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거 소탕 작전
하포크의 마을은 품이 상당한 넓은 협곡에서 가파른 벼랑을 따라 300 미르 가량 내려간 곳에서 시작되었다. 수평으로 굵직굵직하게 층이 진 벼랑 곳곳에 굴이 펼쳐져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을 입구에는 하포크가 수십 명의 인간과 십여 명의 오크와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제국의 이름 높은 세틴 장군을 환영합니다. 보잘 것 없는 이곳까지 방문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포크는 양손을 내밀어 고개 숙이는 인사법과 매끄러운 제국어까지 구사하고 있었다.
세틴이 나서며 답례했다.
“제가 세틴입니다. 환영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국어를 그렇게 잘 하실 줄 몰라 통역까지 동반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한 셈이군요. 부디 좋은 만남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굴이 아니라 비교적 넓은 평지에 목재로 지은 커다란 건물에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연회장으로 들어서면서도 하쿰은 오크들과 뭐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그들은 동족을 만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하쿰이 하포크를 향해 말했다.
“그대가 오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는데 여기서는 오크와 인간이 구별없이 산다고 하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
하포크의 인상이 알게 모르게 찌뿌려졌다. 그는 단단해 보이기는 하나 보통 사람들보다 체구가 크지는 않았다. 다소 우락부락한 얼굴에 눈빛은 맑고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스스로 이름을 하프오크라 지었소. 지금은 줄여서 하포크라 불리고 있소. 나는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라 실수로 태어났소. 어렸을 적에는 구박도 당하고 놀림도 많이 당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당당한 족장으로 인정받고 있소.
이곳에서 인간과 오크가 서로 차별없이 도우며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사람과 오크가 서로 호감을 갖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오. 인간과 오크가 혼인에 이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인간과 오크가 서로 도우며 공존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타협한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힘을 합쳐 맞서기에도 벅찬 공동의 적이 있소. 바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오우거입니다.
지금도 일부 부족들은 정기적으로 오우거들에게 공물과 희생을 바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군을 이곳까지 모신 이유도 바로 그 문제를 상의하려 함입니다.”
하포크의 말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길지 않은 말에 많은 사실과 생각을 담는 요령이 보통이 아니었다. 세틴은 내심 하포크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족장께서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쉽게 말이 통하는 분인 듯하여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오우거들을 소탕해주면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을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소. 구체적인 얘기는 더 나누어 봐야겠지만, 나는 일단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하포크가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우거를 소탕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단지 도움을 바랄 뿐입니다.
고원의 오크와 인간들이 모두 힘을 모아도 버거울 정도로 오우거들은 강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오랜 세월 그들과 싸웠습니다. 결코 외부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세틴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화답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소. 오우거의 수는 얼마나 되고 어디에 살고 있나요 ?”
“고원의 중앙, 가장 큰 대협곡 전체를 오우거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수는 저도 모릅니다. 대략 수백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곳에는 오우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몬스터와 사나운 맹수들, 그리고 사슴과 산양, 소떼가 살고 있지요. 사실상 고원의 노른자위를 오우거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우거에게서 대협곡을 찾아올 수만 있다면 고원의 인간과 오크들은 외부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얻게 됩니다.”
세틴이 말했다.
“내가 부가적으로 내걸 조건은 딱 한 가지입니다. 오우거들을 처치해서 나오는 부산물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전군을 동원해서라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하포크가 오크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오크의 음성이 간혹 높아지기도 했으나, 하쿰이 몇 번 눈을 부라리자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마침내 하포크가 세틴의 조건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부산물에 대해서는 일체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오우거들을 전멸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완전히 세를 꺾어놓을 때까지 협력해주신다면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세틴은 전군을 만 여 명 씩 셋으로 나누어 오우거 토벌에 교체 투입하도록 했다. 오우거의 부산물 처리와 무구 개량을 위한 실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모우징과 드워프에게 천 명이 넘는 병력을 배정해주었고, 심각한 부상자가 많이 발생할 것에 대비해서 시에나가 이끄는 의무부대로 600 여 명으로 편성하였다.
오우거 협곡의 초입에 군영이 갖춰지고 처음으로 투입할 병력들이 모두 도착하여 훈련 강도를 높여가고 있을 때, 병사들의 실전 훈련 성과를 높이면서도 사상자를 줄일 전술을 고심하던 세틴이 시에나와 마주앉았다.
“선생께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도 않은 험한 곳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디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은 없으신지요 ?”
시에나가 곰방대에서 연기를 품어대며 말했다.
“자네는 피를 보기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왜 이리 끝도 없이 위험한 싸움을 벌이는가 ? 오우거가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수백이나 있다던데 죄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죽고 다칠지 걱정이네. 이 척박하고 외진 곳에서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면 될 일을......”
세틴이 정중하게 말했다.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제가 가는 곳마다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도 있습니다. 애초에 반도 남부의 영주들에게서 고원의 부족들을 토벌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고원 아래로 내려와 약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돌로만 고원은 인간 부족과 오크들이 자족하며 살아가기에도 녹녹하지 않은 땅인데, 오우거들에게 핍박을 받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아래쪽에 내려가 약탈이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오우거는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이니 그들을 제거해서 고원과 반도의 백성들이 편해질 수 있다면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이나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그렇다면 그런 거일 테지. 그냥 걱정 많은 노인네의 참견이라고 생각하게.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
세틴이 말했다.
