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전
세틴이 제위에 뜻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문제였다.
호아니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세틴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동안은 명확하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왔던 세틴이었다.
세틴이 호아니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황제가 되고 싶은 야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도 결과적으로 내가 황제가 될 가능성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군사께서 오늘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적어도 믿을 만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목표를 분명히 해달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을 말하자면 여전히 같습니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은 욕심이 없습니다.
어쩌다 불가피하게 제위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호아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세틴을 바라보았다.
“물론 저도 사령관님께서 개인적인 야망 때문에 모든 일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사령관님이 제위에 오르겠다는 뜻을 굳힌다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확고한 목표가 생깁니다.
사령관님을 추종함으로써 뭔가 한몫 잡겠다고 하는 자들도 많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황태자의 얘기를 꺼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확고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필요합니다.
사령관님께서 뜻을 굳히신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따를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갈리온 후작은 지금의 제국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인정하지 않는 제국이란 결국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들 중에 적당한 황제감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생각에는 갈리온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갈리온에게 막연하게 제국을 위해 충성하라고 해봐야 그의 태도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갈리온에게 사령관님께서 제위에 오를 것이니 협력하라 하면 어떨까요 ?
제가 자신할 수는 없지만 십중팔구 그는 사령관님께 굴복할 겁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황제가 되겠다 선언하는 것은 무리가 있더라도, 우리 내부에서는 방침을 확고하게 정했으면 하는 게 제 바램입니다.”
호아니의 말을 들으면서 세틴은 이것은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호아니가 확고한 태도를 요구했다는 사실 자체도 매우 중요했다.
혼란스러운 정국의 가닥은 결국 제위를 둘러싼 문제가 어떻게 매듭지어지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었다.
세틴이 말했다.
“군사의 뜻은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황제가 되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회오리가 몰려옵니다.
지금은 적어도 황자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당장 황태자가 어떻게 나올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군사께만 밝히는 사실인데 일, 이황자께서는 꽤 오래 전부터 나를 차기 황제로 밀고 싶어 하셨어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적어도 모그란데와 우살리드, 그리고 개입해오는 동부왕국과의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저의 제위에 대한 얘기는 재론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리고 어떻게든 그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화두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군사께서도 각별히 유념해주세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그게 전부입니다.”
호아니는 세틴이 정치적인 감각이 없거나 둔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세틴에게 말한 내용에 대해서도 세틴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사령관님의 방침에 따르겠습니다.”
다음날 호아니는 보고를 위해 황도로 급히 떠났고, 세틴은 전날 흐지부지 끝났던 지휘관 회의를 다시 소집했다.
세틴이 다소 침중한 목소리로 서두를 열었다.
“모두들 모그란데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전장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 있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그란데나 우살리드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사이는 아닌지라 저들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상하게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살리드가 결코 우리와 손을 잡고 모그란데 척결에 앞장 설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서로 손을 맞잡고 우리에게 적대할 거라 단정할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저들 둘의 연합군에 증원된 동부왕국군까지 모두를 우리가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런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마음의 준비와 대비를 해나가야 합니다.
이에 대한 의견이나 다른 정보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정찰을 총괄 지휘하고 있는 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취합된 전장과 양 진영 주변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근시일 내에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모그란데 군영이나 페링 진지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고는 있으나, 뭔가 전열을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는 느낌이지 당장 전투에 나서려는 기미가 없습니다.
우선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제가 저스틴 대장에게 들은 얘기를 모두가 알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살리드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원인을 말입니다.”
세틴이 저스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저스틴이 세틴에게 전해 주었던 샬롬을 중심으로 전해진 얘기들을 모두에게 설명해주었다.
저스틴의 말을 들은 장수들 모두가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베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우살리드 이 자가 속빈 강정 아닙니까.
사내 자식이 어떻게 여자에게 휘둘려 자기 생각을 펼치지 못한단 말이오.
하물며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나라의 장래가 걸린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말입니다.
우살리드가 그런 자인 줄을 진작에 알았으면 우리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달려가 호통을 쳐서 불러내어 묵사발을 만들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때, 난다의 눈총을 의식한 베른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나갔다고 느꼈는지 슬그머니 자리에 앉고 말았다.
현재 제국군의 주력이 된 궁병대를 총괄 지휘하고 있는 샘프라가 베른을 나무라듯 말했다.
“적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반드시 진다고 했네.
전해진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 내부의 복잡한 사정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는 일이네.
그 말만 가지고 우살리드에 대해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
저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우살리드가 우리와 적대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큰 일입니다.
당장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연합을 하게 되면 병력의 열세 때문이라도 우리가 쉽게 상대하지 못합니다.
우리 군이 다 해봐야 5만 남짓입니다.
아무리 정예병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병력의 증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봅니다.”
이때, 자신이 나서도 되는 자리인지 몰라 조금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리는 자가 있었으니, 일찍이 동부 가도 정비에 앞장 서서 이제는 하라무스 진지의 방호대장을 맡고 있는 잘낫이었다.
손짓으로 세틴의 격려를 받은 잘낫이 말했다.
“사실 저는 오늘 저스틴 대장님의 설명을 듣기 전에 이미 우살리드 진영 내에서 벌어진 샬롬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제국군에 몸담아왔고, 역참장을 하면서 사귄 인맥이 꽤 되는데 최근에 우살리드 진영 내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알 정도면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이 퍼져있는 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로 인해 우살리드군 내부에서도 상당한 동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우살리드가 부인의 말 때문에 제국군과 적대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그란데와 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더 이상 제국에 적대하는 반란세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모그란데의 공격도 나름 잘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싸움에서만 크게지지 않는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들어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유 때문에, 그런 샬롬 부인의 말 때문에 다시 제국의 반란군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절망하기까지 하는 자들도 많다고 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주제넘게 무슨 의견을 내려고 한 게 아니라 참고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세틴이 잘낫을 크게 칭찬했다.
“아니오, 잘낫 경이 아주 중요한 지점에 중요한 정보를 말해 주었소.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생생한 정보라 할 수 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상황이 명확하지도 않은 가운데 모그란데나 우살리드를 향해 공세를 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실상 저들이 연합을 한다 하더라도 굳게 결합된 하나의 군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도 있고, 결국 융합하지 못하고 계속 따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께 제안하고 싶은 것이 바로 심리전입니다.
아까 베른 경이 말한 것처럼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우살리드는 남자도 아니다,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등의 반응이 누구라도 처음 드는 생각일 것입니다.
잘낫 경이 말한 우살리드 진영 내부에서의 동요까지 감안해서 이런 점을 파고 들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모그란데군에 대해 이미 북부로 돌아간 이탈병들의 얘기를 통해서 심리전을 펼쳐왔습니다.
반란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소문을 퍼트렸지요.
지금부터는 우살리드와 모그란데 양 군에 대해 그런 심리전을 더 다양하고 집요한 방법으로 전개해야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진 장군과 저스틴 대장, 토마스 경 세 분이 중심이 되어서 당분간 총력으로 심리전을 펼칠 계획을 세워 주세요.
또한 모그란데에 대해서는 단지 제국의 반역자가 아니라 동부왕국군의 앞잡이라는 명목을 추가해야 합니다.
모그란데는 사실상 동부왕국군을 이용하고 이끈다기보다는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샘프라 장군께서 말씀하신 증원 문제는 근 시일 내에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가 미리 손을 써두었습니다.
아마 상카 경이 상당한 증원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라무스 진지의 보강문제와 모그란데와 우살리드 연합군에 맞서기 위한 전술적인 문제들에 대한 토론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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