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트 대공령
브라스트 공국에서 영지를 가진 백작이 여섯이 전부는 아니나, ‘6 백작령’으로 불리는 지역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과거 사울 브라스트가 제국의 변경 백작에서 대공으로 도약한 계기가 바로 지금의 6 백작령으로 불리는 지역의 폴린 왕국을 무너뜨린 전쟁이었다.
폴린 왕국은 비옥한 곡창지대와 광산들을 보유한 강국이었다. 소왕국이기는 해도 높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이고, 바다와 넓은 호수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이 되는, 섬이나 마찬가지인 지역이었기에 오랜 역사를 지닌 독립국이었다.
제국의 큰 도움 없이 단독으로 폴린을 무너뜨린 사울의 위업은 제국의 역사에 당당히 기록될만큼 중요한 업적이었다. 당시의 황제도 사울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대공 작위와 독립국이나 다를 바 없는 폭넓은 자치권을 주었다.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누구나 주저없이 브라스트 공국이라 칭하는 이유였다.
영지 운영에는 별 욕심도 없고 자신도 없었던 사울은 자신의 가신들에게 백작의 작위를 주고 폴린 왕국의 점령지들을 나누어 주었다. ‘전투의 신’이라 추앙받는 사울은 정치적인 역향까지 뛰어나지는 않았는지 점령지를 나누는 논공행상이 두고두고 잡음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전공이 가장 큰 가신이었던 나바니아를 제끼고, 사울의 형인 사무엘이 알토란 같은 폴린의 곡창지대를 독차지한 일이었다. 가족애가 남달랐던 사울은 자신의 형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의 발호를 수용하고 말았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나바니아와 브라스틴의 끝없는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
공국의 수도인 프라움은 대공 직할령에서도 제국 쪽에 치우친 위치였다.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브라스트 지역은 변방의 산간 벽지였다. 산길을 따라 하루 정도를 올라 마주하게 되는 분지에 프라움은 자리하고 있었다.
대공령 전체가 거대한 산맥을 따라 형성된 산간 분지들인지라, 순행 사절단의 행로는 대공령 전체를 가로지르게 되어 있었다.
제국력 1043년 1월 15일에 출발한 순행 사절단의 행렬은 하루나 이틀 걸러 한 번씩 만나게 되는 영주성 세 곳을 지나 6 백작령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호수 ‘그린 드래곤’에 6일 후 도착하도록 일정이 정해졌다.
사절단을 하루 재우고 접대하는 데만 해도 영주들의 살림이 거덜날 지경인 줄 아는 올란드 후작은 숙식을 예외없이 자체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6 백작령을 지원하기 위해 대공령 자체에서 차출한 물자만 해도 허리가 휠 영주들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줄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대공 직할령의 영주들은 말이 영주지 대공이 파견한 지역 관리자에 가까웠다. 험준한 산악 지방의 영지들의 살림이 궁색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프라움에서 출발한 첫 날, 사절단은 라인 자작의 영주성 부근의 초지에 야영지를 차렸다. 잡일을 돕는 하인들까지 해서 백 명을 훌쩍 넘기는 인원인지라 제법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야영 첫날이라 천막의 배치부터 저녁 식사 준비, 경비 인력 배치 등으로 한 동안 시끌벅적했다.
사절단이 도착하자마자 찾아온 라인 자작은 모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사절단 전체가 영주성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면 사절단의 수뇌부 만이라도 모시고 싶다 했고, 그것도 어려우면 정, 부사와 흑룡기사단장, 슈타인 남작, 13 공자의 저녁 식사만이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라인 자작, 성의는 고마우나 절대 안 될 말이네. 내가 미리 내려보낸 방침은 어디 갖다 버렸소 ? 순행 첫날부터 정한 규칙을 무시하면 당신은 그렇다 해도 다음 방문할 영지들에서는 어쩌란 말이요. 라인이 수도로 통하는 관문이라서 형편이 좀 낫기는 하겠지만,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구호 분담금이나 좀 내줬으면 더 좋았을 걸......”
올란드 후작의 칼같은 거절에 무색해진 라인 자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미 준비하고 있는 저녁 식사 만이라도 어떻게......”
“됐네. 자작네 식구들도 요즘 식사가 부실할 테니 알아서 하시오. 13 공자를 비롯해서 몇 분에게 얼굴 도장이라도 찍고 싶은 마음을 내 충분히 이해하니 천막이 준비 되는대로 그분들 모시고 차나 한 잔 하고 돌아가시오.”
