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상이 되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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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단이 복귀한 지 5 일 후에 칙사가 도착했다. 칙명의 전달은 다른 모든 절차에 우선하도록 정해져 있었기에 칙사에 대한 환영 절차 같은 것 없이 브라스트 궁문 앞에서 칙명 전달식이 치러졌다.
칙사로 온 인물은 제국의 외무대신 카우스 알스타인 백작이었다. 천년 제국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었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의 나라 그 자체이니 별도의 이름이 필요치 않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의 발로였다.
눈앞의 멀린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고 칙명을 전달할 생각을 않던 카우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멀린 브라스트 대공은 무릎 꿇어 지엄하신 황제의 명을 받으시오.”
하지만 멀린은 무릎을 꿇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외무대신 올란드 후작이 나섰다.
“칙사께서 무언가 착오가 있으신 듯 합니다. 제국법에 대공과 그의 적법한 자식들은 황제와 황태자를 친견할 때 외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카우스가 짐짓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칙명을 받는 것이 폐하를 친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황도에서는 예외 없이 칙명을 받을 때 무릎꿇는 것이 관례요. 모르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그때 멀린이 쓰다달다 말도 없이 몸을 돌려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 따위와 입씨름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이후 카우스와 율리 사이에는 ‘친견’이라는 말의 뜻이 어떻다느니, 당초 사울에게 대공의 작위를 줄 때의 취지가 어떻다느니 끝도 없는 입씨름이 이어졌다. 하지만 카우스에게 대공을 무릎 꿇릴 수단이 있을 리 만무했고, ‘무릎을 꿇지 않아서 칙명을 전달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칙사의 임무를 못 다하고 돌아간들 잘했다고 해줄 사람도 없을 터였다. 애초에 카우스가 이길 수 없는 기싸움이었다.
결국 무릎은 꿇지 않고 칙사가 한 뼘 정도 높은 단 위에서 칙명을 낭독하고 전달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멀린이 다시 카우스 앞에 섰다.
“천년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멀린 브라스트 대공에게 명하노라. 멀린은 명을 받는 즉시 황도로 상경하여 승상의 직을 맡아 짐을 도우라. 짐이 폐지되었던 승상의 직을 부활하면서까지 그대를 부르는 것은 짐이 너무 늙고 병들어 만사를 관장하기 어렵고, 다음 제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정세가 어지러우며, 도처에서 불순한 무리들이 발호하여 제국의 안위가 풍전등화와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사태를 수습하고 천년 제국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 놓을 자가 누구인가 ? 짐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굳건하고 내 사위이기도 한 멀린 브라스트를 떠올렸노라. 짐의 걱정은 브라스트에 가뭄이 계속되고 기근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수 만 명 굶어 죽었다고 들었기에 대공이 쉽사리 몸을 뺄 처지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대공이 도저히 상경하여 짐을 도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대의 적법한 후계자를 짐에게 보내어 돕게 하라. 제국력 1043년 2월 황제가 친히 말하고 외무대신 카우스 알스타인이 대필하다”
칙서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런 중에도 멀린은 침착하기 그지 없었다. 두 손으로 칙서를 받아서 다시 읽어보고 난 후 멀린이 카우스에게 물었다.
“백작이 직접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대로 받아 썼다는 데 거짓은 없겠지 ?”
“칙명에는 일말의 거짓도 있을 수 없소이다. 칙서를 위조하는 것은 제국에 대한 반역과 마찬가지요. 내가 가문을 걸고 하늘에 맹세할 수 있소.”
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칙명에도 명시했다시피 브라스트의 상황이 무척 어렵소. 마침 6 백작령의 백작들도 모두 프라움에 와 있으니 충분히 의논해보고 결정을 내리지. 그동안 칙사는 편안히 쉬면서 답을 기다리시오.”
카우스가 딴지를 걸었다.
“칙서에는 ‘즉시 상경하라’고 명시되어 있소. 상황이 무척 다급하니 대공께서는 빠른 시일 내에 결정을......”
“지금 다시 나와 입씨름을 하자는 것인가 ? 그대는 자신이 왜 영지도 없는 백작이고 내가 왜 대공 전하로 불리고 있는지부터 잘 생각해 보도록!”
멀린이 카우스의 사설이 길어지는 걸 잘라버리고 몸을 돌렸다.
카우스는 제국의 대신이자 칙사인 자신을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율리가 간신히 그를 달래어 숙소로 데려가면서 칙서 전달식이 마무리되었다.
멀린은 이틀을 고심한 뒤 사흘째에 코데옹을 소집했다. 카우스는 자신도 참관하겠다고 우겼으나,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브라스트 최고 결정기관인 코데옹에는 그 어떤 외부인도 참관할 수 없다는 멀린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6 백작과 이종족들까지 가세한 코데옹은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가장 늦게 등장한 멀린이 서두를 뗐다.
“칙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들 이미 알고 있을 것이네. 한마디로 승상직을 맡거나 내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는 얘기지. 내가 수도에 가서 승상 노릇을 해야겠소, 아니면 인질을 보내야겠소. 지금부터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도 무제한 발언권을 줄 것이고, 발언 내용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묻지도 않을 것이며, 발언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를 추궁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오. 브라스트 공국의 앞날과 백성들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기탄없이 의견을 제시해 주기 바라겠소. 여러분의 자유로운 논의를 위해 나는 가급적 일체 발언을 하지 않을 것이오.”
