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에게 사랑받고 엘프에게 미움 받다
세틴은 오랜만에 나바니아 성의 귀빈실에서 목욕다운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김성진이 아니라 세틴의 관점에서도 순행길에서 가장 큰 고역은 제대로 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바네사와 시녀들, 하녀들은 간만에 대공가의 귀공자다운 면모를 되찾았다며, 새옷을 입힌다 머리를 정리한다 부산을 떨었다. 두 달이 채 안되는 사이에 세틴은 키도 꽤 자랐고 체격이 커져서 맞는 옷을 고르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나바니아 백작은 시국을 감안하여 대규모 연회를 열지는 않고, 나바니아의 주요인사와 이종족의 대표들과 사절단의 상견례를 만찬을 겸해서 열었다. 바네사 등이 세틴의 외모와 치장에 신경을 쓰는 이유였다.
만찬장은 상석에 나바니아 백작 부부와 올란드 후작, 세틴을 위한 자리가 있고 양 측면에 사절단의 주요 인사와 나바니아의 주요 인사들이 앉는 모양새였다.
“조촐하나마 사절단과 13 공자를 위해서 이 자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사절단이 그간 겪은 우여곡절이 적지 않은 데다 대공 전하의 소집령까지 떨어져 뒤숭숭한 마당이지만, 오늘 저녁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바니아 백작을 시작으로 줄줄이 형식적인 인사말과 자기 소개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나바니아 쪽에서 일어난 엘프 공주의 한 마디에 파란이 일었다. 그녀는 세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틴, 진정 그대가 세틴이 맞나요 ? 나의 사랑스럽고 고귀한 세틴은 어디로 가고 잔뜩 더렵혀지고 타락한 이상한 존재가 세틴이라고 말을 하나요 ? 어떻게 오크보다 추하고 뒤틀린 영혼이 세틴이라고 우기나요 ?”
“네 ? 갑자기 무슨......”
세틴은 너무 갑작스러운 폭언에 어안이 벙벙했다. 당황하기는 만찬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 엘프 사회에서는 공주가 다음 군주가 될 수도 있었기에 제법 높은 지위라는 것을 나바니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공주가 뜬금없이 13 공자에게 폭언을 쏟아내는 이유를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대가 진정 세틴이라면 나를 기억할 거에요.”
“8 년전 엘프 군주 부부가 프라움을 방문했을 때, 당신이 같이 왔던 일을 분명히 기억하오. 아무리 어렸을 적 일이지만, 사흘 내내 붙어 지내던 푸시니아 공주를 어찌 잊을 수 있겠소 ?”
“아아, 그때 세틴은 엘프인 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당신이 그 세틴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군요.”
이때, 푸시니아 옆에 앉아 있던 거한이 나섰다.
“공주, 정신 나간 소리는 이제 그만 하시오. 13 공자가 비록 체구는 작지만 당당하고 사내다운 투기가 돋보이오. 나는 오크 대전사 하쿰이라 하오. 13 공자, 당장 내일이라도 한 판 뜹시다. 사내라면 ‘몸의 대화’를 해봐야 서로를 알 수 있지 않겠소 ? 하하하.”
세틴에 대한 엘프와 오크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자,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가 한층 높아졌다. 또 그 옆에 있던 드워프가 나섰다.
“나는 드워프를 대표해서 나온 장로 모우징이라 하오. 내가 보기에도 엘프 공주의 헛소리는 도가 지나친 것 같소. 엘프는 겉모습보다 정신과 영혼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말은 귀가 아프게 들었지만, 이번에는 공주가 13 공자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같소. 혹시 공주가 13 공자에게 연심이라도 품었다가 사내다워진 모습에 실망이라도 한 것이오? 푸하하......”
푸시니아가 오크와 드워프를 노려보며 반격했다.
“당신들 같이 머리에 든 것 없는 자들과 무슨 대화를 할까요. 천박하기가 말을 섞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에요.”
