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에 부는 바람
세틴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공작님, 무엇보다 황자들을 이만 풀어주시지요.
아무리 대권을 물려받을 만한 황자가 없고, 지금까지 황자들의 행태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더 이상 황자들을 억압해서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기 힘드실 겁니다.
비록 외손자이기는 하지만 황실의 일원으로서 부탁드립니다.
언제까지 공작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
모그란데는 의외로 느긋한 표정이었다.
“황제로부터 섭정으로 임명받지도 못했고 황실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지.
하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황제의 권한을 대신할 수 있는 섭정이라는 자리에 있어.
자네가 무슨 뜻으로 날 처음 본 자리에서 그런 요구를 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네.
자네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지.
황자들을 풀어주면 자네는 내게 무엇을 해줄 텐가 ?”
세틴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우살리드를 토벌하는데 앞장 서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출병할 수 있습니다.
황도에 데려온 병력이 3 만 정도지만, 10 만 정도의 병력은 공작께서 도와주지 않더라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모그란데가 웃었다.
“하하하,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군.
하지만 당장은 아니네.
자네가 제국군 사령관을 맡으면서 우살리드는 주춤할 걸세.
섣불리 황도로 진격하지는 못할 거야.
우리에게 시간이 충분히 생긴 셈이지.
노스롭을 진압하고 이제 막 황도에 돌아온 사람을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싸움터로 내모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은 아니지 않겠는가 ?
황자들을 풀어주면 나보고 섭정에서 내려오라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야.
거기에 자네까지 가세한다면 내가 감당할 수 있겠나 ?
우살리드 토벌은 지금 자네가 내게 지불할 댓가로는 부족하지.
자네는 왕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
세틴이 선뜻 대답을 하지 않자 모그란데가 말을 이었다.
“천년 제국의 역사에 왕작을 얻은 사례가 극히 드물어서 그 의미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네.
자네의 선조인 사울 브라스트께서 제국 서부의 골칫거리였던 폴린 왕국을 독자적으로 정복했음에도 받은 작위가 대공이었지.
왕이 아니고 말이야.
제국의 시조께서는 제국의 영토를 왕작을 가진 자에게 나눠주는 일을 금했네.
제국이 실질적으로 분할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지.
대신에 왕작을 받은 자에게는 황도에 왕부를 세우고 독자적인 병력을 양성하고 황권 계승에서 황자들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 세 가지 권리를 보장하도록 했다네.
이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알겠나 ?
나는 바로 제국이 지금과 같은 위기에 빠질 상황에 대비한 장치라고 본다네.
제국에 여러 가지 위협이 닥쳤을 때, 제국 전체에 덕망을 입증한 인재가 무능한 황실을 대신해서 수습을 주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것이야.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의도는 알겠지 ?
내가 섭정왕에 오르는데 여섯 황자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자네가 나서준다면 연금을 풀어주고 황자들이 다시 국정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할 용의가 있네.”
세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 제가 제국군 사령관을 제안받았는 때, 곧바로 공작께서 왕작을 원하실 거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브라스트 아카데미가 황실 아카데미보다 수준이 떨어질지는 몰라도 제국의 역사와 법률을 혹독하게 가르칩니다.
역사와 법률 각각에서 분야별 교수 6 분 씩에게 엄격한 검증을 받아야 아카데미를 졸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카데미를 제가 14 살에 마쳤습니다.
친철하신 설명에 무척 감사합니다만, 제국 역사에서 왕작을 받았던 세 분의 사례에 대해 말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하루 종일이라도 떠들 수 있습니다.
왕작에 대한 공작님의 ‘독특한’ 해석이 무척 흥미롭기는 하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황자님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라도 공작께서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설득할 염치가 없습니다.
제가 공작님께 제국과 황실을 위해 무슨 공을 세우셨는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습니까 ?
내게 무엇을 내놓을지 물으셨는데, 황자들을 풀어주는 게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
나는 황도에서 공작과 칼을 맞대고 피를 보는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
제국군 사령관이 되라는 공작의 제안을 일단 받아들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황자들이 저의 외숙이라고는 하나 그분들이 모두 저를 지지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저를 황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
지금까지는 공작께서 조정을 좌지우지 하셨겠지만 앞으로는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황자들을 풀어주라는 저의 제안은 공작과 저 사이에 완충지대를 두고자 함입니다.
당장 받아들이기 힘드시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자들이 움직이고 나서 줘야 공작께서도 운신의 폭이 생길 겁니다.”
노련한 모그란데가 세틴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열 일곱의 청년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힘든 얘기였다.
“이거 오늘 내가 정신없이 두들겨 맞는구만, 하하하.
아무래도 우살리드와 싸우는데 앞장서겠다는 약속 정도로 만족해야겠군.
그런데 정말 단독으로 우살리드에게 이길 자신이 있는 건가 ?”
세틴이 짧게 대답했다.
