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 옹립
모그란데는 세틴이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가 시오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시오미에 대한 세틴의 마음도 있겠지만, 시오미가 중간에서 역할을 그런대로 잘 해주고 있기 때문에 세틴이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자신이 그리는 구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나름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 비밀리에 추진하는 일들에 대해 시오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도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세틴을 자주 접촉하도록 권장하는 편이었다.
시오미를 통해서도 세틴의 근황이나 동향을 캐낼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황태자 옹립을 위한 어전회의를 하루 앞두고 모그란데는 다시 시오미를 세틴에게 보냈다.
모그란데는 8부 대신 중 3 명을 온전한 자신의 사람으로 세우고 싶었고, 그에 대한 세틴의 지지를 원했다.
모그란데가 이미 엄정 중립을 선언한 세틴에게 노골적인 거래를 요구할 수는 없었기에 제국군의 재건에 보태라며 3 만 골드라는 거금을 보내왔다.
적극적인 지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반대는 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이거 받지 않을 수가 없겠는 걸 ?
성의를 너무 무시해서 좋을 건 없겠지.
아무튼 고맙게 잘 쓰겠다고 전해 줘.
난 어차피 조정에 누가 자리를 차지하든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그런데 3 황자가 3 명을 용납할지는 의문이네.
아마 쉽지 않을 듯한데.....
더구나 이번 기회에 가리온 후작을 불러들여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의견을 모그란데가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을 거야.”
시오미가 말했다.
“양부도 가리온이 황태자와 손을 잡지나 않을까 제일 우려하는 것 같아.
황태자 옹립을 두고 남부 귀족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니 더욱 그렇지.
그들은 아마 양부가 세틴을 제국군 사령관으로 포섭해서 더욱 견고하게 황도를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3 황자를 황태자로 세움으로써 양부의 지배가 공고해질 걸로 믿는다는 거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4 황자의 영향이 크겠지.
어쩌면 황태자 옹립을 계기로 남부가 더 노골적으로 조정에 대한 불신과 대립의 자세를 강화할 수도 있다고 해.”
세틴은 시오미의 말대로 가리온이 정세에 어두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렁뚱땅 꼬리를 말고 다시 모그란데의 밑으로 들어오지 않을 명분으로 4 황자를 활용할 여지는 있다고 보았다.
“모그란데의 생각이겠지.
언젠가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성격 때문에 모그란데가 크게 낭패를 보는 일이 있을 거야.
가리온의 향방은 내게도 중요하기는 하지.
좀 더 지켜 보자고.
어차피 어떻게 되어도 모그란데가 더 이상 조정에서 독주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시오미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내가 가져간 유물들을 연구하다가 재미난 걸 하나 발견했어.
그런데 아직은 그게 뭔지 말해줄 수는 없네 ?
아마 세틴도 엄청 좋아 할 거야.”
세틴도 같이 웃었다.
“하, 참.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잖아.”
시오미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졌다.
“세틴, 전부터 꼭 묻고 싶은 게 있어. 솔직하게 대답해 줘.”
시오미가 약간 뜸을 들였다.
“난 세틴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때는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지.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남자들이 좋아할 예쁜 여자들은 많아.
난다와 완다만 해도 나보다 사랑스러운 여인들이고.
나는 천애고아나 다름 없으니 신분은 따질 것도 없지.
나는 지금도 세틴이 날 좋아해 주는 게 꿈만 같아.
언제든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그런 꿈 말이야.
내가 세틴의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는지 자신도 없어.
세틴은 이게 변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내가 믿게 해줄 수 있어 ?”
세틴이 주저없이 말했다.
“해주고 말고.
난 꾸밈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고, 현재의 처지에 상관없이 늘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한 진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을 믿어.
이 세 가지 면에서 시오미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중 으뜸이야.
우리는 적당한 시점에 서로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났지.
어떤 일이 있어도 널 다시 잃고 싶지 않아.”
시오미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그득했다.
말없이 다가가 시오미의 머리를 껴안은 세틴의 가슴이 축축해지도록 시오미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한참 뒤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든 시오미가 억지로 웃음지으며 말했다.
“조만간 세틴이 정말 좋아할 선물을 준비할게.
전에 마법의 사용법에 대해 세틴이 말한 게 내게 얼마나 많은 영감을 주었는지 몰라.
마법은 사람들이 더 편안하고 더 유익하게 사는 걸 도와주는 데 써야지.
조명, 정수, 각종 동력장치 등등. 하루에도 몇 개씩 발상이 떠오른다니까 ?
요즘은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좋아할 도구나 장치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에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세틴이 엄지척을 해보였다.
“바로 그거야.
하루라도 빨리 시오미가 그런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저나 무슨 선물이기에 그렇게 자신하는지 정말 궁금한 걸 ?”
시오미의 표정에 장난기가 흘렀다.
“그건 완성될 때까지 비밀.”
황태자 즉위식을 앞두고 열린 어전회의는 새로운 조정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결정하는 회의였다.
