 우리의 군세를 믿고 말고는 그대 마음이다.
하지만, 이미 진 싸움이 분명한데 어찌 장수가 되어서 병사들의 목숨을 그렇게도 가볍게 생각한단 말인가. 내 이미 분명히 말했다. 안개가 걷히면 우리는 진군할 것이고 너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우리 세틴군은 지금 반역자에 대한 분노와 한 명이라도 더 죽여 공을 세우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나의 자비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노스롭군 병사들과 장령들은 듣거라. 너희들의 대장이 너희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니, 끝까지 그를 따르겠다면 그 용기를 존중하여 가차없이 저승으로 보내주마. 하지만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리는 자는 굳이 죽이지 않겠다.
단 한 발 화살을 날리거나, 단 한 번 칼질을 하거나, 단 한 번이라도 창을 내미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하도록.”
말을 마친 세틴이 말을 돌려 진영으로 돌아가자 노스롭군에서는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조아렌을 비롯한 몇몇 장수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 군을 추스르려 애쓰는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노스롭군 병사들에게 관문 밖은 낯선 땅이었다. 에메랄드호 방면에 토벌군이 없다는 보장도 없고, 도망쳐 본들 당장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독 안에 든 쥐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를 가진 병사는 거의 없었다.
안개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자 노스롭군의 동요는 한층 심해졌다. 무기를 내던지고 세틴군 방향으로 도망쳐 나오는 병사들이 조아렌의 명령에 따라 발사된 화살에 속속 쓰러지는 중에도 대열을 이탈하는 자들이 늘어만 갔다.
전열이 완전히 무너진 것을 확인한 조아렌이 이탈 병사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키고 말을 달려 세틴군 진영으로 달려왔다. 말에서 내린 조아렌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세틴이 달려 나와 조아렌을 일으켜 세우자 양쪽 진영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나왔다. 세틴군에서는 승리의 함성, 조아렌군에서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함성이었다.
큰 피해 없이 무혈입성이나 다름없는 요새 점령 작전이었다. 바늘 요새를 차지하는 것으로 세틴군의 도강작전은 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에서 포로나 항복한 장수와 병사들에 대한 처결권은 전적으로 군단의 수장인 장군에게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황제조차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세틴은 조아렌을 비롯한 수하 장수들을 일일이 불러 처결권을 행사했다.
조아렌과 그의 장수들 중에서 노스롭에 대한 충성을 고집한 자는 없었다. 모두 제국과 황제 및 세틴에 대한 충성과 절대 복종을 맹세하고 세틴군의 휘하에 들기를 원했다.
이로써 세틴군은 요새 점령 작전을 통해 군세를 오히려 5 천 가량 불리게 되었다. 세틴은 그들을 각 병대에 분산해서 배치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세틴군에 녹아들 것이었다. 그리고 세틴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당분간 바늘 요새를 벗어나 적극적인 군사 행동에 나설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바늘 요새를 차지한 세틴은 그곳에서 새해를 맞았고, 얼마 후 16 세가 되는 생일이 되었다. 생일 며칠 전에 멀린이 파견한 사절단이 엄청난 양의 식량을 가지고 도착하였다.
멀린은 16 세가 된 세틴의 생일을 축하하며 세틴군 전체에게 생일잔치를 배풀도록 충분하고도 남을 술과 고기를 가져온 것이었다.
세틴의 생일날 바늘 요새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최소한의 경계 병력을 제외한 병사들 모두가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사절단을 이끌고 온 외무대신 율리 올란드 후작이 대표로 세틴의 16 세 생일을 축하하는 인사말을 했다.
“세틴 브라스트 백작님의 16 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천년 제국 역사에서 15 세의 나이에 스스로의 공으로 백작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한 고작 토벌군 선발대의 일군을 이끌어 천혜의 난공불락이라는 바늘 요새를 공략함으로써 노스롭의 서부 진출 야욕을 단숨에 꺾어버린 대공을 세우셨습니다. 세틴군의 위명은 이미 제국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고, 모두가 세틴군의 향후 행보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메랄드호 연안의 5 대 영주들이 이미 세틴군에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고 들었습니다. 브라스트에서도 세틴군이 노스롭을 처단하는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멀린 브라스트 대공께서는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아들이기 이전에, 이제는 도탄에 빠진 제국을 위기에서 구원할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세틴 브라스트 백작을 위해 모든 역량을 아까지 않겠다는 의미로 오늘의 생일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이 세틴 백작과 함께 끝없는 영광의 길로 나아가시길 기원하며, 모두 잔을 들어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율리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더 늘어났지만,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했다. 율리의 기나긴 건배사와 함께 장내는 뜨거운 열기가 넘쳐흘렀다. 술잔을 쭉 들이킨 세틴이 일어섰다.
“이 잔이 내가 생전 처음으로 술을 마신 잔입니다. 무척 쓰군요.”
장내에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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