이종족들의 거침없는 입씨름에 사람들은 내색은 하지 않아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졸지에 별로 자랑스러울 것 없는 주인공이 되어버린 세틴은 황당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찔리는 데가 없지는 않았다. 전생의 자각이라는 게 빙의와 비슷한 면도 있었고, 재커드의 혼에 영향을 받은 세틴의 영혼이 보기에 따라 누더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라 짐작했다. 어떻게든 수습은 해야 했다.
“공주, 내 영혼이 타락했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소. 아직까지는 내가 크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고, 누군가를 나쁜 마음으로 해코지하려는 생각을 해본 적도 별로 없소. 딱히 엘프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엘프들이 정신의 어떤 면을 고상하게 여기는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나는 좋은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배우고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세틴의 말은 천의무봉이었다. 푸시니아도 그제야 자신이 다짜고짜 퍼부은 폭언이 심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내가 오랫동안 엘프들 사이에서만 지내왔고, 공자를 보고 받은 충격이 커서 말이 좀 심했던 점은 사과하겠어요. 공자가 많지 않은 나이에 무슨 일들을 겪었길래 그토록 거칠고 상처 많은 영혼을 갖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에요. 인간들은 종종 지나친 야망과 욕심으로 스스로를 망가트리죠. 엘프가 자기들만 고상한 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내가 알고 있던 순수하고 고귀한 세틴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이건 사심없는 관심과 우려라는 점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바니아 백작이 분위기도 바꿀 겸 올란드 후작에게 물었다.
“후작 각하, 대공 전하께서 소집령을 발하신 이유에 대해 혹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
“순행 사절단이 받은 지령은 나바니아에서 리스톤과 거윈의 일까지 마무리 짓고 최대한 빨리 복귀하라는 내용이 전부였소. 필시 6 백작에게 소환령을 내리신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소. 내 생각에는 최근 제국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공국이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할 모종의 사태가 있지 않을까 하오.”
“후작의 견해에 나도 공감합니다. 최근 그림자가 여기저기서 날뛰고 있어 심려가 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프라움 행에는 우리 모두가 동행을 해야 할 텐데, 가능하면 충부한 병력을 동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나바니아가 물었다.
“공국의 소집령에는 정해진 규정이 있오. 소환에 응하는 백작들이 대공령에 진입할 때는 10 인 이하의 호위 병력 만을 대동해야 하지요. 대공께서 별도로 말씀하신 내용이 없다면 이번에도 이 규정을 준수해야 할 것이오. 하늘 요새까지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좋지만, 오랜 기근에 시달린 백성들을 놀라게 하거나, 그들을 동원하는 일은 없어야 하오. 우리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림자는 우리가 프라움에 도착하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일을 꾸밀 것이오. 우리가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겠소 ?”
“여기서 하늘 요새에 이르는 길에서 우리를 습격하고자 한다면 크게 세 곳입니다. 그린테일 강이 그 하나요, 주도를 잇는 그린테일 강 양안의 나루터가 둘이요, 마지막은 12 폭포 가도입니다. 도강하는 배에서나 12 폭포 가도를 지날 때가 가장 대처가 까다로울 것입니다. 하지만제가 주목하는 곳은 양안의 나루터입니다. 그곳은 6 백작령의 상거래가 집중되는 곳이라 이곳이나 브라스틴보다 오히려 상주 인구가 많고 유동 인구도 많습니다. 각종 거래소, 상점과 주점, 여관, 창고 등 시설들도 많은 곳이지요. 하지만 치안 유지와 세금 징수를 위해 설치한 관사와 관문이 튼튼하고 병력도 충분하므로 미리 대비를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후작이 안심이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곳에 올 때와 달리 주도를 이용한다면 브라스틴에 다시 들릴 수는 없을 듯하오. 브라스틴에 미리 알려서 그쪽 나루터에 대비를 강화하고 브라스틴 백작도 거기서 합류해서 이동하면 좋겠소.”
대공의 소집령에는 이종족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종족의 세 대표들은 한결같이 이번에 프라움까지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자기들도 제국과 공국의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나름대로 대응을 할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올란드 후작은 자신의 판단으로 이종족들의 동행을 허락했다.
