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틴의 계획
회의를 파한 후, 여느 때처럼 세틴과 호아니는 둘 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는 서로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고, 밤이 새도록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세틴은 호아니에게 배울 것이 많았고, 호아니는 나이답지 않게 끝을 알 수 없는 세틴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호아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만 장군에게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정치판에서 십여 년을 굴러 먹었어도 장군의 유연한 발상을 따라가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모그란데가 황태자를 고를 수 있게 해주겠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
세틴이 웃었다.
“하하하,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모그란데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제안 아닐까요 ?”
호아니가 정색하며 말했다.
“모그란데가 황실을 전횡할 명분을 줄 수도 있습니다.
누가 황태자가 되든 모그란데와 맞설 수 없을 겁니다.
더구나 공식적인 후견인이 되는 셈인데 억지로 밀어붙이고 있는 섭정이라는 지위보다 오히려 더 큰 힘을 갖게 될 수도 있지요.”
세틴이 말했다.
“황자들의 연금을 풀고 나면 황태자 옹립 문제가 곧바로 뒤를 이을 것은 자명합니다.
모그란데의 입장에서 그것까지 계산이 서지 않으면 쉽사리 연금을 풀 결단을 내릴 수 없을 테지요.
모그란데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냐보다 황실과 조정을 정상화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모그란데가 황태자를 제 마음대로 조종하는 한이 있어도 지금보다는 낫다고 봐요.
황태자를 세워놓고 자신이 섭정을 계속 하겠다고 우기지는 못할 테니까요.
모그란데가 나를 어떻게든 끌어내리려는 모략을 멈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황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모그란데가 운신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줄어들 거에요.
나는 모그란데가 밀어줄 황태자를 포함해서 모든 황자들이 모그란데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봅니다.”
호아니가 물었다.
“장군께서는 모그란데가 그 제안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시는군요.
하기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모그란데를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
닷새라는 기간 동안 그의 마음이 수없이 오락가락 할 텐데 혹시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어전회의 바로 전날 늦은 밤에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서둘 이유는 없습니다.
모그란데에게 적극 대항하는 대신과 귀족들의 동향도 더 살펴야 하고, 모그란데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봐야 합니다.
그들 간의 갈등이 커질수록 내 제안은 큰 효과를 볼 거에요.
그리고 모그란데가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행보로 볼 때, 그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무척 신중하고, 무엇보다 군사작전 경험이 별로 없지요.
이럴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그림자는 이미 2 년 전에 내 손에 박살이 났습니다.
단기간에 그만한 비밀세력을 재건하기는 힘들죠.
내가 모그란데 휘하의 장수들을 잘 모르고 병력의 질도 잘 모르지만, 우리의 3만 병력이 모그란데의 10만에 결코 지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전투다운 전투를 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 군이 전투를 계속하면서 발전시켜온 체계와 작전 개념들을 생각해 보세요.”
호아니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세틴군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강한 군대인지 잠시 잊고 있었던가 봅니다.
제가 참여하지 못해서 아쉽기는 하지만, 오우거 수 백 마리를 한 번에 처치하면서 병사들의 무력이 부쩍 성장했다고 들었습니다.
사기는 말할 것도 없구요.
내일부터 황도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동향 파악에 빈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모그란데의 생각을 읽어내려면 셔플린이나 시오미를 활용할 여지는 없겠습니까 ?”
세틴이 진지해졌다.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닌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활용하지 않을 겁니다.
셔플린은 이번에 보니 정신 지배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요.
시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나도 부끄럽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시오미가 때에 따라 내게 유리할 수 있는 행동을 할 거라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깊은 내막까지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동향이라도 감지할 여지를 파보겠습니다.”
세틴이 차를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호아니 경,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줄 알지만 내가 꼭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장군의 일이 제 일이니 부탁이라고 하실 건 아닙니다.
무슨 일인데요 ?”
세틴이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쌈박질만 하고 살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장수나 병사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요 ?
전쟁에서 이룬 공으로 받은 상을 쓰면서 여생을 보내게 될까요 ?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이 자신과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상업과 무역을 크게 일으키는 것을 제국을 발전시킬 원동력 중 하나로 삼으려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제 생각이 더 정리되고 실현 가능성이 갖춰질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물자의 조달이나 전리품 처리를 도와주는 군상이 따라다니고 있는데, 나는 군상을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시키려 합니다.