제일 먼저 정, 부사의 숙소와 회의 공간까지 갖춘 천막과 세틴이 머물 천막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직위와 역할에 따라 적절히 작은 천막들이 배치될 예정이었다. 세틴은 자기가 머물 천막을 제대로 구경도 하기 전에 모셔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조지프 라인 자작이옵니다.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임무를 맡으신 다섯 분께 인사 올립니다. 마땅히 제가 편안하게 모셔야 함에도 첫날부터 이렇게 야영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부디 무사히, 성공적으로 순행을 마치시길 기원합니다.”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인사말을 들으며, 세틴은 ‘기름장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보통 능력과 처신으로는 대공령의 관문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었다.
율리가 일일이 일행을 소개했다.
“여기는 재무부 참사, 발탄 남작이오. 아주 촉망받는 젊은이지. 그리고 유명한 흑룡기사단장 셔틀리 만자, 그리고 매트 슈타인 남작. 마지막으로 여기 잘생긴 젊은이가 바로 당대 최연소로 아카데미를 마치신 13 공자시오.”
“모두 반갑습니다. 특히 13 공자께서는 남다른 기백을 지니셨으니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귀하신 몸으로 어려운 길을 마다 않으시나 혹여라도 옥체를 상하시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서는군요.”
율리가 그대로 두면 끝이 없을 사설을 잘랐다.
“라인 자작이 사절단을 융숭히 대접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제가 거절했습니다. 오늘은 야영 첫날이니 13 공자 만큼은 예외를 인정하여 자작성에 들어가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조지프가 반색을 했다.
“13 공자님. 그러시지요. 저에게 공자님을 모시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틴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닐 될 말입니다. 사절단에서 명분으로야 제가 윗사람이지만, 정사를 비롯한 네 분께서 나랏일에게 가진 비중에 저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대공께서도 모든 일에 정사인 후작의 뜻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첫날부터 단 한 번의 ‘예외’에 기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세틴이 율리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스승님. 저는 스승님께 하만 제국의 역사와 브라스트 가문의 역사를 배운 학생입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수업을 빼먹은 적이 없으시고, 브라스트가의 철부지들을 한 명씩 앉혀놓고 깨우쳐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제자는 그 명에는 따르기 어렵습니다.”
율리는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세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3 공자께서 이리도 바른 모습을 보여주시니 저도 아카데미에 나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재들과 씨름한 보람을 느낍니다. 라인 자작 이만 하면 그대의 성의는 모두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테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의논해야 할 사절단의 일이 산더미라오.”
라인 자작이 아무리 간이 커도 사절단의 일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아쉬운 기색이 가득하면서도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사절단의 수뇌부랄 수 있는 5인이 따로 회합을 갖는 것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국의 업무체계로 따지자면 사실 사절단의 임무는 내무대신이 맡아야 마땅하오. 하지만 건강이 나보다 더 나빠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떠맡게 되었오. 이번 일은 무엇보다 모두 무사하게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석 달 동안 숱하게 험한 일을 겪게 될 것이오. 일이 어그러지려면 항상 작은 일에서 시작하는 법이오. 추운 겨울에 길을 나섰으니 하인들과 말단 병사들의 건강부터 챙겨야 합니다. 그들이 안녕해야 우리가 안녕할 수 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어도 안되지만, 이말 한 마디는 꼭 덧붙이지 않을 수 없소. 대공과 대공비 전하께서 내게 제삼 제사 13 공자의 안위를 당부하셨소. 공자께서 자중자애 하심은 물론이고 모두들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오.”
올란드 후작의 꼼꼼하고 세심하고 깐깐한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그의 장광설에 질릴 만도 했으나, 모두 경청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공식적이지는 않더라도 공국의 ‘제 일 대신’으로 불리는 율리 올란드의 완벽한 일처리에서 세틴은 몇 달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운다고 생각했다.
‘첫 날이니 간단하게 이 정도 하고 자기 식솔들 단도리를 하라’는 율리의 말을 끝으로 정사의 천막을 나온 세틴은 곧바로 저스틴 브라스트를 찾았다.
별도의 수행원도 없이 따라 나선 저스틴은 기사단의 막사에 짐을 풀고 있었다. 천막이 클수록 짐은 몇 배로 늘어나는지라 정사와, 13 공자의 천막 외에는 모두 작은 천막이었고, 흑룡기사단은 단장만 혼자 천막을 쓰고, 기사들은 두 명씩 배정되어 있었다.
“저스틴 형, 수발들 사람이라도 한 둘 데려 오지 이게 웬 고생이에요.”
예고도 없이 세틴이 들어가자 비좁은 천막에서 막 짐정리를 마치고 쉬려던 저스틴과 다른 기사는 황급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고생은 무슨. 대공가에서 공자도 못된 아들은 사람 취급을 못받는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닌 걸.”
세틴까지 들어서자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천막이 꽉 찬 느낌이었다.
“같이 있는 기사 분에게도 실례인 듯하니 제 천막으로 가서 얘기 좀 해요.”
