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
“놀란 백작이 만약 이 일에 연계되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가 제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나, 본인 입으로도 그렇고 제가 판단하기에도 대공을 넘어서기보다는 대공의 협조를 필요로 하고 원한다고 보았거든요. 만에 하나 마빈이 그런 인간이라면 그는 내 첫 번째 제거 대상이 될 것이오. 리스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후작이 말했다.
“공자가 말했지요. 놀란 백작은 적이기보다 친구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나도 공자의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소. 하지만 지금은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엄중하오. 적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고 우리는 아무 것도 감추고 숨길 수 없을뿐더러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조차 쉽게 판단할 수 없으니 말이오.”
한밤중까지 이어진 나룻배 운송이 마무리 될 때까지 사절단 수뇌부의 논의는 끝없이 이어졌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변수가 생겼기에 그만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올란드 후작은 그런 면에서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사전대비야말로 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사절단은 재정비를 위해 나루터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야간 경비를 4 교대에서 3 교대로 바꾸어 경계를 강화하고 병사들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흑룡기사단, 상카 용병단, 세틴의 식구들까지 모두 집중적으로 단련에 힘쓰기로 했다.
그린테일에서 나바니아 방면으로는 평지가 매우 좁았다. 나루터를 떠나 30 분도 지나지 않아 산지가 펼쳐졌다. 밝은 주황색 암석으로 이루어진 바위 절벽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협곡을 만 이틀에 걸쳐 통과하고서야 푸른 나무가 간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협곡은 사람이 살 여건이 전혀 아니어서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는 미리 통보를 받은 나바니아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협곡을 지나오는 내내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사절단은 그제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협곡은 미리 준비를 하면 습격하기에 가장 좋은 지형인지라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는데 다행히 습격은 없었다.
올라드 후작은 마중을 나온 나바니아의 기사단장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벌써부터 사우셔에서 출발한 구호 물자에 대한 탈취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오스틴으로 향하는 물자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점, 모든 탈취 시도가 브라스틴 경내에서 일어난 점, 탈취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자 구호 물자를 모두 불태워 버린 경우가 있었다는 점 등이었다.
야영지를 꾸리고 나바니아의 기사단장 바우트 저빌린이 동석한 회의에서 후작이 말했다.
“바우트 경의 말대로라면 굶주림을 참다 못해 들고 일어선 단순한 도적떼는 아닌 것으로 보이오. 어쩌면 강상에서 일을 꾸민 무리와도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하오. 바우트 경, 나바니아의 물자 수송에는 별 문제가 없었소 ?”
“나바니아에서는 이번 물자 수송에 최정예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아마 상당 규모의 정규 군대가 아니고서는 우리 물자를 건드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브라스틴이라고 해서 딱히 경계가 허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브라스틴의 물자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데는 악랄한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고 나바니아 백작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후작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나바니아가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고 말이오 ? 브라스틴 백작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브라스틴의 물자를 집중적으로 노린다 함은 분명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지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 백작령에서 혼란을 야기하려는 세력의 실체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바우트가 말했다.
“최근 6 백작령 백성들 사이에서 새날의 빛이라는 단체가 급속히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희는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 아닐 것이오. 우리가 이미 새날의 빛과 조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일 자들은 아니라고 보였소. 내가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필시 또 다른 세력이 암약하고 있을 것이오.”
후작의 말에 바우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랜 기근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언제라도 죽기 아니며 까무러치기 식으로 들고 일어서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혼란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다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농토가 극히 적은 나바니아는 일찌기 여러 가지 산업을 키웠기 때문에, 식량이 비싸고 구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동요도 적은 편이고,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도적떼가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나바니아 경내에 계시는 동안에는 저희가 철저히 안전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후작이 사의를 표했다.
“바우트 경만 믿겠소.”
협곡을 벗어나 나바니아 백작성까지 사흘이 걸리는 길이었다. 며칠째 계속 내린 비 덕분인지 겨울임에도 양지바른 곳에서는 푸릇푸릇한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씩 만나는 영지관리인들의 관사는 대공령의 남작이나 자작성 못지 않게 훌륭했다. 나바니아에서는 좋은 석재가 많이 나는지 석조건물도 있었다. 원래의 방침대로 관사에 들르지는 않았으나, 관리인들이나 마주치는 일반 백성들도 다른 곳에 비해 확연히 활기를 띄고 있었다.
가는 내내 세틴은 바우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나바니아에 관한 얘기였으나 꽤 속깊은 얘기들이 오가기도 했다.
