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가도 정비
난다를 단장으로 하는 동부 가도 정비단이 제국군 사령부에서 결단식을 가졌다.
잘낫이 부단장을 겸해서 공병대 2 천을 이끌고, 베른이 경비대로 기병 1 천을 통솔하고 있었다.
난다를 보좌하는 행정단에는 새롭게 역참장을 맡게 될 사람들을 포함해서 30 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병대가 주축이 된 이유는 가도와 역참을 정비하고 필요할 경우 증, 개축을 해야 했으며, 특히 3 곳은 대대적인 증축으로 병참 기지로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3 천 외에도 사령부에서 물자 들을 조달하는데 필요한 병사가 2 천 가량 동원될 예정이었다.
연병장에 도열한 3 천 여 병사 앞에서 단상에 오른 난다가 연설을 시작했다.
난다는 세틴에게서 선물받은 검은 오우거 갑옷을 장착하고 있었다.
갑옷 하나 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년 봄에 우리 제국군은 우살리드군 토벌을 시작한다.
우리 사령관님께서 전투에 임함에 있어 가장 중시하는 게 무엇이지 ?
여러분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바로 정찰과 보급이다.
우리 동부 가도 정비단은 우살리드 토벌에 필요한 정찰과 보급을 위한 초석을 쌓는 임무를 맡았다.
앞장 서서 나아가 머리를 처박는 것이 선봉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이 전쟁의 선봉이라는 말이다.
내가 여자라고 깔봐도 좋고, 개판을 쳐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지 ?
난 내가 맡은 임무에 차질이 생기는 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임무, 역할을 소홀히 해서 시간이 지체되거나, 대충 눈가림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놈이 있다면 쓴맛을 톡톡히 보게 될 것이다.
사령관님으로부터 재가 받은 세 가지 규칙을 발표하겠다.
1. 어떤 경우에도 민폐는 용납하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발생한 민폐는 확실하게 보상하도록 한다.
민폐 사안은 반드시 내게 보고할 것.
1. 현재 역참을 지키고 있거나, 역참에서 근무했던 자들을 우대할 것.
대우를 잘 해줘서 정비에 대한 협조를 이끌어내고 가능하면 계속 역할을 수행토록 할 것.
1. 첩자나 염탐꾼들을 철저히 경계할 것.
첩자 색출에 만전을 기하고, 우리가 하는 가도 정비와, 병참 구축에 대한 정보가 적에게 새어나가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철저히 할 것.
이 세 가지를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기에 이번 우리 임무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가지 사안에 대한 위반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기존 군율에서 두 배 이상의 가혹한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이상.”
난다가 말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기도 전에 베른이 풀쩍 뛰어서 단상에 올랐다.
그림같이 날렵한 동작이었다.
난다가 ‘이건 뭐지?’ 하는 표정으로 베른을 쳐다보았으나, 베른은 그것을 보았는지 아닌지 도열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정비단의 경비대장 베른 도일 자작이다.”
베른이 자기 소개만 하고 다시 병사들을 위압적인 시선으로 쭉 둘러보았다.
이때, 난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야, 넌 뭐냐 ?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길 올라왔어 ?
내가 불렀니 ?”
베른은 난다가 이렇게 거칠게 나올지 몰랐는지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바로 표정을 수습하고 어깨를 펴며 말했다.
“경비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병사들에게 할 말이 있어 올라왔소.
뭐가 잘못 되었소 ?”
난다가 코웃음을 쳤다.
“뭐가 잘못 되었소 ?
너, 이 새끼.
당장 기어 내려 가.
제국군을 뭘로 보고 임무 시작도 전부터 하극상이야 ?
뭣들 하고 있어 ?
당장 이 새끼 끌어 내려.”
난다가 자신의 호위를 위해 친위대에서 파견 나온 병사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베른의 양팔을 꺾고 단상에서 끌어 내려 무릎을 꿇렸다.
베른은 저항할 능력이 없지는 않았으나, 여기서 더 일을 키웠다가는 무사히 넘어갈 수 없음을 직감했는지 순순히 끌려 내려왔다.
“내가 가도 정비단의 단장이기 전에 황제 폐하께서 임명한 제국군의 5급 장군이다.
베른, 넌 아직 정식으로 부장 직위도 받지 못한 주제에 나한테 기어 올라 ?
당장 모가지를 꺾어 버리고 싶지만, 기회를 한 번 주겠다.
지금부터 내가 미리 하달한 경비대의 임무를 읊어 봐.
하나라도 틀리거나 누락된 게 있으면 곤장 스무대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베른이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난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꼴이 우습다는 자괴감도 있었고, 난다가 내린 임무도 대충 훑어 봤을 뿐이라 제대로 암송할 자신도 없었다.
난다가 베른의 두 가지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지만, 일단 앞부분은 넘어가 주었다.
“명색이 정비단의 서열 3 위라는 자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도 숙지하지 못했으면서 감히 병사들 앞에서 위세를 떨려고 들어 ?
당장 쫓아버리고 싶지만 사령관님께서 널 귀엽게 봐주시는 것 같으니 기회는 주마.
베른, 넌 나한테 완전 찍혔어.
제국군에서 작위를 내세우는 걸 금지한 걸 모르나 ?
작위도 동생한테 넘기고 왔다면서 자작이라고 사칭까지 했지 ?
앞으로 제국군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처신 똑바로 해.
이 시간 부로 정비단의 모든 병사들에게 명한다.
베른이 허튼 짓을 하거나, 임무를 허술히 하거나, 군율을 어기거나, 이유없이 병사를 학대하거나, 부당한 명령을 내리면 내게 직보할 권한을 준다.
거짓으로 누명을 씌운 게 아니라면 절대로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
베른 넌 곤장 스무 대의 처벌을 받고, 내가 하달한 경비대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계획서를 작성해서 날 찾아 와.
