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되는 전선
세프리언이 약간은 화가 난 기색으로 다그쳤다.
“아니, 그럴 거면 입 아프게 말은 해서 무슨 소용입니까 ?
싸울 때 싸우더라도 신사적으로 미리 방식을 정하는 것이 법도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구요.
아무리 서로 적대하는 사이라지만 이렇게 상대방의 사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분이 제국군의 사령관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세틴이 재미있는 사람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로론, 뭔가 착각을 단단히 하고 있는 듯한데, 그대가 승상, 승상 하고 부르는 자는 제국의 반역자로 척살령이 내려진 자이고, 그대 역시 반란군에 가담한 혐의로 작위가 박탈된지 오래요.
지금 한가롭게 귀족적인 전쟁놀이나 논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란 말이지.
내가 반란군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대들을 칠지를 내가 왜 알려주어야 하오 ?
우살리드가 조용히 물러가버리니 모그란데 혼자서 내게 두들겨 맞을까 겁이라도 난 모양이구려.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걸 보니......”
말로론도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었다.
세틴이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비꼬는 말을 늘어놓는데도 능글맞게 대꾸를 했다.
“하하하, 아까부터 은근슬쩍 우살리드 얘기를 자꾸 들먹거리는 것이 우리와 우살리드가 어떤 협정을 맺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하신 모양이오.
내 여기까지 온 김에 하나 알려드리리다.
우살리드는 우리와 확고한 동맹을 약속했소.
잠시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돌아갔을 뿐이오.
우살리드가 다시 전선에 합류하는 날이 바로 제국군이 패배의 쓴 맛을 보는 날이 될 것이오, 하하하.”
세틴이 그런 말로론을 지그시 노려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조만간 동부왕국군도 증원이 되고, 우살리드도 다시 돌아와 전선에 합류할 것이라는 말이구려.
좋소.
그대가 어떻게 싸울지를 정하자고 왔으니, 내가 확실한 답을 주겠소.
그대의 말대로 동부왕국의 증원군이 오고 우살리드가 다시 합류하기 전에 반란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필요가 있다는 조언으로 알아 듣지요.
언제 어떻게 공격할지는 알려줄 수 없지만 조만간 반란군 진영을 내 친히 한 번 돌아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알고 돌아가시오.”
세틴은 말로론과 말장난같은 대화를 길게 나눌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이미 모그란데의 대체적인 사정과 말로론을 보내서 탐색전을 펼치는 이유를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모그란데는 당장 제국군과 정면 승부를 보려는 생각이 없었다.
다만, 세틴의 주의를 모그란데 자신에게로 돌리고 서둘러 공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고 싶을 뿐이었다.
말로론의 말을 통해서 모그란데의 의도를 간파한 세틴은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는 판단을 내렸다.
말로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세틴을 적당하게 도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인선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세틴은 ‘우리가 공격에 나서면 반란군은 도망치기에 바쁠 걸 ? 내기를 해도 좋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그냥 참았다.
말로론 같은 자를 더 이상 말로 농락해봐야 득될 것이 없었다.
말로론이 물러가고 소집한 지휘관 회의에서 세틴은 조만간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것임을 선언했다.
물론 이는 당장 전면전을 벌여 모그란데군을 와해시키려는 작전은 아니었다.
세틴은 모그란데가 당장 제국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제국군에 혼선을 주고 시간을 끌고자 하는 것이 모그란데의 의도임을 말로론과의 만남에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차제에 우살리드가 물러간 페링 기지 주변까지 세력권을 확대하고, 모그란데군을 가능하면 자군드라 강 건너까지 후퇴시킬 생각이었다.
일단 세틴이 공세에 나서면 모그란데는 계속 전투를 회피하면서 물러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보면 자군드라 강변까지 몰리게 될 터인데, 과연 모그란데가 자군드라 강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사수하려 할지 강을 건너 일단 후퇴하려 할지가 궁금했다.
모그란데가 기대를 걸고 있을 요인이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우살리드가 성공적으로 하랑가를 넘어 북부를 공략하고 황도로 진격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동부왕국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증원부대가 도착하는 것이었다.
모그란데가 두 가지 요건이 하나도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틴과 결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2 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여 모그란데의 군영에 대한 공격할 준비가 착착 되어가고 있던 어느날, 마침내 하랑가에서 우살리드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우살리드가 제법 광범위하게 정찰대를 파견하였고, 선발대로 보이는 3 천여 병력이 이미 하랑가 고원의 초입에 진입했다는 것이었다.
고진은 우살리드가 자신들의 움직임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일체의 충돌이나 접근이 발생하지 않는 가운데 정찰이 이루어지도록 지침을 하달한 상황이었다.
이로써 세틴이 짐작한 우살리드의 전략이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틴은 시오미와 통신을 통해 이 사실을 호아니와 저스틴에게 즉각 알리도록 했다.
저스틴의 부대는 이미 북부로 진입한 상황이었다.