코데옹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칙명의 진위 여부에 대한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알려진 황제의 병세는 거의 의식이 없는 거나 다름 없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기에 과연 황제의 진실된 의중이 담긴 칙명이겠느냐는 의견들이 많았다.
진짜다, 아니다, 누군가의 음모다 등등의 견해가 끝도 없이 나왔으나, 결국 진위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설사 칙명이 다른 꿍꿍이를 가진 세력들의 조작이라 하더라도 브라스트에서 그것을 입증할 수 없는 바에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처음부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론이었으나, 대공 직속의 귀족들이나 관리들은 물론 6 백작들도 멀린이 가야 하는지 인질을 보내야 하는지 명확한 의견을 밝히기 꺼렸기 때문에 논의를 질질 끄는 분위기였다.
둘 중 하나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점이 명확해지자 누구나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전반적인 대세는 멀린이 가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멀린이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의견들도 꽤 있었으나, 인질을 보내야 한다는 말을 꺼내기는 누구나 꺼렸다. 무엇보다 브라스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적법한 후계자’라고 칙명에 명시된 만큼 브라스트의 후계 문제도 동시에 걸려 있는 바, 멀린이 3 년 후에 후계자를 세우겠다고 한 상황에서 후계 문제를 거론하기도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코데옹 3일 째에도 결론 없는 공방이 계속되고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도 없이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상황이 되자 결국 멀린이 나섰다.
“지난 3 일 동안 공들의 의견은 충분히 들었네. 나는 처음부터 내가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대들의 생각을 모두 들어보고 싶었소. 다들 브라스트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사심없이 의견을 내주어서 고맙게 생각하오. 하지만 승상이 된다는 것이 내 일신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소.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다시피 내가 황도에 간다 한들, 황제 폐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는다 한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오. 그래도 가야 한다면 가야지. 이제부터는 내가 황도로 간다는 전제 하에서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에 대해 논의해 보시오.”
올란드 후작이 나섰다.
“대공 전하께서 황도로 향하신다면 브라스트 본가를 황도로 옮겨간다는 마음으로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자들을 충분히 대동하심은 물론, 무엇보다 무력이 중요합니다. 기사단 절반 이상, 병력 10만 정도는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러자면 6 백작령에서도 적어도 세 분 백작이 동행하고, 각 백작령에서 1 만 정도의 병력을 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준비 없이 황도에 가신다면 아무리 탁월한 식견과 역량을 지니신 대공 전하라도 자칫 빛좋은 개살구의 처지에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율리의 폭탄선언에 장내가 한참 동안이나 술렁거렸다. 이럴 때 듣고만 있을 브라스틴이 아니었다.
“후작은 지금 우리가 전쟁이라도 나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그만한 병력을 끌고 간다면 누가 좋아라 환영을 해주겠소. 반역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알지. 사절단으로 6 백작령의 처지를 뻔히 보고 온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제 정신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요. 당장 백작들 한 사람 한 사람 물어보시오. 영지를 떠날 수 있는 상황인지. 병력을 1만 명 씩이나 차출할 수 있는 상황인지 말이오.”
멀린의 눈길에 따라 차례로 의사를 밝힌 6 백작들은 표현 방식은 조금씩 달랐어도 올란드 후작의 안은 절대 무리라는 점에서 의견 일치였다.
대공령의 몇몇 귀족들과 대신들도 의견을 피력했는데, 대체로 큰 세력을 동원해서 가게 되면 브라스트가 다른 흑심이라도 있는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올란드의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멀린이 크게 역정이라도 낼 태세를 보일 때, 세틴이 나섰다.
“내가 가겠습니다. 인질이 아니라 외할아버지 황제를 보필할 손자로서 황도에 가겠습니다. 칙명이 누구의 뜻이든 처음부터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허울 좋은 승상이라는 자리는 애초에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덫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인질이 될지 말지는 내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어차피 피할 수 방법이 없다면 제가 가도록 해주십시오.”
멀린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건 안될 말이네. 13 공자의 뜻은 가상하나 이리나 승냥이같은 자들에게 자식을 내줄 내가 아니야.”
그동안 한 마디 말이 없던 톨린이 일어서서 말했다.
“너는 그렇게라도 후계자 자리를 차지해 보겠다는 것이냐 ? 아무리 어리다지만 철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천방지축일 줄이야.”
멀린이 얼굴이 붉어졌으나 최대한 자제하는 말투로 말했다.
“지금은 코데옹, 공식적인 자리이네. 대공자는 13 공자에게 반공대를 사용하도록.”
톨린은 멀린의 말투는 범상했으나 자신을 심하게 질책하는 뜻이 담겨있음을 눈치채고 잔뜩 주눅이 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세틴이 톨린에게 말했다.
“대공자의 질책을 달게 받겠습니다. 황도에서 적법한 후계자를 요구하는 만큼 누구든 황도로 가는 공자는 브라스트의 후계자가 되어야겠죠. 나는 어떤 공자라도 황도에 가시겠다는 분이 있으면 기꺼이 물러서겠습니다.”
멀린조차도 가기를 꺼려하는 황도였다. 누가 보기에도 인질의 처지가 될 것이 뻔한 길에 선뜻 나서려는 공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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