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카 용병단
상카 용병단을 이끄는 상카라는 사내는 곰같은 체구에 잿빛 머리칼, 굵직한 얼굴선이 인상적이었다. 머나먼 북방에서 배를 타고 이동해 와서 폴린 왕국을 세운 전사들의 특징이었다. 상카와 바네사는 몇 번이나 복잡한 시선을 주고 받는 눈치였으나, 그들이 따로 상면할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상카는 후작에게 새벽같이 정찰한 ‘12 폭포 가도’의 상황을 설명하고, 일행에게 반복하여 주의 사항들을 상기시켰다. 신분을 떠나 어딘지 믿음이 가는 사내였다.
하늘 요새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우렁찬 폭포소리와 함께 시작된 벼랑길은 말들의 눈을 가리고 한참을 어르고 달래서야 가까스로 지날 수 있는 곳이 연달아 나타났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찔한 협로를 지날 땐 오금이 저려왔다. 위를 보면 언제라도 바위 덩이가 떨어져 머리를 때릴 것 같고, 아래는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길의 연속이었다.
용병단의 능숙한 인도 덕분에 큰 사고 없이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가운데서 두어 뼘 정도 기운 한낮이었으나, 지칠대로 지친 일행은 그곳에서 야영을 한다는 지령을 무척이나 반겼다.
야영지는 물길이 넓어지면서 넓게 3 단으로 폭포가 형성된 곳이었다. 오는 내내 고막을 괴롭히던 폭포 소리가 여기서는 비교적 잔잔하게 가라앉았고, 폭포 아래 제법 넓게 자리 잡은 웅덩이 부근이 바로 야영 장소였다.
늦은 점심 겸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천막을 설치하는 등 분주한 하인과 병사들을 뒤로 하고 사절단의 수뇌부가 웅덩이 부근의 널찍한 너럭바위에서 땀을 식히고 있을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길 건너편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안녕하시오. 또 만나게 되었소. 티리아가 13 공자와 할 얘기가 있어 왔으니 나와 보시오.”
셔틀리와 다른 흑룡기사 하나가 좌우를 경계하는 가운데 세틴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폭이 그렇게 넓지는 않으나 수심이 깊어 물을 건너기는 서로 쉽지 않아 보이는 지점이었다.
“물길이 가로 막아 서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에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는 않지만, 할 얘기가 있다니 들어 보기는 하겠소. 또 무슨 일이오 ?”
다분히 비꼬는 뜻이 담긴 세틴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티리아가 소리쳤다.
“그대들이 겁먹은 생쥐마냥 12 폭포 가도를 기어 내려오는 모습이 참 가관이더군.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는 자들에게도 자연은 평등한 법이지. 내 엊그제는 ‘경고를 주는 선’에서 순순히 물러났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속단하지는 마시오.”
꼬리를 말고 달아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티리아의 태도에 세틴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각난 자존심을 살려보겠다고 어려운 걸음을 한 것은 아닐 테고, 뭘 어쩌자는 겐가 ?”
“첫째, 새날의 빛이 더 이상 구호물자를 탈취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소. 둘째, 우리가 그대들의 구호활동을 낱낱이 감시할 거요. 만약 허튼 수작이나 부리다가 우리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이오. 셋째, 그대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새날의 빛이 제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궐기를 시작했소. 내가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우리를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칠 날이 있을 것이오. 내가 그대를 나쁘지 않게 봐서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것이니, 말로 할 때 귀담아 들으라는 거요.”
“그것 참 고마운 일이군. 나를 괜찮게 봐주었다는 것도, 탈취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것도 말이야. 하지만 새날의 빛이라는 단체가 모두 그대 같다면 별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
세틴은 의도적으로 티리아를 도발했다. 새날의 빛에 대해 한 마디라도 더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티리아가 발끈했다.
