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시오미
서스텐에게 총관직 박탈이라는 철퇴를 안긴 오스틴 백작은 이른 아침부터 사절단의 야영지를 찾았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오스틴은 전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모든 것을 사절단의 방침에 따를 것임을 천명했다.
셈이 밝지 않은 데다 평소에 모든 일을 서스텐에게 일임하다시피 해온 오스틴 백작은 가신들을 통해 분야별로 나누어진 자료를 제출했다. 간혹 적당히 눈속임이나 하려는 자는 물론, 나름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자들도 율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굳이 이미 오스틴의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알고 있는 티를 내지 않아도, 자료의 허점이나 비현실성을 지적당하는 오스틴의 가신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개략적인 실사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후작이 오스틴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님의 적극적인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이만하면 우리가 구호물자를 제공할 근거는 마련된 셈입니다. 대부분의 물자는 추후에 놀란의 사우셔 항구를 통해 전달될 예정입니다. 우리가 가져온 일부 식량을 나눠주는 것을 확인하고 오스틴을 떠날 생각이오. 가능하면 백작께서 직접 식량을 나눠주는 자리에 함께 했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직접 나눠주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오. 이는 직접 백성들이 처한 현실을 목격하고자 하는 13 공자의 의지이기도 하고, 그래야 우리도 대공께 보고할 것이 생기지 않겠소 ?”
“민생 현장을 직접 겪어보시겠다는데 제가 무슨 명목으로 반대를 하겠습니까. 다만 10만 부르라면 나눠줄 수 있는 양이 가구당 채 2 부르가 되지 않습니다. 가구마다 나눠준다면 당장이야 반색하고 좋아하겠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불만은 더 커질 것입니다. 구호 대상 가구를 대폭 줄이고, 나눠주는 방법을 바꿔야 할 듯 합니다.”
오스틴 백작의 고심어린 말이었다.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지......”
“곡식을 나눠주기보다 직접 음식을 제공했으면 합니다. 지금 가장 곤궁한 처지에 놓인 백성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그린테일 강가에 모여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강가에는 마시고 씻을 물이 있고, 물고기라도 잡아 연명하려는 생각에 영지민의 1/3 가량이 모여 있습니다. 강가 몇 군데에 이미 구호소가 설치되어 있으니, 매일 한 번 죽을 쒀서 나눠주는 방식으로 가장 급한 백성들부터 구제하자는 것입니다. 나눠줄 식량이 부족한 마당에는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도 그렇겠습니다. 가구당 1, 2 부르를 나눠줘 봐야 아껴 먹는다 해도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인명 손실을 최소화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백작님의 방법에 저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 방법을 실행하려면 며칠 말미를 주셔야 합니다. 준비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백성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알리고 이해시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갈 길 바쁜 사절단의 발목을 잡지나 않을까 우려됩니다.”
“아닙니다. 사우셔에 구호 물자가 도착하려면 어차피 시간이 좀 걸릴 것이오. 백작께서 새롭게 실행하려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며칠 기다리겠소.”
사절단 일행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다. 전날 잠을 전혀 못잔 세틴이 낮잠을 두어 시간이나 자고 일어나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바네사가 말한 ‘수상한 그녀’가 세틴의 천막을 찾아왔다. 사절단에서 유일하게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여성인 바네사에게 꼭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것이었다.
바네사에게 몇 마디 말만 전하고 떠나려는 그녀를 바네사가 굳이 세틴의 앞에 데려다 앉혔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녀의 자세는 꼿꼿한 편이었다.
“우선 좋은 정보를 알려주어 고맙게 생각하네. 하지만 그대의 정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렇게 된 마당에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 보자고. 먼저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데 ?”
세틴의 말에 당황하면서도 그녀는 나름 당당했다.
“백성의 재산을 지키자는 일인데 굳이 정체를 따질 필요가 있나요 ? 이름이야 감출 이유도 없죠. 시오미라고 해요.”
“시오미. 스스로 밝히기는 싫은 모양이니 내가 맞춰 보지. 그대의 티리아 사형이 보낸 듯한데 어리숙하기는 난형난제구만. 마법사들은 죄다 그런가 ?”
“그, 그것을 어떻게......”
“그대의 몸을 감도는 마나의 향기가 티리아보다 오히려 진한 걸 보면 그 나이에 마법의 성취가 대단한 걸 알겠소. 어울리지도 않는 일꾼이 그런 정보를 탐지하려면 남다른 능력이 있어야겠지. 게다가 티리아는 내게 같은 정보를 줬지. 내일이 그날이라는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지. 이쯤 되면 그대가 정보원 노릇을 계속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
시오미는 난감한 표정으로 쓰디 쓴 입맛을 다셨다.
“예리하시군요. 두손 두발 다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절 어쩔 거죠 ?”
“마법사는 죄다 사악한 흑마법사나 마녀라는 소리를 믿지는 않아. 사절단의 정보를 탐색하려면 용병단의 말단 일꾼보다는 13 공자의 하녀가 낫지 않을까 ? 티리아가 얼마나 공정하게 식량을 배분하는지 들여다 보겠다고 하더군. 그런 정보라면 내가 매일이라도 그대에게 직접 알려 주어도 상관 없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알려진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면 즉시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나를 그냥 놔주겠다는 말인가요 ? 그건 고맙긴 한데 내가 곁에 있으면 불편하지 않겠어요 ? 왜 굳이 혹을 달고 다니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마법과 마법사에 대한 내 호기심이 크지. 마법사가 아니라도 티리아나 당신이나 내가 흔히 접하던 사람과는 너무 달라서 흥미가 동했다고나 할까. 지금 티리아에게 돌아가더라도 별로 좋은 소리는 못들을 것 같은데, 차라리 내 곁에서 첩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 당신의 신변 안전과 충분한 정보 제공은 내가 보증하지. 겉으로라도 13 공자의 사람 행세를 하면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는 못할 거야.”