바우트의 얘기로 대공이 작위에 인색한 것은 원래 공국의 전통이니 그렇다 쳐도, 프라움의 아카데미를 개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6 백작령의 총관과 기사단장 대부분이 작위가 없는데, 자식들에 대한 교육의 기회를 얻기가 어려운 점이 가장 아쉽다는 얘기였다. 세틴은 놀란 백작도 비슷한 뜻을 여러 번 비춘 것을 기억했다. 세틴은 바우트에게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아카데미를 개방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세틴이 생각하기에도 아카데미를 개방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였다. 배타적으로 기회를 제공받는 브라스트 일족은 그에 안주하여 교육을 하는 자나 받는 자나 형식적인 과정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6 백작령의 인재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다면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교류도 활발해져서 이점이 적지 않을 것이었다.
브라스트 아카데미를 개방하지 않다 보니, 6 백작들은 자식들을 제국으로 유학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대공과 6 백작의 틈을 더욱 크게 벌리는 요인일 수도 있었다.
“13 공자께서 공국의 역사를 더 잘 아시겠지만, 사울 대공의 폴린 왕국 공략 당시 나바니아는 항상 선봉을 맡았고, 누구보다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알토란 같은 브라스틴의 옥토들을 브라스틴이 독차지하는 바람에 이처럼 외지고 궁벽한 곳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죠. 나바니아가 모든 어려움을 딛고 브라스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종족 융화정책이었습니다.”
세틴의 흥미를 보였다.
“이종족이라면 ? 엘프나 드워프, 오크 같은 종족 말이오 ? 지금까지 오면서는 한 명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요.”
브라트가 웃음지으며 대답했다.
“나바니아에서는 이종족에 대해 완전히 평등한 권리를 보장합니다. 다만, 서로 간의 합의에 따라 거주와 혼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가령 아름다운 엘프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다 해도 결혼은 물론 일시적인 야합조차 엄격한 처벌을 받습니다. 그것은 엘프 쪽도 마찬가지지요.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해도 종족의 순수성은 확실하게 지켜나간다는 것이 이종족들과의 합의이기도 하고, 융화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종족들로서는 자신들의 생활권과 종족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겠군요. 같은 인간들끼리도 반목을 일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종족까지 포용한 나바니아 선조의 혜안이 돋보이네요. 엘프와는 ‘검은 숲’의 몬스터를 같이 몰아내면서, 드워프와는 광산 개발과 무기 재조를 통해 단단한 동맹을 구축했다고 들었습니다. 오크들과는 어떻습니까 ?”
“불가침협정입니다. 오크와는 서로 기본적인 혐오가 심해 융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검은 숲 안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 오크 부족들이 수 십에 달하는데, 영역의 경계를 분명하게 나누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협약이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오크와는 지금도 교류가 활발하지는 않습니다.”
세틴은 이종족들과의 만남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 프라움을 방문한 엘프, 드워프, 오크의 대표 사절들을 보았던 기억이 워낙 강력해서였다. 어린 마음에 오크와 드워프는 너무 무섭고 거칠어 보였고, 유독 엘프들이 세틴을 ‘고귀한 영혼’이라며 칭송해 마지 않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나바니아의 기사단에는 흑룡기사들과 대등하게 겨룰 만한 실력자가 여럿 있었다. 과거 전장을 주름잡던 나바니아 선조의 후예들다운 기상과 실력을 갖춘 기사단이었다. 무엇보다 강력한 몬스터들과의 실전이 어디보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 나바니아였다. 나바니아의 검은 크고 무거웠으며, 검술은 치명적인 공격에 치중해 있었고 실전적이었다. 사절단의 검술 단련 시간에 자연스럽게 합류한 나바니아 기사단으로 인해 야영지의 저녁시간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편, 세틴은 최근 사절단이 무술을 단련하는 시간에 상카에게 재커드 검술을 전수받고 있었다. 이미 달인(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걸친 세틴이어서 재커드 검술의 요체와 특유의 초식 몇 가지를 익히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세틴이 재커드 검술을 알아갈수록 자신이 받아들인 재커드의 혼과 찰떡궁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틴은 그 중에서도 마상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돌진 공격과, 꽤 먼 거리에서도 시전할 수 있는 도약 공격에 빠져들었다. 특히 ‘재커드의 송곳니’라는 이름의 도약 공격은 높이 도약한 후 역수로 바꾼 검을 찍어내리는 초식이었는데, 상카는 세틴이 시전하는 재커드의 송곳니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나바니아 도착을 하루 앞둔 깊은 밤에 티리아가 세틴을 찾아왔다.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서 자신이 이끌던 무리들이 태반은 죽임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시오미도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