사실 세틴이 사람을 시켜 부르지 않고 직접 자신을 찾은 것 민으로도 저스틴의 체면을 많이 생각해 준 셈이었다.
멀린의 얘기가 아니라 스스로 ‘내논 자식’을 자처하는 저스틴은 검에 미친 사람이었다. 어쩌다 멀린의 하룻밤을 위한 제물이 된 하녀를 어머니로 둔 그였기에 자신에게 ‘꽃피는 봄날’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일찌감치 저버리고 검술에만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대공의 여인들과 달리 ‘대공 부인’이라는 명분도 얻지 못하고 여전히 하녀 일을 하는 어머니를 보며, 대공의 자식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혜택조차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틴과 저스틴은 늦은 저녁을 함께 하면서 형제같지 않은 형제의 거리감을 서로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이 내 첫 번째 검술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난 잊지 않았어. 검술에 대한 재능을 따지자면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형이야. 일거리도 구하지 않고 검술만 파고드는 사람이니 이제 물이 오를대로 올랐을 거 같은데 ?”
“난 13 공자에게 형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대공께서 날 보내면서 뭐라고 하신 줄 알아 ? ‘세틴이 위급한 상황이 오면 네가 대신 죽어라’ 그러시더군. 사절단을 따라 나서라 할 때, 애초에 나같은 사람한테 무슨 큰 기회가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에게 할 소리야 ?”
“대공이 그러시는 게 어제 오늘도 아니고, 난 열 세 공자들 누구보다 형을 듬직한 형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번 순행에서 ‘대공가의 용감한 두 형제’라는 명성을 떨칠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같이 합심해서 잘 해 보자고. 이번 기회에 오랜만에 내 검술도 좀 봐주면 좋고. 새로 들인 내 식구들이 하나같이 쌈박질이라면 손사래치며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야. 그들에게도 검술 선생 노릇을 좀 해주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저스틴은 검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인 것을 세틴은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스틴은 벌써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용감한 두 형제’라는 말도 저스틴을 울컥하게 하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은 표현이었다.
“검법 수련이라면 내가 마다 할 이유가 없지. 후작께서도 틈나는대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며 권장하시니. 흑룡기사들과 대련이라도 하게 ?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 고참 병사들이라면 몰라도.”
“가능할 걸 ? 익스퍼트 상급이 아니면 아예 입단도 할 수 없는 흑룡기사들을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우리 쪽도 만만치는 않아. 특히 내 시녀들의 합격술이 일품이야. 2 대 1이라면 아무리 흑룡기사라도 애 좀 먹을 거야. 제대로 맞설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니 형이 우리 편으로 오면 우리가 일곱. 내일부터라도 형이 주선을 해서 자리를 만들어 보세요. 병사들 사기를 올리는 데도 그만일 거 같은데.”
굳이 자기가 나서서 기사단장과 얘기를 하지 않고 저스틴이 주관해서 일을 꾸며보라는 것도 세틴의 배려였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저스틴의 마음은 이미 많이 풀리고 있었다.
“좋아. 내가 만자 단장에게 건의해 볼게. 대쪽같은 시녀장과 천방지축 시녀들의 싸움 실력을 볼 수 있다니 나도 기대가 무척 큰데 ? 우리 잘 나가는 13 공자가 이런 꾀주머니인 줄은 나도 미처 몰랐네.”
“형, 우리 둘 만 있을 때는 그냥 세틴이라고 불러요. 열 두어 살이나 많은 형에게 공대받는 게 나도 속이 편하지 않아.”
“그, 그래 세틴. 아무튼 잘 해 보자.”
“그리고 형한테 아우가 꼭 건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너무 검술만 파고들지 말고 병법 공부도 해두세요. 전란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해요.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요. 숱한 위기 속에서도 천 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제국이 지금 위험해요. 피할 수 없는 전란이라면 형같은 사람이 장군이 되어 앞장 서야지. 누가 있겠어요.”
얼마나 사실일 지는 모르나, 넌지시 앞날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해 주는 세틴이 저스틴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검술에 매진한 것이 끝없이 방황하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던 저스틴은 그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충고를 아끼지 않는 어린 동생이 고마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틴의 말이라면 내가 귀담아 들어야지. 이번 순행에서 기사단이 병사들을 통솔하는 것도 유심히 봐두도록 할게.”
저스틴을 위한 결정적 한 방은 헤어지면서 세틴이 내민 책 한 권이었다. ‘트라우스 전법’이라는 장수들의 필독서였다. 먼 길을 나서면서 책을 한 수레나 끌고 다닐 수는 없을 터이니, 이는 분명 세틴이 미리 준비를 했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세틴 사단’에 또 한 사람이 합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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