첩자 노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가느니 남으라는 말이었다.
“내가 왜 당신의 호기심이나 채워주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것보다 내가 어떻게 그자들이 내일 일을 벌일 거라는 걸 알아냈다고 생각하세요 ? 후작이 자면서 다리를 긁는지 뒤통수를 긁는지까지 알아낼 건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것이 궁금하던 참이야. 말해 줄 수 있겠어 ?”
“멀리서 사람들의 얘기를 훔쳐듣는 정도야 ‘사악한’ 마법사에겐 재주랄 것도 없죠. 차라리 새날의 빛에서 파견한 첩자를 잡았다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는 편이 13 공자의 명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순순히 잡혀 줄지는 모르지만......”
“호오,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한 몸 빼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말로 들리네. 아무튼 내게 마법사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말은 듣기 좋으라고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야. 제국의 멍청한 작자들 때문에 통신마법도 없고, 텔레포트도 못하니 세상이 너무 불편해졌어. 마법을 이롭게 쓰려고만 하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데 말이야.”
실제 현대인 김성진의 관점에서 본 이 세계는 발전 가능성이 너무 적었다. 반드시 지구의 환경이 문명 발달의 기준이라 할 수는 없다 해도, 이곳에는 화석연료를 사용했거나 발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었고, 화약도 없고, 철을 비롯한 금속도 극히 귀했다. 오로지 마법 만이 문명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법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귀족이 있다는 게 신선하기는 하네요. 당신이 다른 아랫 사람들처럼 나를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만 없다면 제안을 받아드리죠. 그럼 이제 저는 어디서 지내나요 ?”
“보는 눈이 많으니 내 천막에 있을 수는 없어. 바네사가 적당히 조치해줄 것이야. 불편하겠지만 다른 하녀들과 같은 숙소를 써야 할 거야. 억지로 허드렛일을 시키지는 않을 테니 적절히 잘 처신하게.”
올란드 후작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첩자인 줄 뻔히 알면서 곁에 둔다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세틴의 기지와 입담으로 새날의 빛에 대한 정보를 적지 않게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비밀 준수 및 책임 분담을 약속해주었다.
세틴이 어떤 내색도 한 바 없었으나, 바네사는 그가 시오미를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직감했고, 하녀가 아니라 친동생처럼 보살폈다. 사람들의 눈에 띌 것을 우려하여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주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세틴의 천막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자연스럽게 세틴과 대화할 시간을 마련해주고, 세틴이 없는 동안에는 자신이 말동무를 해주었다.
며칠 사이에 바네사와 시오미는 친자매처럼 가까워졌다. 시오미는 인간적인 정에 목말라 있었고, 바네사가 그것을 충실하게 채워주었다. 시오미가 하는 말의 경계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공자께서 붙잡아 두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어 ? 스승도 못 믿어, 티리아도 못 믿어, 첩자 노릇은 물 건너 갔지. 나 같으면 제발 같이 있게 해달라고 빌기라도 했겠다. 도대체 뭘 믿고 그리 도도하게 군 거지 ?”
시오미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화색이 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도도하게 보였나요 ? 정말 많이 참은 건데...... 13 공자가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조롱하는 게 너무 싫었단 말이에요. 신분 빼고 보면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너는 참 ‘신분 빼고’라는 소리를 쉽게도 하는구나. 신분이 전부나 마찬가지인 세상에서 별종은 별종이다. 우리 공자님이나 되니까 그런 너를 봐주는 거지, 어디 가서 그런 소리는 입도 뻥긋하면 안돼.”
“헤헤, 바네사니까 그런 거죠. 제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진 땅 마른 땅 정도는 가릴 줄 안답니다. 그래도 바로 다음날 구호물자를 전부 오스틴 성의 창고로 옮겨버린 걸 보면, 절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가 봐요.”
“13 공자는 천성이 순하고 인정많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야. 공식적으로 13 공자가 되기 전에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 호호공자야 호호공자.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배풀 줄만 알았지, 속여도 이용해 먹어도 쓴소리 한 번 안 해서 생긴 별명이지. 그런 분을 속이려 들면 천벌을 받지. 하늘이 가만 있어도 내가 가만 안 있어.”
구호 물자를 빼돌리려는 시도에 대해서 지켜보고 있다가 일망타진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세틴은 일찌감치 오스틴 백작에게 인도하는 것으로 미연에 방지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잡음이 계속 되어서 사절단에도 좋을 일이 없고, 죄를 짓도록 방치해서 죄를 묻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사우셔를 통해 제공되는 물자는 수량만 배정해주고 각 백작령에서 스스로 운송하게 할 계획이어서 사절단이 물자 탈취를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다른 백작들까지 가세해서 사절단을 골탕먹이려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유민들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후작의 방침에 따라 모두 걸어서 구호 활동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비가 오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이었다. 야영지에서 한 시간 넘게 걸어가자 강변을 따라 새까맣게 늘어서 있는 움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리 출발한 오스틴 백작이 유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그대들을 버리지 않고 살길을 열어주신 브라스트 대공 전하의 은혜를 잊지 말기 바란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모두 같이 죽자는 자이니 즉석에서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미리 나누어준 표를 잘 간수해서 죽도 못 받아 먹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비쩍 마른 미이라를 연상케 하는 노인들도, 얼굴이 노랗게 뜨고 배만 불룩 튀어나온 아이들도 간만에 맡는 곡식 냄새에 벌써부터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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