“흥. 그대가 우리 스승님을 만나 단 세 마디만 얘기를 나눠 보면 엎드려 승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걸 ? 제국이 마법사들을 모두 흑마법사로 매도하고 억압하지만, 유일한 8 서클 대마법사이신 스승님 마음을 먹는 순간 제국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소. 내가 조무래기 제자로 부족한 점이 많은 건 나도 잘 아오. 하지만 열이 넘는 사형들께서는 웬만한 작은 영지의 군사쯤은 혼자서도 넉넉히 상대하고 남을 분들이오. 이미 몇 군데 영주성을 점령해서 거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을 거라는데 내 목을 걸겠소.”
실제로 새날의 빛은 제국 동쪽 변방의 백작령 하나를 장악하고 세를 불리고 있었다. 브라스트 공국과는 정반대 방향이어서 그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는 수 개월이 걸릴 터였다. 티리아의 말의 진위를 알 길 없는 세틴이 다시 도발을 더했다.
“당신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티리아가 그 잘난 스승도 사형도 아니지 않은가 ? 난 아무리 봐도 그대가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놀 수 있을 거라고는 못 믿겠는데 ?”
티리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는 선의로 그대를 대하고자 하건만, 그 마음을 몰라주는 그대가 야속하기만 하오. 6 백작령 어디에도 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소. 우리가 그린호를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어떻게 여기에 불쑥 나타날 수 있는지 그대들은 알 방법이 없겠지. 당신들 마음대로 해서 좋을 일이 없다는 증거로 내 하나 알려 주겠소. 오스틴 백작이 욕심이 없고 진심으로 백성들을 위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랫 사람들과 백성들이 모두 착하지는 않은 법. 습격을 해서 빼앗지는 못해도 훔치지 못할 건 없죠.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믿겠소. 그럼 이만 물러가겠소. 나를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새날의 빛을 가볍게 보지는 마시오. 마지막 경고요.”
제 할 말을 다 했는지 티리아의 무리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단, 제법 폭이 넓고 수심이 깊다고는 하지만, 사절단에는 그 정도는 한 차례 도약으로 건너뛰고도 남을 능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티리아가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다소 경망스럽기는 해도 티리아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세틴은 제국의 붕괴를 알리는 서막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티리아라는 자칭 마법사가 언행이 기상천외하기는 하나 마냥 정신병자 취급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소. 적지 않은 수하들이 따르는 것도 그렇고, 행적이 예사롭지 않아요. 새날의 빛의 실체가 마법사들이 모인 것이라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닐 것이오. 당장 사람을 보내 대공께 상세하게 보고를 드리고 답신을 받아 오도록 해야겠소.”
율리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들이 제국의 탄압을 받은 것이 수십 년이라고 들었소. 전대 황제를 정신계 마법으로 조종하려다 들통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는 하나, 마법사들 전체를 사악한 존재로 매도하고 탄압할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소. 황자들과 외척들의 발호로 제국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마법사들의 궐기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세틴의 말에 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공국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마법사를 기용하지 못한 지 오래요. 우리가 마법사를 적극적으로 색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제국 전체로는 흑마법사로 낙인찍혀 사형 당한 자들이 수백에 이르지. 선천적으로 마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만이 마법사가 될 수 있으니 마법사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다고 하오. 그런 마법사들 전체를 적으로 돌려 벼린 제국의 처사가 무조건 옳다고 볼 수도 없고 결코 현명한 결정은 아니었소.”
“대공께서 제국의 방침에 부화뇌동 하지 않고 마법사들을 탄압하지 않은 것은 백번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티리아가 막무가내로 덤벼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그가 마지막에 말한 ‘착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라는 말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립니다. 너그러우신 오스틴 백작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몇몇 가신이 있는 건 사실이거든요.”
슈타인 남작의 말에 발탄 남작이 발끈했다.
“그깟 도적떼의 말을 믿고 백작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의심한다는 말이오 ? 나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이간질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훔치지 못할 건 없다고 ? 어디 한 번 훔쳐 보라고 하죠. 우리 흑룡기사단과 정예 병사들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발탄 남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앞으로 더더욱 인명과 물자 보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오. 그건 그렇고 13 공자는 티리아가 향후 어떻게 나올 것 같소 ?”
