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
점차 행군 속도를 높인 세틴 일행은 8 일 만에 프라움에 도착했다. 프라움 주민 대부분이 거리로 나와 세틴을 환영해주고, 브라스트궁 앞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벌였으며, 멀린은 프라움 전체에서 3 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공식적인 행사가 마무리되자마자 세틴은 조스핀에게 단단히 붙들렸다. 조스핀은 자신의 침실에 침대 두 개를 더 들여 요리와 함께 세틴을 끼고 있었으며,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어디로 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못박았다.
세틴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조스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조스핀의 침실에서 만나야 했다.
조스핀과 요리는 세틴이 처음 황도로 향한 이후로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싶어 했으며, 특히 그 과정에서 만났던 모든 여인들과 연관된 이야기는 사소한 것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세틴과 함께 조스핀의 침실에 붙잡힌 바네사가 몇 차례나 추궁을 당한 일은 왜 아직까지 난다와 완다가 세틴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지였다.
세틴의 뜻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들을 세틴의 침상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시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무라는 질책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보다 못한 세틴이 바네사를 위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식적으로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머니, 바네사를 그만 괴롭히세요. 아무리 시녀장이라도 삼엄한 군중에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내가 여인을 끼고 잠자리에 든다는 소문이 돌았다면 그런 장군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장수나 병사가 어디 있겠어요 ?
대신에 난다와 완다는 다른 장수들조차 설설 기게 만드는 유능한 장수로 거듭났어요.”
조스핀의 눈초리가 여전히 매서웠다.
“흥. 누구를 바보로 아니 ? 일 년 반이 넘는 동안 싸움터에서만 있지는 않았잖아.
그리고 여자가 장수는 무슨 장수 ? 애초에 그 천둥벌거숭이들을 시녀로 들이는 게 아니었어.
내가 눈에 뭐가 씌어서 그런 애들을 들이자고 아쉬운 소리 해가며 매달렸는지......”
세틴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 난다와 완다가 없었으면 나는 이미 일에 파묻혀 죽었을 거에요. 십만에 달하는 군대의 보급, 기록, 포상 등 끝도 없이 많은 일들을 그들이 도맡아서 해주었어요.
그런 일들을 빈틈없이 처리해주니까 다른 장수들이 그녀들을 존중하고 두려워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능력을 썩히고 내 시중이나 드는 여인으로 붙잡아 둡니까 ?”
요리가 조스핀을 거들었다.
“다 좋은데 네가 낳은 손주 볼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도 좀 해주렴.
열 일곱이면 결혼하기에 적은 나이도 아니고, 이제 또 전쟁을 하러 나가야 한다며 ?
애초에 황도로 떠날 때 네가 뭐라고 했지 ? ‘제국 제일의 신랑감’ 어쩌구 하면서 어머니를 설득했잖아.
적당한 신부를 찾아 데려올 날만 기다린 어머니 생각도 해야지. 나도 마찬가지고.”
세틴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오로지 한 여인과 결혼할 생각입니다. 또한 제국이 안정되고 나면 일부일처제를 공표할 겁니다.
가문과 후계보다 사랑이 우선인 결혼이 정착되도록 할 거에요. 어머니나 누님이나 여인으로서 너무나 바라는 일 아닌가요 ?”
요리가 말했다.
“그런 너무 비현실적이고 꿈같이 얘기야. 넌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야.”
세틴이 요리의 말을 잘랐다.
“누님. 제가 무엇 때문에 주저없이 싸움터에 나서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우겠습니까 ?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살맛나는 세상을 살 수 없다면 저의 전쟁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나는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더 큰 힘, 더 넓은 땅을 가지려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여인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내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조스핀과 요리는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세틴이 더 이상 자신들이 싸고 돌아야 할 막내 아들, 막내 동생이 아니라는 현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나,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스핀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널 낳아준 애미의 눈물도 닦아주지 못하면서 세상 모든 여인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말을 하다니...... 그게 말이야 방구야 ?”
세틴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제 마음을 제대로 전할 방법이 없네요.
어머니와 누님이 모두 절 위해서 하시는 말씀인 줄 잘 압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셔야 해요.
저는 더 이상 대공가의 귀공자가 아닙니다. 수만 군사들의 목숨줄의 저의 한 생각, 한 마디에 왔다갔다 하지요.
지난 이 년 동안 수많은 목숨이 내 손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하느냐에 따라 제국의 모든 백성들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고,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위해 눈물 흘리지 마세요. 설사 제국의 한 모퉁이에서 힘을 다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잘 먹고 잘 싸고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다 가는 귀공자보다 보람있는 삶이 될 겁니다.”
몇 날 며칠을 주고 받은들 황녀로 태어나 대공가의 안주인으로 살아온 조스핀이 세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점에서 멀린도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터였다. 다만 다른 점은 멀린은 무조건 세틴을 지지하고 돕기로 작정했다는 사실이었다.
멀린은 귀족들의 특권을 모조리 폐지할 계획이라는 세틴의 말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브라스트 대공가를 위해 평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누구보다 모범적인 귀족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식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6백작령에 닥친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어도 결국에는 반란을 피할 수 없었다.