군이 직접 상업과 무역을 주도하는 거지요.
일단, 여기까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호아니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돌로만 고원에서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교역에 초점을 맞추어 관계를 정리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6백작령에서 놀란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과 수군 양성을 시작하도록 조치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상업에 대해 워낙 무지해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공부를 해야겠군요.
장군님의 구상을 좀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세틴이 목을 가다듬었다.
“호아니 경이 이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내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들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6백작령에는 5 년 전부터 내리 3 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엄청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6백작령에는 제국 어디서나 통할 만한 자원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놀란의 말과 나바니아의 무구를 들 수 있죠.
놀란은 제국 남부의 호르바트 백작과의 사적 인연도 있겠지만, 교역을 통해서 기근을 큰 어려움 없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다른 영지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교역만 잘 해도 백성들은 훨씬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고 나라도 부강해질 수 있습니다.
영지의 모든 것을 독점하는 귀족들의 특권 때문에 상업, 특히 원거리 교역은 극히 제한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는 지역이 크게 5 곳입니다.
지금은 전시체제로 총독들이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으나, 군사 모병과 물자 조달에 국한되어 각 영지들을 쥐어 짜내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총독을 중심으로 원거리 교역을 병행하게 되면 우리 군의 재정을 불리는 것은 물론, 영지들에게도 큰 이익을 안겨 줄 수 있지요.
부가적으로 군상의 일을 수행하는 장수나 병사들은 무역의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놀란의 사우셔와 노스롭의 항구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큰 강까지 활용하여 해상 교역망을 확립하면 5 지역 간의 교역이 놀랄만큼 빠른 시간에 가능해집니다.
내가 장담하건데 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전쟁이 끝나기 전에 5 지역과 여타 제국의 영지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생길 겁니다.
귀족들을 힘으로 누르지 않아도 귀족들이 스스로 변화의 바람을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호아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말씀이나 솔직히 저는 그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장 말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듯합니다.
놀란 경과 난다, 완다 경이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니 제가 그들과 상의해서 세부적인 추진 계획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일단 지역별로 담당관을 한 명이라도 두게 하고 영지의 특산물이나 남아도는 물품들을 조사하는 일부터 시작하시면 될 겁니다.”
이튿날에도 황자들의 연금을 풀라는 상소가 이어졌고, 황도에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틴은 줄지어 들어오는 대신과 귀족들의 면담 요청을 제국군 재건 때문에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모그란데도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서 세틴을 만나고자 했으나 세틴은 이 역시 같은 핑계로 미루기만 했다.
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하루 만에 자꾸 불러내는 것이 그리 명분없는 일이었기에 모그란데도 강경하게 만남을 재촉하지는 못했다.
급기야 그날 밤에 시오미가 세틴을 찾아왔다.
그녀를 통해서라도 세틴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모그란데의 속내가 엿보였다. 시오미가 웃음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느긋하시네요 ?
당장이라도 북부군이 황도에 들어오면 모두가 가루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하나 봐요 ?”
세틴이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가 얼마 만이야.
먼저 애틋한 감회라도 나누고 싶은데......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오랫동안 네 생사조차 몰랐지.
그때는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시오미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
나는 지금도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에요.
양부께서 왜 날 보냈는지 설마 모르지는 않겠죠 ?”
세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모를 리가 있나.
그러니 이렇게 웃고 있잖아.
모그란데에게 전할 얘기는 하나야.
나는 가급적 피를 보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것.
공작이 닷새라는 시간을 벌어 놓고도 왜 그렇게 안달인지 모르겠군.”
시오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양부는 대신들이나 귀족들은 발톱 밑에 낀 때보다 우습게 여겨요.
오로지 한 사람을 두려워 할 뿐이죠.
그러니 어전회의 전에 합의를 보자고 하는 건 당연하지요.”
세틴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두려워 하는 건 모그란데가 황실과 대신들과 귀족들을 존중해주는 거야.
이건 내 진심어린 충고이니 모그란데에게 그대로 전해도 좋아.
그리고 어전회의 전날 밤까지 충분히 고민해 보고 찾아갈 거라고 전해.
모그란데와의 일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 우리 헤어진 뒤로 못다 한 얘기나 하지.”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