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결전
세틴이 직접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추격 작전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10 만이 훨씬 넘는 대군의 행군은 제대로 통제를 한다 해도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그란데군은 부대의 체계부터 영지 단위로 편성되어 있고, 영주들이 직접 자신의 기사단과 병사들을 통솔하는 방식이었다.
세틴이 원래 주로 타격하고자 했던 부대는 모그란데의 정찰부대였으나, 연달아서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어떤 부대를 먼저 쳐야 할지를 선택하기도 힘들 만큼 다양한 목표물이 포착되었다.
한참 뒤처져서 미적거리고 있는 부대가 있는가 하면, 본대에서 이탈하여 옆으로 빠져나가 며칠 쉬겠다는 자세로 눌러앉은 부대도 있었고, 심지어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는데 열을 올리는 부대조차 있었다.
세틴의 일차 목표가 바로 약탈을 자행하고 다니느라 본대에서 뒤쳐진 부대였음은 물론이었다.
전원 기병으로 구성된 세틴의 추격대가 취하는 전술은 거의 비슷했다.
상대가 누구든 일단 조우하면 지휘관이나 전투에 적극성을 보이는 기사 몇몇을 될수록 잔인하고 신속하게 처단함으로써 적이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적극적으로 도망치는 자들은 굳이 뒤쫓지 않았고,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하는 자들의 처리는 후속부대에 맡기고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세틴이 그렇게 3 일 동안을 두들기고 다니자, 항복하거나 뿔뿔이 흩어진 부대가 모두 합해서 2만을 훌쩍 넘겼다.
정신없이 몰아치던 진군을 잠시 멈추고 전열을 제정비할 겸 간단한 군영을 꾸렸을 때, 고진이 새로운 보고를 들고 나타났다.
고진의 목소리에는 의아한 기색이 다분했다.
“여기서 이틀 거리에 마우니 평원이라는 곡창지대가 있습니다.
모그란데군이 그곳에 눌러 앉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 정찰 부대가 모은 정보들을 종합하면, 모그란데는 자군드라 강에 도달하기 직전에 마지막 큰 산인 설루인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모그란데가 설루인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설루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마우니 평원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거기 눌러앉을 태세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마 평원에서 우리와 결전을 벌여 보겠다는 것일까요 ?”
고진의 보고를 들은 세틴이 신중하게 생각을 가다듬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모그란데군이 보여왔던 모습을 생각하면 마우니 평원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합니다.
그들에게서 모종의 변화나 획기적인 결정이 있었을 듯하군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계속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에서 행군을 멈출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모그란데 휘하에 군략을 좀 아는 자가 있나 보군요.
지금까지 당한 것처럼 속절없이 밀리다가는 모그란데가 자군드라 강을 건너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전군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평원에 또아리를 틀었다는 사실은 이대로 밀릴 수는 없다는 점과 나름 병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대군이라는 점을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그란데가 후퇴를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면 우리도 며칠 말미를 두고 지켜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포로 처리를 비롯해서 정비해야 할 것도 많고, 우리 부대의 체계도 재구성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방침을 정하고 계속 정찰을 강화해 주세요.
모그란데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고진이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일단 군영이 구축되고 나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의 제국군은 우살리드를 주된 상대로 상정하고 궁병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상태였다.
이제 모그란데의 대군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면 전군을 재편성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사실 그동안 주력해서 훈련해왔던 봉시진은 우살리드가 아닌 다른 군대를 상대하는 데에도 유용한 면이 많았기에 5 천 명 단위로 구성된 열 개의 대봉시진은 일단 유지하기로 했다.
다만 각 봉시진 내에서 궁병으로 재편했던 병사 중에서 원래 궁병이 주 병과가 아니었던 보병들은 모두 방패병, 장창병, 돌격병 등의 주종으로 되돌아 가도록 했다.
또한 이제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 갑옷 안에 받쳐 입었던 두툼한 갬비슨이 부담스러워지는 시기였기에 좀 더 가벼운 것으로 갈아입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부대 재정비와 포로 처리 등으로 분주하게 사흘이 흘러갔다.
고진으로부터 모그란데군의 움직임에 대한 상세한 정보들이 취합되었다는 보고에 세틴은 곧장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먼저 고진의 보고가 있었다.
“며칠 전에 모그란데군이 마우니 평원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사령관님께 드렸습니다.
이후에도 속속 모그란데 휘하의 부대들이 집결해서 이제는 거의 모든 부대가 집결을 마쳤다고 보입니다.
사령관님께서는 모그란데가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셨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지금 모그란데군은 5 만의 동부왕국군을 합쳐도 10 만을 겨우 넘길 정도로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북부군은 기중 정예병들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므로 규모 자체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꾸준히 펼쳐왔던 심리전이 효과를 발휘하여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빠져 나가기도 했고, 지금까지 몇 번의 전투 과정에서 우리가 잡은 포로만 해도 2 만 5 천이 넘습니다.