“노스롭을 치러 갈 때도 이길 자신 따위 없었습니다. 병력은 질롱 사령관이 내준 1만이 전부였지요. ”
모그란데가 세틴의 대답을 한참 음미하는 듯했다.
“젊은 패기가 부럽네.
우리는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는 세대지.
나도 병력을 이끌고 직접 전장에 나설 용기는 없어.
어찌 보면 내 가장 큰 약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지점이야.
우살리드와의 전쟁이라는 짐을 자네에게 몽땅 지울 생각은 없네.
내 북부군 또한 전담하기는 힘들 걸세.
그러니 중앙 제국군와 북부군, 즉 자네와 내가 합동으로 토벌군을 만드는 방향으로 생각해주게.
구체적인 방법은 차츰 의논하는 걸로 하지.
내 제안은 어느 하나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군.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았지.
내 딸 시오미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
우살리드 토벌에 기꺼이 앞장서겠다는 세틴의 도발이 멋지게 성공한 상황이었다.
세틴은 모그란데에게서 ‘합동으로 토벌군을 만들자’는 그 한 마디를 이끌어내고자 도발을 한 것이었다.
세틴이 역시 짧게 대답했다.
“저는 제국이 안정되고 정상화될 때까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때까지 시오미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것으로 세틴을 황도로 불러 들이면서 모그란데가 이루고자 했던 목적은 어느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나 모그란데는 후회나 좌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인생 최대의 적수라 할 만한 세틴을 더 잘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기필코 거꾸러뜨릴 대책을 세우고자 의욕을 불태우는 자였다.
이튿날, 세틴이 황궁에서 가까운 제국군 중앙 사령부 관사에 제대로 짐도 풀지 못한 상황에서 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몇몇 조정 대신들과 귀족들이 황자들의 연금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보고였다.
일곱 명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를 시작으로 같은 내용의 상소가 줄을 잇고 있다는 것이었다.
민심의 변화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빨랐고, 이에 용기를 얻은 대신과 귀족들이 곧바로 움직였다.
모그란데는 세틴이 말했던 상황이 이토록 급박하게 전개될 줄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명약관화했다. 상소를 받아들이거나 상소를 올린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야 했다.
모그란데는 일단 닷새 후에 어전회의를 열어서 결정한다는 식으로 시간을 벌었다.
세틴이 수작을 부려 그들을 움직였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세틴에게는 그럴 만큼 폭넓은 인맥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는 사실을 모그란데가 모를 수 없었다.
그것이 황도의 민심이고 대신과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하더라도,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고자 한다면 세틴과 전면전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번 물러서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몰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쉽사리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모그란데가 측근들을 닦달하여 조정 관료들과 귀족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데 부심하는 한편, 황도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북부군에도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갈 줄 예상 못하기는 세틴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참모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각 부분의 동태를 파악하고, 몇 가지 비상 상황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책도 언제든지 작동할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그날 밤, 늦게 사령관 관사에서 회의가 열렸다. 세틴의 표정은 담담한 편이었다.
“모그란데가 강경책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차분하게 하려던 일을 해나가면서 대처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주도적으로 나서서 상황을 장악하려 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서도 안됩니다.
모그란데의 동향을 세밀하게 주시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저 자신도 아직까지 황도의 지인들을 만나볼 틈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급박하게 움직임이 나타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그동안 모그란데가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들을 억눌렀지를 보여준다는 점이고, 하나는 접객단이 우리를 찾았을 때 오고 간 대화가 누출되었을 가능성입니다.
장군께서 무엇보다 먼저 황자들에 대한 연금 문제를 거론한 사실을 알고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모그란데가 이 모든 것을 우리가 계획적으로 주도했다고 판단한다면, 일전을 불사하더라도 밀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황상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그란데도 알 테지요.
더구나 장군께서 모그란데에게 황자들의 연금을 풀어주어야 서로 피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을 밝히셨다 하니, 모그란데가 오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민심이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모그란데를 등진 것이 고무적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무려 10 만에 달하는 사병을 보유한 모그란데는 정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제국의 큰 병입니다.
당장은 모그란데가 흔쾌히 황자들의 연금을 풀어줄 명분을 주어야 합니다.”
세틴이 장수들을 돌아보았으나 이런 정도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낼 만한 식견은 누구에게도 없어 보였다.
“내가 만나 보니 모그란데는 실로 까다로운 자입니다.
여성스럽다 할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에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잘 웃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것을 쉽게 포기하거나 물러설 사람도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왕작을 내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나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황태자를 고를 권한을 줄 생각입니다.
황제 폐하의 상태가 이미 공표되었으니, 연금이 풀리고 나면 곧바로 누구를 황태자, 즉 차기 황제로 선출할 것인지, 한다면 언제 할 것인지가 대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내 생각을 알고 계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모그란데는 내 제안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우살리드와의 전쟁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우살리드를 성공적으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어떤 술수도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황도에 온 목적은 오직 피를 덜 흘리고 군사께서 말한 제국의 큰 병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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