다음날 아침 댓바람부터 하쿰이 세틴에게 연무장에서 보자는 연락을 해왔다. 엘프 공주를 비난하면서 했던 사내들의 ‘몸의 대화’가 빈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틴은 자신의 무위가 너무 떠들썩하게 알려지는 것이 꺼려지기는 했으나, 오크와의 대련이 흔치 않은 경험이어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 오크에게는 십여 명의 대전사가 있는데, 그 중에서 나는 가장 젊은 편에 속하오. 우리는 대련 중에 죽거나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소. 인간들은 그렇지 않아 대련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괜찮겠소 ?”
하쿰은 말을 하면서 넓적한 반원형의 날이 양쪽으로 달린 거대한 도끼를 양손에 하나씩 꺼내들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무용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서로 너무 치명적인 공격은 삼가는 정도로 하면 어떻겠소 ? 아무래도 죽기살기로 싸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세틴의 말에 하쿰도 동의를 표했다.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패기로군. 좋소. 그렇게 합시다.”
세틴은 멀린에게 받은 외날검, 지금은 ‘재커드의 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검을 처음으로 꺼냈다.
세틴은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선제공격에 나섰다. 최근 익힌 재커드 검법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 중 하나인 돌진 공격을 시도했다. 돌진 공격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응용이 가능했는데, 일대일 대결에서는 전방을 향해 쭉 뻗은 검을 앞세워, 무엇이든 박살낼 듯한 기세와 전광석화같은 속도가 돋보였다.
시작부터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는 공격에 하쿰은 감히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 회피하는 동작을 취했다. 회피 동작이라고는 하나 몸을 360도 돌리면서 다가오는 검을 피하는 동시에 쌍도끼로 상대의 머리와 몸통을 동시에 가격하는 반격을 포함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하쿰의 예상을 뛰어넘는 세틴의 속도에 쌍도끼는 붕붕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첫수부터 세틴에게 밀렸다고 생각한 하쿰은 잔뜩 화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번갈아가며 다양한 방향으로 베어오는 하쿰의 공격은 꽤나 위력적이었다.
하쿰의 연속 공격은 마냥 피하기만 해서는 반드시 한 번은 걸려들 수밖에 없도록 상대를 몰아가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세틴은 얼마 가지 않아 하쿰의 연계 공격의 맹점을 파악했다. 아무리 근력이 좋다 해도 무거운 쌍도끼를 휘두르려면 무게 중심을 잃기 쉬웠고 그만큼 정교한 동작이 이어져야 했다.
세틴은 날아오는 도끼를 검으로 툭툭 건드리는 것만으로 회피동작을 최소화하기 시작했고, 하쿰의 연계 동작에는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세틴이 우세를 점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직까지는 반격다운 반격을 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승부는 갑자기 결정되었고, 하쿰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어느 순간, 하쿰의 도끼 자루가 연속해서 부러지면서 날 부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그의 양손에는 자루만 남아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무기를 잃은 하쿰의 패배였으나, 하쿰은 패배를 인정할 생각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통짜 쇠로 만든 자루가 부러지다니......”
세틴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 이 녀석의 별명이 ‘소드 브레이커’라는 사실을 내가 깜빡했소. 이건 무기의 예리함에 따른 결과이니 무승부로 합시다.”
“무슨 말이오. 싸움 도중에 무기를 잃은 전사에게 죽음 뿐이오. 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겟소. 무기 탓을 하며 승부를 논한다면 대전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뿐이오. 오늘은 내가 졌으니 다음에 또 겨뤄봅시다.”
보는 눈이 많을 수밖에 없는 대결이었다. 세틴의 계획대로 그와 하쿰은 대결은 세틴의 무위보다는 그가 엄청난 보검을 갖고 있다는 쪽으로 소문이 났다. 애초에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대공가의 공자가 오크의 대전사를 이겼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기 어렵고, 단지 검의 성능 덕이라는 해석을 사람들이 더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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