율리의 물음에 세틴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나는 일단 티리아의 말을 믿어보자는 생각입니다. 그가 막무가내로 물자를 탈취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면 한 시름 더는 셈입니다. 다만,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오. 우리가 전달한 물자를 각 백작들이 백성들에게 배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죠. 티리아 같은 무리가 불만 가득한 백성들을 부추겨 일을 벌이면 대처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우리가 배분 과정까지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지 않겠소 ?”
“참으로 해결하기 힘든 난제요. 한 발짝 앞서 사태를 볼 줄 아는 13 공자의 혜안이 돋보이나, 사실 티리아의 무리가 없었어도 대공과 내가 가장 걱정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오. 사실 백작들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배분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순순히 그걸 받아들일 백작이 누가 있겠소. 백성을 생각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백작은 도리어 우리가 일을 맡겨도 좋을 사람이고, 기를 쓰고 반대할 백작들이야말로 우리가 믿기 힘든 사람들이지. 단적으로 공국의 젓줄인 브라스틴이 그나마 식량 사정이 나아야 정상인데, 아사자가 가장 많은 이유야 말할 것도 없지. 제국의 긴 역사에 등장하는 대규모 민란이 대부분 재해지역의 구호 물자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소.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눈 뒤집힌 성난 백성들은 무서울 게 없지.”
일찌감치 야영을 시작한 만큼 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뽀족한 대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백작령마다 사정이 다를 것은 물론, 그나마 구체적인 정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럴 듯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지나온 길보다는 앞으로 통과해야 할 12 폭포 가도가 사정이 낫다고는 하지만, 오스틴 백작령에서 겪게 될 힘든 일정까지 감안하여 사절단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두고 보면 언제까지 안타까운 시선이나 주고 받고 있을지 모를 상카와 바네사를 위해 세틴이 자리를 마련했다. 할 말이 있다는 핑계로 상카를 자신의 천막으로 불러들였다. 호위와 시녀들을 내보내고 셋이 마주 앉았다.
“내 그대들이 무슨 인연인지 짐작할 길이 없으나, 둘 모두 서로에게 할 말이 많은 듯 하여 자리를 마련해 보았소. 원한다면 나도 자리를 비켜주겠소.”
“아, 아닙니다. 그냥 계세요.”
바네사가 서둘러 세틴을 붙잡았다.
“스승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
“나야 뭐...... 바네사는 좋은 주인을 모시는 것 같아 좋아 보이네.”
하루 사이지만 베네사가 세틴의 사람들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음을 간파한 상카의 말이었다.
그렇게 수인사를 건넨 두 사람이 별 말이 없자 세틴이 말했다.
“바네사,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13 공자의 시녀장이 그렇게 우물쭈물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 걸 ?”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렸던 분이 13 년 만에 눈앞에 불쑥 나타나니 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좋다 싫다 한 마디만 하고 떠났으면 제가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요.”
바네사는 세틴을 빌어서 상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는 상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13 공자, 저는 바네사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재능 많고 아리따운 처자가 용병이 되겠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도 없었고, 제가 용병 일을 그만 둘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열 살 넘게 어린 바네사를 망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은요 ? 스승님 마음은요 ? 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지금도, 아니 죽을 때까지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에요.”
상카는 직진으로 파고 드는 바네사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바네사, 널 생각하는 내 마음은 언제고 진심이야. 지금의 나라고 해도 그때의 결정이 변하지는 않았을 거야.”
세틴이 폭탄선언을 날렸다.
“두 분 결혼하시오. 시녀장이 대공가에 매인 몸이고, 용병단을 이끌고 있는 상카도 쉽지는 않겠지만, 이것 저것 따지기만 하면 좋은 시절 다 가고 말아요. 내 보기에 두 사람은 일년에 며칠만 볼 수 있더라도 결혼하는 게 정답이오. 그밖에 다른 어려움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 주리다.”
두 사람 모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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