“오우거는 지상의 최강자라 불리는 흉악한 몬스터입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토벌을 한다면 이기지 못할 리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세이나가 버럭 화를 냈다.
“그래서 내게 미리 양해라도 얻으려고 ?”
세틴의 눈빛은 간절했다.
“희생을 줄일 방법을 고심하던 끝에 마비효과가 있는 약물을 활용할 방법이 있을지 여쭙고자 모셨습니다. 화살이나 창 끝에 묻혀서 사용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세이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우거도 생물이니 약물이 효과가 없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피부를 통해 미량을 주입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약물은 없어. 더구나 일반 병사들이 쏜 화살이나 찌른 창이 오우거의 질긴 피부에 상처나 낼 수 있을까 ?”
세틴이 말했다.
“저도 오우거를 쓰러트릴 정도로 강력한 약물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장시간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행동을 약간 둔화시킬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의 희생을 크게 줄이면서 안정적인 사냥이 가능합니다.”
세이나가 다시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쓰는 거야 뭐 알아서 하겠지. 최대한 농축해서 효과를 내도록 해보겠네. 아마 사람이 팔이나 다리에 맞으면 단시간 내에 마비될 정도는 가능할 거야. 그런데 수많은 오우거에게 쓸 분량을 만들려면 재료가 많이 부족하네.”
세틴이 반색하며 말했다.
“난다와 완다에게 말해서 재료 조달에는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틴이 오우거를 사냥해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과 의논할 결과 오우거에게 상처라도 내려면 최소한 오러 유저 이상이어야 했다. 화살에 오러를 실으려면 훨씬 높은 경지가 요구되므로 일반 궁병들의 활약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푸시니아에게 물으니 다행히 엘프들은 전원 오우거에서 활로 상처를 입힐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 여 명의 병사 중 선발된 천 여 명이 키의 두 배 이상 되는 창으로 무장하여 오우거를 집중 공격하는 특별 훈련에 들어갔고, 아쉽지만 궁병대는 수십의 엘프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우거와의 직접 전투는 엑스퍼트 중급 이상의 장수들이 주축이 되어야 했다. 세틴과 고진, 상카, 오클린, 기병대장 뱅골이 소드마스터로서 교대로 전투의 선봉에 서기로 했다.
이렇게 오우거 소탕을 위한 기본 전술이 확정되었다. 장창병들이 전선을 형성하여 앞장서고 원거리에서 엘프들이 오우거의 다리에 화살을 퍼붓다, 근접하면 장창병들이 30-40 명 단위로 오우거들을 분리 포위한 뒤, 견제 공격만 하는 상황에서 장수들이 진입하여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한다는 그림이 그려졌다.
오우거는 원래 단독생활을 하는 몬스터로 알려져 있었다. 무리를 이룬다 해도 가족 단위 정도인 경우가 많았다. 돌로만 고원의 오우거도 대부분은 마찬가지였으나, 협곡의 중앙에 있는 호수 주변에는 제법 큰 오우거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곳에 오우거들의 제왕이 살고 있었다.
세틴군의 군영이 꾸려지고 사냥을 위한 전술 훈련이 시작되자, 하포크와 오크들은 자신들이 사냥을 주도하고 세틴에게 지원만 해달라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들도 나름대로 오우거와 싸우는 방식을 발전시켜왔고 실제로 전투 경험이 많기도 했으나, 세틴군의 위용을 직접 보고 나니 차원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틴에게 마련된 전술 계획을 듣고 나서 하포크는 앞장 서겠다는 말 대신 자신들이 도울 일은 없는지 물어왔다.
“하포크 족장, 체계적인 전투력이나 무장에서 우리 군이 월등하다고는 해도 오우거 토벌에서 그대와 오크들의 활약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곳의 지형과 날씨에 익숙하지 않고 오우거의 분포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소탕할 오우거를 포착하고 전장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실제 사냥보다 중요합니다. 쭉 밀고 들어가면서 보이는 족족 잡아 없앤다는 식으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 매일매일 오우거들의 분포와 움직임을 점검하고, 어디서 몇 마리를 잡을지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 정찰병들도 나름대로 역할을 하겠지만, 그대들에게 더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군도 실제 전투에는 병력의 1 할 정도만 투입할 생각입니다. 나머지는 정찰을 하고 전장 주변에 함정과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의 작업에 투입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우리는 협력 작업을 해야 할 것이며 그대들의 의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겁니다.”
하포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군님의 세심한 통찰과 배려에 다시 한 번 감탄하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협력하겠습니다.”
세틴이 다시 한 번 다짐을 두었다.
“무엇보다 우리 편의 희생을 줄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의욕을 앞세워 무리하는 경우가 없어야겠습니다. 부족에도 뛰어난 전사들이 많겠지만 최고의 정예들만 투입하셔도 충분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오크들은 전투 방식이 아예 달라서 세틴군과의 협동 작전이 아예 불가능했다. 하쿰과 같이 온 오크들과 이곳의 원주민 오크 중에서 선발된 정예 전사 70여 명을 세틴은 별개의 부대로 편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교적 다수의 오우거와 전투를 벌이게 될 경우, 단독으로 한 마리나 몇 마리 사냥에 나서도록 배치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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