모그란데는 자신이 섭정의 지위를 내놓고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옴비두스를 대신해서 승상의 직위를 계승하겠다는 말로 새로운 조정에 대한 주도권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승상을 하느냐’는 정도로 반발을 할 상황이 아님은 분명했다.
스스로 섭정을 포기하겠다는 사람을 더 심하게 핍박할 만한 세력이 딱히 없기도 했다.
세틴이 무리를 해서 세력을 규합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세틴은 파탄을 앞당기기보다는 일단 안정을 원했다.
모그란데는 조정 구성에서 주도권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황궁 근위대를 제국군에 넘기기로 결단을 했다는 점도 또한 회의의 서두에서 강조했다.
이는 예측 범위를 벗어난 내용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그란데가 세틴을 끌어들이기 위해 모종의 협약을 맺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세틴은 황궁 근위대의 접수를 냉큼 받아먹으며 새로운 근위대장으로 오클린 바트를 임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자신은 조정의 구성에 대해 엄정 중립은 물론 누구도 추천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의 의견도 내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렇게 회의 초반에 기선을 완전히 제압한 모그란데는 재무 대신, 병부 대신, 내무 대신을 자신있게 추천했다. 8 부 중에서 알짜배기라고 할 수 있는 3 부였다.
명분상 누구도 최종 결정권을 갖지 못한 회의였다.
모그란데는 섭정을 내놓았고 3 황자는 아직 황태자로 등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추천을 모두 받고 나서 논의를 계속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3 황자가 4 명을 추천했고, 4, 5 황자가 각각 3 명, 6 황자가 2 명을 추천했다. 기타 유력 귀족들이 모두 8 명을 추천했다.
추천이 끝나자 누구는 이래서 안되고, 누구는 자격이 없고, 누구는 경험이 없다는 등 깎아내리는 발언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특히 모그란데가 추천한 3 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추천한 사람이 많았고, 인신공격까지 포함해서 치열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아침에 시작해서 점심 식사도 거른 채 진행된 회의가 어둑해질 때까지 이어졌지만 어떤 결론도 낼 수 없을 지경으로 고성만 오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조정의 구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장 곤란한 사람은 바로 3 황자였다.
합의 없이는 황태자로 등극하는 것이 한없이 미뤄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오디어스가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가다가는 몇날 며칠이 지나도 끝이 없겠소.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소.
지금 우리 중에 대신을 추천하지 않은 분이 셋 있소.
두 분 형님과 세틴 사령관이오.
사령관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엄중 중립을 선언했으니, 형님들께 결정권을 드리면 어떨까 하오.
그렇다고 두 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도록 하면 또 불평과 불만의 소지가 있을 것이고 두 분께 지나친 부담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오.
그러니 오늘 나온 얘기들을 토대로 두 분이 8 부 대신 임명안을 짜시고, 그에 대한 찬반으로 결정을 하면 어떻겠소.”
이미 다들 지칠대로 지치기도 했고, 이렇게 가다가는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오디어스의 제안을 반기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일, 이 황자라면 누구보다 치우침 없이 공정한 결정을 해줄 적임자라는 점에서도 공감대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그란데까지 오디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이황자 골트릿이 일황자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뭔가 잔뜩 적혀있는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우선 이에 대해서 사전에 3 황자를 비롯한 누구와도 논의한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하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안을 내놓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오.
일황자와 나는 여러분이 논의를 하는 중에 의견을 종합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임명안을 짜고 있었소.”
그렇게 해서 골트릿이 발표한 임명안에는 모그란데, 3, 4, 5, 6 황자 각 한 명, 귀족들이 추천한 3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그란데에게 병부, 3 황자에게 내무, 4 황자에게 외무, 5 황자에게 호부, 6 황자에게 재무 대신이 할당되었고, 나머지는 귀족들이 추천한 대신이었다.
모그란데와 황자들이 추천한 대신들 중에서 탈락한 자들은 일일이 탈락 사유를 분명하게 밝혔으며, 임명안에 오른 대신들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각각 길게 설명했다.
탈락 사유들은 재론하기에는 본인들도 부끄럽기만 할 내용이라 반발하기 어려웠고, 타당성을 설명한 부분도 꼬투리를 잡기 힘든 내용들이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절묘하게 여러 세력들의 균형을 고려하면서도 딱히 흠을 잡기 어려운 임명안에 대해 대부분이 재빠르게 찬성을 표했다.
사실 과반수 이상이 모그란데나 3 황자가 독주를 하는 상황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이 컸다.
계속 말싸움을 벌여봐야 자신의 사람들을 더 밀어넣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기도 힘들었다.
모그란데와 3 황자가 거의 동시에 찬성을 표하면서 조정 구성에 대한 논의는 힘겹게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이후 황태자의 즉위식에 대한 논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3 일 후에 즉위식과 함께 승상 및 8 부 대신에 대한 임명식을 거행하도록 결정되었다.
조정의 구성에 대한 어전회의를 통해서 누구도 독주를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모두에게 확인된 셈이었고, 당분간 팽팽한 견제와 균형 속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전개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누가 장악할지는 자연스럽게 우살리드 토벌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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