하랑가 고원에서의 전투는 이제 더 이상 세틴이 직접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저스틴의 부대와 호아니, 베그던 등이 어떻게든 협력해서 잘 막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랑가 고원에서의 전투에 대한 기대와 불안, 걱정이 무척이나 컸지만, 세틴은 모그란데에 대한 공격을 미루지 않았다.
2 만여 병력을 동원한 첫 번째 공격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모그란데의 군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군영이 깨끗하게 빈 상태였다.
십만 여에 달하는 군대가 머물던, 큰 도시처럼 방대한 군영이 텅 비어 있었다.
철수를 위한 준비를 오랜 동안 했던 것인지 무기나 식량 같은 물자는 깨끗하게 쓸어 갔으나, 군영을 완전히 걷어들이지는 못하고 많은 자재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말로론이 세틴을 찾았을 때, 이미 모그란데는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귀족답게 싸워보자는 투의 말들은 그야말로 말장난이었고 허세였을 뿐이었다.
텅 비어있는 군영을 본 순간, 세틴은 결단을 내렸다.
이번 기회에 모그란데의 힘을 확실하게 빼놓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신속하고 간단하게 정찰을 수행하는 가운데 급속 행군을 명령했다.
가능하면 빨리 모그란데군을 따라 잡아, 그 즉시 전투를 개시하라는 명령이 각 부대에 전해졌다.
우살리드의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는 모그란데의 전략에 놀아나 줄 이유가 없었다.
세틴이 전군에 내린 지침은 첫째, 가능하면 모그란데군에 맹공격을 가하되 최대한 병력을 흩어 놓을 것. 둘째, 모그란데를 자군드라 강 건너편까지 후퇴시킬 것. 이렇게 두 가지였다.
세틴은 모그란데 군의 패잔병 수습과 예기치 않았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라무스 진지에 남아 있던 전 병력을 총동원했다.
제국군의 맹공격은 모그란데의 예상과 계획을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었다.
모그란데는 갑자기 사라진 우살리드군에 대한 의구심과 우려 때문에라도 세틴이 그토록 급한 공세를 펼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그란데는 제국군 쪽의 분위기도 살필 겸, 말로론을 보내 이런 저런 도발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의 의도는 말로론의 행동이 세틴으로 하여금 더 큰 의구심을 갖게 만들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말로론과의 만남을 통해서 세틴이 모그란데의 속마음을 낱낱이 파악하고 나아가 우살리드의 움직임에 대한 확신까지 주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그란데는 어차피 전선을 조금 더 물리고 만약의 경우 세틴이 공세로 나올 경우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틴이 그토록 급박한 공세를 치고 나가자 모그란데는 내심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높은 언덕 위에서 세틴군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던 모그란데는 새삼 세틴군의 위용에 놀라고 있었다.
이미 세틴군의 무장 상태가 뛰어나고 군기가 준엄하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직접 전선에서 적으로 대하는 세틴군은 모그란데의 상상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기치창검은 거대한 괴물의 이빨처럼 정연하게 나부끼고 있었고, 칼같이 발을 맞추어 행군하는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도 땅을 울리는 듯했다.
동부왕국군을 합해서 여전히 15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가지고도 감히 맞서 대적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그란데는 북부군과 동부왕국군에서 기사단을 모두 끌어모았다.
이미 후퇴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전투를 모색해보았자 큰 의미가 없을 터였다.
1 만 5 천에 달하는 기사단에게 모그란데가 내린 명령은 3 천씩 다섯 부대로 나누어 자신이 지목한 지점에서 추격해오는 세틴군을 기습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전면전을 벌이기보다 모그란데 본진이 흩어지지 않고 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맡긴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모그란데는 자군드라 강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 큰 산 근처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생각이었다.
전면전을 회피하고 후퇴하는 군대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세틴은 이미 노스롭군과의 전쟁에서 숱하게 경험해 보았다.
세틴의 머리 속에서는 그런 군대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머리 속에 훤히 그려지고 있었다.
어차피 당장 모그란데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다면, 이번 전투의 승패는 결국 모그란데를 자군드라 강 건너까지 몰아내느냐, 아니면 그가 자군드라 강 이편에서 성공적으로 전선을 정비하도록 방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세틴이 기필코 모그란데를 자군드라 강 건너로 몰아내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모그란데의 북부군이 자군드라 강을 건너지 않고 버틴다면 어쨌든 황도를 겨냥하면서 제국군과 맞서고 있다는 모양새가 펼쳐지고, 모그란데는 그것을 기화로 다른 세력들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군드라 강을 건너 퇴각하게 되면 동부로 밀려나는 모양새가 되면서 제국의 판도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정도의 위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세틴이 이번 기회에 기필코 모그란데를 동부로 몰아내려는 첫 번 째 이유였따.
모그란데가 자군드라 강을 건너고 나면 다시 도강을 해서 진격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결국 동부왕국이 전면적이고 본격적으로 참전을 하지 않는 이상 모그란데가 더 힘을 쓸 곳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만약 이번 작전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세틴은 곧바로 북동부를 점거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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