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부인은 어렵다
세틴의 말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은 세키 하푼이었다.
그는 호아니와 함께 오랫 동안 군사부에서 손발을 맞춰오면서 세틴과 호아니가 그리고 있는 변화된 세상에 대해 주워들은 말이 많았다.
“사령관님께서는 놀란 경이 맡고 있는 군상 체계를 곧바로 북동부까지 도입하실 생각입니까 ?”
세틴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벤 항구를 장악하고 어느 정도 정비가 되는 즉시 놀란 경에게 무역 항로를 열도록 이미 지시해 두었습니다.
세벤 항구가 열리면 북동부도 바로 제국의 거의 전지역과 교역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군상 체계는 이미 제국을 크게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교역이 큰 규모로, 상시적으로, 체계적으로 지속되는 것만으로 백성들의 삶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큰 돈을 번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나오고, 일반 백성들도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요.
이런 변화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큰 희망과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놀란 경이 직접 이쪽으로 올 것이니 그에게 자세한 얘기를 듣도록 하세요.
나는 그것을 북동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활용할 생각입니다.
당장은 엉뚱한 마음을 먹고 큰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방지하는데 주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아난을 심하게 다루려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아난은 겉으로 화평을 추구하는 척 하면서 뒤로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 북동부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거든요.”
사실 밤을 세워 얘기를 한다 해도 세틴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을 이들에게 정확하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웠다.
지구의 현대 사회에 살았고 근대 이후의 세계적인 발전 역사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춘 세틴의 생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중에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조금씩 알아갈 문제였다.
다음날, 숄키닌 저택에 들이닥친 제국군이 저택을 완전히 봉쇄하고 주요 인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감금하였다.
세틴은 일부러 이런 계획을 선봉대에는 통보조차 하지 않았고, 본진이 도착하자마자 직접 모든 일을 수행했다.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작전에 아난 쪽에서는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모조리 진압되었다.
실제로 아난은 세틴에게 제공할 막대한 선물을 마련해놓고 있었고, 화려하고 풍족한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주요 인사들이 각기 독방에 감금되어 차례로 심문이 시작되었지만, 아난 숄키닌은 깜깜한 지하실에 홀로 갖혀 물과 음식도 전혀 제공받지 못하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대꾸하는 사람조차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렇게 일 년 같은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병사들이 아난을 굵은 밧줄로 꽁꽁 싸매어 들고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듯 초췌해진 아난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젊고 잘생긴 청년 장수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틴이 지시를 내렸다.
“여봐라, 우선 물이라도 한 잔 마시게 해 드려라.”
병사 하나가 물 그릇을 들고 와서 아난의 입에 대어 주었다.
하지만 아난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물그릇을 쳐내고 말았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마를대로 마른 그의 입에서는 끄윽 끄억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세틴이 말했다.
“나를 만나 보고 싶어 한다더니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려.
내가 바로 제국군 사령관 세틴 브라스트요.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면 다시 온 곳으로 보내 주겠소.
여봐라, 끌고 가서 다시 가둬.
그리고 역시 물도 음식도 절대 주지 말고 내일 이 시간까지 저 자가 무슨 짓을 하든 관심조차 주지 말고 가둬두어라.”
병사들이 아난을 끌고 가려 다가가자 아난이 몇 번이나 급하게 침을 삼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어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세틴이 병사들을 손짓으로 제지하며 직접 물그릇을 들고 아난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아난도 거부하지 않았다.
세틴이 입술부터 조금씩 적시게 하고, 물을 천천히 몇 모금 마시게 하자, 잠시 후 아난이 입을 열었다.
“들은 것과 달리 사령관은 참 모진 사람이구려.
어찌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건만, 전장에서 맞서 싸우던 장수라 해도 이런 대접을 하지는 않을 것이오.”
세틴이 대답도 하지 않고 아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아난의 표정을 살피던 세틴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진 사람이라는 평이 아마 맞을 것이오.
사람이 모질지 않다면 어찌 수십 명에 달하는 장수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며, 수천, 수만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전투를 명할 수 있겠소.
그래요, 나는 모진 사람입니다.
내 병사와 백성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지킬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고 적을 무찌를 수 있다면, 어떤 모진 짓이라도 할 수 있지요.
당신이 내게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당신이 내 병사들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 줄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오.
내 생각이 틀렸소 ?
틀렸다면 어디 말해 보시오.”
아난은 세틴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에 당장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나 어쨌든 말을 해보기는 해야 했다.
“내가 많은 선물을 마련하고 정성껏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 것 아니오.
그런 것들이 어찌 당신의 병사들에게 피해를 준단 말이오.”
세틴이 웃었다.
“내가 한 조치들을 겪어 보았으니, 내가 그리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그걸 변명이라고 합니까 ?
당신의 부하들 중에 독살에 대해, 무희들의 기습에 대해, 병사들에게 제공될 설사약에 대해, 내게 어떤 길을 권한 것인지에 대해 상의하고 준비한 것들을 실토한 자가 하나도 없을 거라 믿소 ?”