계획서마저 허술하면 알지 ?
임무에서 즉각 배제할 것이다.”
제국군에서 곤장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반인이라면 스무 대가 아니라 열 대만 맞아도 죽거나 불구가 되고 남을만큼 가혹한 체벌이었다.
하지만 만 명에 하나나 있을까 말까 한 강골인 베른에게 곤장 스무 대는 별 게 아니었다.
하지만 베른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사실 베른은 꽤나 고무된 상황이었다.
세틴과의 대련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제국군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결단식을 앞두고 세틴이 단독 면담을 통해 특별히 격려해주기도 했다.
베른은 동부 가도 정비단의 실세가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역참장 출신이라는 잘낫은 말할 것도 없고 단장을 맡은 난다는 행정이나 하는 사람인 데다 심지어 세틴의 시녀 출신 여자였다.
세틴이 자신을 불러 특별히 당부까지 했으니 정비단의 임무를 자신에게 맡긴 것으로 착각했고, 난다와 잘낫은 첫 임무에 나서는 자신을 위해 붙여준 사람들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난다의 불호령에 얼떨결에 끌려 나와 곤장까지 맞았으니, 상처난 체면과 자존심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든 정비단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세틴을 만나 주도권을 확인받는 방법은 일단 제외했다.
이런 일 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틴에게 의존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었다.
그러니 베른이 생각해 낸 방법은 난다를 확실하게 제압하는 것밖에 없었다.
계급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난다가 여자라는 약점을 공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난다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베른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베른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난다를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난다가 내린 명령을 제대로 이행해야 했다.
난다가 내려보낸 문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 본 베른은 다시 한 번 분노를 삭여야 했다.
전도 5 천 미르 정찰, 행군 시 경계, 주둔 시 경비, 야영지 물색 및 사전 정비, 공정 협력, 단장 보좌 및 호위, 기타 단장이 내리는 잡무 처리가 주요 임무로 명시되어 있었다.
베른은 일단 최선을 다해 계획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계획서를 작성하다 보니 자신이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지에서부터 소규모 군사작전을 수없이 해보았다곤 해도 소규모 작전이었고, 그조차 대부분 휘하의 기사들에게 일임하다시피 해온 일이었다.
베른 자신이 경계, 경비, 야영 준비 등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거대한 제국군의 체계에 대해 이해조차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또한 가도 정비라는 특수 임무를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베른의 장점이라면 어떤 일이든 자신있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일단 나름대로 꼼꼼하게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밤 늦은 시간에 난다의 집무실을 찾았다.
베른이 난다에게 곤죽이 되도록 욕을 먹고 자존감이 바닥을 기다 못해 땅굴을 파고 들 때까지 깨진 것은 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신기한 일은 그렇게 얼굴이 붉어지고 당장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밟히는 와중에도 난다가 항목별로 숙지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인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운용할지, 시간 계획을 어떻게 짜야 할지 등에 대해 정리해주는 내용이 머리 속에 착착 박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난다가 내뱉은 욕설이 물이라면 익사하고 남았을 것이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비아냥이 매질이라면 맞아 죽었을 것이고, 자존심을 긁어대는 무시와 천대에 ‘내가 사람이기는 한가’하는 생각이 들 때 쯤 난다가 물었다.
“계획서 다시 작성해 올 수 있겠나 ?”
베른은 한 순간이라도 빨리 일단 도망치고 싶었다.
“네, 오늘 밤을 세워서라도 작성하겠습니다.”
난다가 말했다.
“안 자고 기다리겠다.
나까지 잠 한 숨 못자게 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이만 가 보도록!”
머리가 멍하고 온몸에 기운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채 서둘러 빠져나온 베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계획서를 제대로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베른은 비로소 난다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잘나 봐야 얼마나’라든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남성적인 매력’이라든가, ‘군인은 뭐니 뭐니 해도 전투력’ 같은 개념들은 더 이상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와 감정적인 요인까지 고려한 세부적인 업무 지침, 시간과 비용의 효율적인 배분, 타 부대와의 연계, 명령 체계의 원할한 흐름, 구체적인 항목들의 우선 순위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가운데 나오는 난다의 지적에 베른은 한 마디도 반발하거나 덧붙일 말을 찾지 못했다.
베른은 전투를 수없이 경험한 노장의 강의를 며칠 동안 들은 것보다 난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고 느꼈다.
끝도 없이 떨어지는 말 폭탄에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베른에게는 난다에 대한 경외심이 저절로 싹텄다.
또한 이는 난다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군인이자,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여자’라는 존재로 각인되고 말았다.
단 하루 동안의 경험으로 베른은 난다의 완전한 ‘포로’가 된 셈이었다.
이는 어쩌면 베른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자존심과 승부욕과 과시욕으로 인생을 망치게 되는가.
누구 못지 않게 탁월한 재능과 지능을 갖춘 베른에게 확실한 제동장치가 장착된 셈이었다.
확실히 베른의 재능과 이해력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난다에게 지적받은 사항들을 참조해서 다시 작성한 계획서에 대해 난다는 이런 평을 내렸다.
“이제 조금 봐줄 만은 하군.
하지만 경이 이런 일에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봐줄 만 하다고 하는 거야.
내 밑에 부장급 누구한테 하라고 해도 이보다 열 배는 잘 작성할 거라고.
그리고 낮에 내가 내린 명령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거야.
정비단 전체가 경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고 생각해.
잘났다고 한 번이라도 날뛰다가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작전에 나선 부대의 수장에게는 수하에 대한 즉참권이 있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도록!”
베른의 얼굴에 불만의 기색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난다의 얼굴을 몇 차례나 훔쳐보며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하고서야 자리를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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