지금 모그란데는 군대의 전체 규모에 비해서 그리 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밀집된 원형 진형을 구축해놓고 있습니다.
현재 주둔하고 있는 군영 자체가 하나의 전투 진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밀집 대형입니다.
따라서 모그란데는 제대로 완성시키지도 못한 설루인 산의 진지보다는 평원에서 방어에 유리한 방원진으로 우리를 상대하고자 한다고 판단됩니다.
군진의 주변으로는 간단한 나무 울타리와 녹각 정도를 배치했을 뿐, 제대로 진지를 구축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루인에 구축하고 있던 진지마저 완전히 포기하고 방치한 것으로 보아 마우니 평원에서 확실한 승부를 보고자 작심했다고 보입니다.
따라서 오늘 회의는 모그란데를 어떻게 공략할지에 대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회의입니다.”
세틴이 말을 이었다.
“상황은 비교적 분명해 보입니다.
자군드라 강 주변의 상황을 보아도 모그란데에게 별다른 증원군이 이른 시일 내에 추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우살리드는 이미 하랑가 고원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에게 확실하게 공지하지는 않았지만, 우살리드는 하랑가 고원을 넘어 북부를 공략하는 것으로 승부수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전략이었기에 저스틴 경과 상카 경이 이끄는 별동 부대를 이미 파견해서 우살리드에 대처하도록 했습니다.
그쪽의 상황은 이미 우리의 손을 벗어났기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내가 모그란데에 대한 공략을 서두르는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나는 모그란데를 자군드라 강 건너로 퇴각시키고 곧바로 북동부로 진격할 생각입니다.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넘고 북부 공략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북동부를 완전히 장악해서 돌아갈 곳이 없게 만들어 버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런 계획도 우리가 여기서 모그란데를 확실하게 공략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스틴의 별동부대가 하랑가 고원에서 우살리드의 발을 묶는 데에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모그란데를 박살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들 병서를 익히셨을 테니 방원진에 대해서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모그란데가 준비했다는 방원진을 어떻게 공략할지에 대해 의견들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 발언권을 놓치면 큰 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베른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방원진은 모든 방위에서 오는 공격을 방어하는데 유리하고, 필요에 따라 어느 방향이든 힘을 집중하기도 좋은 대표적인 방어진입니다.
적은 규모로 많은 병력의 포위에 맞서기에도 좋고, 병력이 우위에 있다면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임기응변의 대응도 가능하기 때문에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진형입니다만, 공격 진형으로 변화를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병력이 열세인 우리가 포위 공격을 하기는 어렵고, 일점 돌파로 한 순간에 진형을 깨부수는 전법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병법에 방원진은 겉은 단단하고 속은 유연하게 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모그란데군은 겉을 단단하게 꾸리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속을 유연하게 관리하기에는 유능한 장수들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제가 제안하고자 하는 전술은 속을 파고 들어서 휘휘 저어버리는 죽쑤기 전법입니다.
5 천 가량의 정예기마병으로 방원진이 안으로 진입하여 쉼없이 돌진하면서 진형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자는 것입니다.”
신이 나서 계속 발언을 이어나가려는 베른을 세틴이 손짓으로 제지하며 말했다.
“죽쑤기 전법이라는 이름이 재밌군요.
그게 어디 병서에 나오는 말입니까 ?”
베른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방금 즉석에서 생각해낸 이름입니다.
좀 촌스럽지요 ? 흐흐흐.”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촌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 재미있고 전술의 핵심을 잘 표현한 말입니다.
베른 경의 제안이 방원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으로 떠올렸던 전술과 신기할 정도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방원진으로 맞서는 적에게 굳이 외부에서 이런 저런 공격을 시도해봐야 적의 사기와 적응력만 높여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베른 경의 말처럼 죽을 쑬 때 휘휘 저어주듯 안쪽을 공략해야 한다는 점에서 저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
고진이 말했다.
“현재 모그란데군의 전력을 감안할 때, 충분히 승산이 있고 일거에 박살을 낼 수 있는 치명적인 전술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이 전술에는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만일 내부로 진입한 돌격대가 고립되어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실로 난감한 일입니다.
우리 정예병의 역량과 상대적으로 모그란데군의 전력을 비교하자면 승산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과연 누가 이 임무를 맡을 것인가입니다.
단순히 용맹이 넘치고 무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령관님께서 직접 나서겠다고 하신다면 이번만큼은 절대 반대입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고진 장군에게는 내가 아무 때나 무조건 제일 앞장을 서겠다고 나서는 사람으로 비친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에는 제가 나서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밖에서 대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니 나는 본진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처음 ‘죽쑤기 전법’을 주장했던 베른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친위대를 이끌고 있는 가우디 론과 배커 수들라만, 심지어 울브린까지 너도 나도 자신에게 이 임무를 맡겨 달라고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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