아난의 낯이 흑빛이 되었다.
대꾸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차라리 그만 죽여 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세틴이 다시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왜 자비롭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알게 해드리겠소.
나는 아난 당신을 비롯해서 음모에 가담했던 수하들을 하나도 죽이지도 않을 것이고, 따로 벌을 주지도 않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뒤에서 일을 꾸미도록 방치할 수는 없소.
그건 자비로운 게 아니라 멍청한 짓이지.
내가 굳이 시간을 쪼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요.
쓸데 없는 자존심으로 당신 주변 사람들만 괴롭게 만들 일을 더 이상 할 생각도 마시오.
그렇다고 당신이 내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아오.
그래서 당신만큼은 황도로 압송해서 처분을 받게 할 생각이오.
여기서 당신의 머리를 쳐버리면 제일 깔끔하겠지만, 나도 내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은 사람이라서 말이오.”
아난이 처량한 표정으로 하소연을 했다.
“사령관, 내 마지막 부탁이니 제발 여기서 죽여 주시오.”
아난이 뭐라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세틴의 의해 막혔다.
“안 됩니다.
내가 당신을 죽여 주면 또 그 원한으로 무슨 일을 꾸밀 자들이 얼마나 많겠소.
그러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의미도 없이 희생당할지 모르오.
그러니 당신 가족과 수하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황도로 곱게 가시오.
그들에게 희망이라도 남겨 줘야 할 것 아니오.”
아난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을 상대하려 했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애초에 세틴은 그가 어떻게 상대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굶었다고 몸이 그리 크게 상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내가 준비한 죽으로 요기를 좀 하고 바로 황도로 떠나도록 하시오.”
세틴에게는 숄키닌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우살리드가 북동부로 귀환하기 전에 잡기 위해서는 그 전에 적어도 북동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페리안 후작령까지는 장악해 둬야 했다.
이후 세틴은 진군의 속도를 높였다.
도중에 지나치게 되는 모든 영지에서 영주들에 대한 처분은 아난과 유사했다.
그들의 작위과 영주로서의 권리는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며, 우살리드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으로 파악된 영주는 모두 황도로 압송하여 주민들과 격리시켰다.
그리고 각 영지마다 일정한 병력과 관리인들을 남겨 행정적인 일처리를 맡도록 했다.
세틴은 우살리드와의 대전에서 사령관을 맡은 적이 있는 푸스킨 샘프라를 북동부의 총독으로 내정하고 있었고, 그와는 향후 북동부에서 해야 할 일들에 충분한 협의를 마친 상태였다.
샘프라가 주로 급하게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북동부 각지에서 제국의 다른 지역과 교역을 할 만한 생산물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주도적으로 조달하고 교역을 주도할 만한 자가 있는지였다.
푸스킨이 북동부의 총독으로 내정됨으로써 최초 세틴과 함께 노스롭 토벌군으로 나섰던 제국군의 중견 장군들은 고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지역의 총독이 된 셈이었다.
이미 남서부와 노스롭 등에서 총독의 역할을 충분히 지켜보았던 푸스킨은 북동부 총독직을 기꺼이 수락했고, 장악된 영지들을 관리하고, 세틴의 진격 경로에서 떨어진 지역들에 대한 장악 계획까지 수립하고 있는 상태였다.
세틴은 빠르게 진군을 하여 불과 6 일 만에 페리앙 후작령에 도착했다.
도중에 기습을 해오는 자들이라도 있을 거라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북동부인들에게 그럴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모든 지역의 중추적인 전투 인력들이 우살리드를 따라 떠난 상황이어서 그럴 만한 병력을 준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화려한 기치창검을 앞세운 제국군의 위용과 절도있는 행군 모습만 보더라도 어설프게 부딛쳐 보려는 시도조차 좌절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었다.
세틴은 말로라도 거세게 항의하는 북동부인들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같이 입씨름을 벌이지도 않았고, 심한 처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참을성 있게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억지에 가까운 그들의 요구를 고분고분 수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페리앙은 북동부에서 유일하게 성채를 갖춘 영지였다.
성을 쌓을 만큼 좋은 석재를 구하기는 어려운 만큼 페리앙의 성채는 벽돌을 쌓아 만든 성이었다.
높이는 보통 사람 키의 두 배 정도에 불과했고,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허물어진 곳도 여기 저기 눈에 띄는 허술한 상태였으므로 막강한 방어력으로 작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세틴이 도착했을 때, 페리앙 성채 위에는 상당한 숫자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언뜻 보아서 정확한 병력의 수나 전투력을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세틴은 일단, 성채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에 군을 주둔시키는 한편, 사절을 파견하여 항복할지 항전할지를 물어보도록 했다.
사절로는 배커가 파견되었다.
십 여 명의 기병을 거느린 배커가 성채 가까이 다가가자, 성문 위에 자리한 성루에 빛나는 갑옷을 걸친 장수 하나가 나타났다.
“어디서 오는 병력이고, 페리앙엔 무슨 일로 왔나요 ?”
뜻밖에도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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