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드래곤 호수
세틴이 대공령을 관통하며 마주친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다. 주민들의 행색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고, 하나같이 비쩍 마른 왜소한 체형이었으며, 고된 노동에 지친 얼굴은 까맣게 주름져 있었다. 현대인인 김성진의 관점에서는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브라스트 궁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절감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브라스트 대공가 하나의 호사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자각이 뼈를 때렸다. 연신 대공의 하늘같은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의 갈퀴같은 손을 잡는 세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그런 세틴을 보는 일행들은 유별나 보이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 하면서도 백성들을 생각하는 세틴의 모습이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도 나이 어린 13 공자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세틴의 눈에 비참하게만 보이는 대공령 주민들의 삶이 그나마 재해와 역병까지 덮친 6 백작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고 하니, 6 백작령의 주민들이 얼마나 처참한 처지에 놓여 있을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출발한지 6일 후에 도착한 그린 드래곤 호숫가의 칼레인 자작령은 활기가 넘쳤다. 호수에 접하여 비옥한 농경지도 많고 어업도 활발해서 대공령에서는 가장 풍요를 누리는 곳이 바로 칼레인이었다.
그린 드래곤 호수는 대공령의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자, 6 백작령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였다. 줄여서 ‘그린호’로 통칭하는 호수의 대공령 쪽에 칼레인 자작령이 있고, 호수의 건너편은 평지가 좁아서 폴린 왕국 시절에는 군사 요새가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작은 교역 도시가 형성되었지만, 여전히 ‘하늘 요새’로 불리고 있었다. 폴린 왕국에서 볼 때, 높디 높은 산길을 올라 기적처럼 등장하는 드넓은 호숫가에 지은 요새였기에 하늘 요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칼레인과 하늘 요새를 왕복하는 연락선은 주로 교역품을 실어나르는 용도인지라 사절단 모두가 탑승하려면 개조를 해야 했는데 미처 개조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절단 일행은 칼레인에서 이틀을 더 기다려야 했다.
“처음으로 프라움을 떠나 여기까지 오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13 공자.”
칼레인에 도착하여 가진 두 번째 수뇌부 회합에서 올란드 후작이 건낸 말이었다.
“구호 물자를 대부분 사우셔 항구를 통해 수송하기로 한 결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것 같습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가도가 나 있다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도 만만치 않았는데 호수를 건너고, 다시 더 험한 산길을 따라 내려 가야 한다니 그 많은 물자들을 가지고 가야 했다면 짐덩이에 파묻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겨울 치고는 날이 그리 춥지 않아 병사들과 하인들이 고생을 덜어서 다행입니다.”
올드만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흔들리는 마차에 멀미가 나고 엉덩이가 아파 죽을 뻔 했다는 응석이나 기대하고 물은 제가 소인배입니다. 13 공자의 의젓하고 속 깊은 말씀에 부끄럽기만 하네요. 병사들을 모아 놓고 대련 시범을 보인다는 발상이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어찌 계속 미루고 있는지요 ?”
세틴이 대답했다.
“저부터도 몸이 근질근질 한 것은 사실이나,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면 자칫 촌민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 미루도록 했습니다. 마침 여기서는 이틀의 말미도 있고 하니 판을 벌여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칼레인의 기사단이 제법 실력이 좋습니다. 그들을 불러 함께 해도 괜찬겠지요. 아무래도 흑룡기사단과 13 공자의 식솔들 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라......”
셔틀리 만자의 거대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묵직하게 낮은 목소리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흑룡기사단이 세틴의 식솔들과 맞붙는 그림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는 의도가 담겨있었으나 세틴은 개의치 않았다.
“좋습니다. 칼레인 기사단에게도 흔치 않은 기회일 터이니 단장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먼저 우리 쪽과 칼레인 기사단이 승부를 벌이고, 그 승자에게 흑룡기사단의 실력을 맛볼 기회를 주는 방식이 좋겠습니다.”
셔틀리가 덧붙였다.
“친선 대련인 만큼 오러 사용은 금지하는 것으로 하지요.”
오러를 사용하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나, 체급부터 다른 흑룡기사단이 절대 밀릴 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세틴 쪽에도 비장의 한 수가 있음을 알았다면 그런 제한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대련은 구경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칼레인 기사단의 훈련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칼레인 쪽에서도 급작스럽기는 하나, 마다 할 이유가 전혀 없는 행사였기에 흔쾌히 받아들이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합격술에 특화된 난다와 완다는 2 대 1 승부가 불가피했으므로 상대편에서 그것을 감안하여 선수를 내보내기로 합의했고, 세틴의 팀에 합류한 저스틴까지 6 번의 승부를 보기로 했다.
흑룡기사도 흑룡기사지만 시녀장과 어린 시녀들까지 어울리는 대련에 대한 기대가 커서인지 훈련장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모였다. 병사들과 하인들까지 극소수만 남기고 전원이 온 것은 물론 칼레인에서도 그 이상의 인원들이 참여한 때문이었다.
세틴네와 칼레인 기사단의 승부는 뜻밖에 세틴 쪽의 전원 승리로 싱겁게 끝이 났다. 처음 난다, 완다와 맞붙은 칼레인의 젊은 기사는 손 한 번 제대로 못써 보고 물러났다. 난다와 완다의 합결술이 그만큼 절묘했다. 난다가 시선을 끌고 어느 틈에 뒤로 돌아간 완다의 검이 젊은 기사의 목에 닿기까지 숨 한 번 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전투 경험이 적은 기사라면 누구라도 쉽게 당할 듯한 두 소녀의 묘기에 큰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그럴 듯한 볼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반면, 기사의 대결에 대한 고정관념과 자부심이 강한 흑룡기사단과 칼레인 기사단은 마뜩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또 다른 젊은 기사들과 맞붙은 토마스와 바네사도 무난한 승리를 거두었고, 중견 기사들과 대결한 울브린과 저스틴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마지막으로 칼레인 기사단장과 세틴의 대결이 기대를 모았으나, 칼레인 측에서 기권을 선언하면서 싱겁게 끝이 났다. 이미 줄줄이 나가떨어진 판에 명색이 기사단장이 어린 13 공자를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대공가의 공자를 이긴다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고, 만약에 지기라도 하면 칼레인 기사단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다고 판단한 듯했다.
세틴은 칼레인의 기권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칼레인의 기사들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쉽겠지만 제 검술 솜씨는 좀 아꼈다가 보여드리는 걸로 하죠. 검술 대련은 어디까지는 승부보다 자신을 점검하는 의미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13 공자의 식구들이 흑룡기사들에게 무참히 깨질 것을 각오하고 배움을 청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잠시 쉬었다가 대공의 방패, 흑룡기사단의 진면목을 확인하시죠.”
흑룡기사단에서는 난다, 완다와의 다들 대결을 피하고 싶어하는 분위기였다. 자부심 강한 흑룡기사로서 어린 소녀들과의 대련이 부담스러울 만도 했다. 결국 기사단의 막내가 첫 주자로 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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