프라움에 머문지 열흘 후, 세틴은 예정대로 새로운 도정에 올랐다. 세틴의 얘기에 충격을 받은 조스핀은 그를 붙들지 않았다.
브라스트에서 추린 2500 여 병사와 세 검가에서 추천한 백여 명의 검사들, 저스틴을 비롯해서 새롭게 합류한 장수들이 세틴과 함께 했다.
출발에 앞서 세틴을 부른 멀린이 세틴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아들아, 내 마음 속에 너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하구나. 하지만 나는 끝까지 너를 믿고 지지하고 온 힘을 다해 지원할 것이야.
비록 늙고 힘 빠진 부모지만 언제든지 돌아와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네 어미는 내가 잘 다독이마. 조스핀에게 보이는 세상은 밤톨 만한 세상이니 어쩌겠니 ?
모든 것을 알아서 판단하고 잘 해내리라 믿지만 이 말 한 마디는 꼭 하고 싶다.
제국의 귀족들을 결코 만만히 보지 말거라. 천년 제국이 귀족들의 손에 이끌여 왔어.
산골 한 귀퉁이의 남작이라도 나름의 역사와 전통이 있고, 자부심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영지민들과의 끈끈한 유대와 믿음이 있어.
네가 귀족들을 모두 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내가 한 평생을 노력했어도 귀족으로서의 삶에 회한이 가득하다. 다른 귀족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그들에게서 뺐는 것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해 더 큰 희망을 보여주어야 해.
달라진 놀란 백작을 보면 어느 정도 길을 찾은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만, 제국이 큰 만큼 귀족들의 개성도 다양하지.
네가 그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가능하면 대화하면서 함께 살 길을 찾아 나가면 좋겠다.”
세틴이 멀린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거슬린다고 목을 쳐대는 살인귀나 일단 힘으로 눌러놓고 복종을 강요하는 망나니는 아니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훨씬 현명한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있어요.
자주 연락드리겠지만 부탁드릴 일이 더 많을 거에요. 제가 브라스트 대공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황도로 가게 되면 더 이상 모그란데가 아버지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에요. 저를 직접 상대하기에도 벅차게 만들 거니까요.
부디 건강하세요. 제가 손주를 안겨드릴 때까지는 늙으시는 것도 안됩니다. 하하하.”
배웅을 나온 조스핀은 세틴을 부둥켜 안고 한참 동안 울기만 할 뿐 결국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세틴도 말없이 등을 두드려 줄 뿐이었다.
세틴 일행은 불과 삼 일 만에 시건 백작령에 새로 설치한 본영에 도착했다.
프라움에서 고갯길을 내려오는 데 하루, 가도를 따라 동쪽으로 하루, 가도를 벗어나 남쪽으로 하루 지점에 본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건 백작성은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2, 3일 내려간 곳이었다.
시건 본영에는 일반 군영과는 크게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거대한 의료 시설과 무구를 만드는 작업장이었다.
세틴은 황도로 가서 제국군 사령관이 되더라도 제 2의 거점을 별도로 둘 생각이었다. 경우에 따라 본진이 될 수도 있는 거점으로 시건을 선택한 것이었다.
시건 군영은 돌로 만든 성곽까지 갖춘 요새로 발전시킬 예정이었다. 이곳이 브라스트와 에메랄드 호수, 제국 북서부, 황도로 연결되는 요충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브라스트가 제국 중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프라움에서 새롭게 합류한 브라스트의 병력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파이트 노스롭이 새롭게 마련한 검증 기준을 통과해야만 세틴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세 가지 달리기, 씨름, 바윗돌 나르기, 장애물 통과, 대련 등 십 수 가지 검증 시험에서 탈락한 30 여 명은 짐을 싸서 다시 프라움으로 돌아가야 했다.
저스틴과 울브린이 꼼꼼하게 점검하고 선발한 인원이었음에도 탈락자들이 나오자 브라스트의 병사들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건 본영이 향후 군사 요새를 넘어서 중심 도시로 발전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세틴은 돌아오자마자 군영 곳곳을 세심하게 들여다 본 것은 물론, 주변의 지형과 식생까지 살폈다.
그렇게 3 일을 보내고 나서야 세틴이 전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세틴군 본대 뿐 아니라 남서부와 노스롭의 총독, 에메랄드 호변의 주요 영주들까지 참여한 회의였다.
백 명이 넘는 지휘관들이 시건 본영의 회의장에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대부분의 장수와 영주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세틴의 선언이 발표되었다.
“브라스트에서 반란을 획책하고, 노스롭의 반란세력과의 연계까지 시도한 모그란데를 반역자로 지목하여 척결할 명분은 충분합니다.
우리가 이대로 황도로 진격하여 모그란데를 공격한다면 갈리온 후작과 우살리드 백작을 비롯한 많은 유력자들의 지지를 얻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 번 더 모그란데의 손을 잡겠습니다.
조정과 황실이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그란데를 치는 것도 좋지만 그러자면 명분상 조정과 황실에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모그란데가 황제 폐하와 황자들을 인질로 삼는다면 우리는 제국 황실의 완전한 몰락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면 모그란데가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군의 주력인 제국군 소속 장수들과 대다수 병사들의 가족이 황도에 있습니다. 그들 또한 모그란데의 인질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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