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마우니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진정을 한 시오미가 말했다.
‘세틴, 지금 당신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내가 너무 미안해.’
‘아냐, 가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등떠민 건 난데 뭘.’
‘그런데 내일 양부는 죽는 거야 ?’
‘나도 모르지.
모그란데가 직접 전투에 앞장 서지는 않을 거고, 자신의 신변을 허술하게 할 사람도 아닌 건 잘 알잖아.
사실, 원흉 중의 원흉이 모그란데이니 가능하면 내일 제거하는 편이 낫기는 하겠지.
왜, 살려 줄까 ?’
‘아냐, 그런 건.
내가 아직도 양부라고 부르긴 하지만, 분명히 의절을 했고, 내게 그에 대한 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틴의 일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는 건 싫어.
혹시 그가 죽는다면 시신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
어쨌든 내게는 은인이고 나한테 잘못한 것은 없는 사람이니까.’
‘전장에서는 적장을 잡는 것이 승리의 첩경이기도 하지만, 그것에 너무 집착하다가는 대세를 그르치는 수도 있어.
지금은 모그란데군이 워낙 대군이라 흩어 놓는 게 우선이야.
내일 싸움은 북부군은 가능하면 포로로 잡아서 북부로 돌려보내고, 참전한 동부왕국군을 처단하는데 주력할 거야.
이미 그렇게 전투 지침이 내려져 있고, 그에 따른 세부 전술까지 말단 지휘관에게도 전달이 되어 있어.
그런데 내 짐작이지만, 모그란데는 아마 이미 내빼고 없을 거야.
아니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단을 마련해 놓았겠지.
아무리 결전이라고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위태로워지는 걸 감수할 자가 아니야.
그것이 바로 모그란데군은 내일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
‘어렵겠지만 바네사 언니에게 자장가라도 불러 달래든지 해서 좀 자.
내가 그래도 언니라도 당신 옆에 있어서 안심은 돼.’
‘알았어.
바네사에게 마시면 곱게 잠이 드는 차가 있어.
그거 한 잔 달래서 마시고 자야지.
우리가 반드시 이길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시오미도 잘 자.’
모그란데의 군영은 이미 파종을 마친 농지를 넓게 밀어버리고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지평선이 보일 만큼 드넓은 벌판이 이제 한 뼘 반 정도 높이로 자란 작물들로 푸르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마우니는 십만이 훌쩍 넘는 대군이 차지한 땅이 오히려 좁아 보일 정도로 드넓은 벌판이었고, 따로 통보는 하지 않았으나 모그란데군도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살을 애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전투는 옅게 낀 아침 안개가 모두 걷힐 무렵에 시작되었다.
5 만이 채 되지 않는 세틴군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진으로 천천히 모그란데의 군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세틴군의 최전열은 방패병도 장창병도 아닌 깃발로 채워져 있었다.
세틴군의 상징인 ‘테오와 검’이 그려진 거대한 깃발을 2인 1조로 치켜든 깃발병들이 맨 앞에서 전진하는 모양은 정면에서 바라보기에 화려할 뿐 아니라 위엄이 넘쳐 흘렀다.
깃발병들을 앞세운 세틴의 의도는 적에게 제국군의 위엄을 과시함과 동시에 어떻게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주는 데에도 있었다.
웅장한 나팔 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깃발병을 앞세운 사각 방진이 모그란데군에게 점점 다가가자, 모그란데군도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정면에 방패벽을 치고, 사이사이로 장창이 삐져나온 방어진을 펼쳤다.
이 시대에 일반적인 활의 유효 사거리는 백 오십보 정도였다.
대군이 서로 맞붙었을 때, 백 오십 보 이내로 거리가 좁혀지면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므로, 대략 그 정도 거리가 좁혀지는 시점이 바로 서로 간에 전술이 펼쳐지는 시발점이 되곤 했다.
서서히 진군하던 세틴군이 모그란데의 방원진 약 이백 보 앞에서 진군을 멈추고, 나팔 소리도 일제히 사라졌다.
이때, 깃발을 드높이 치켜든 깃발병들이 좌우로 넓게 산개하기 시작했다.
모그란데군의 입장에서는 절로 눈길이 가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으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깃발병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뒤로 돌아나가는 가운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세틴군의 진영 중앙에서 수를 셀 수 없는 대규모의 기마대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격렬한 충돌이 시작되는가 할 때, 세틴군의 방진을 나온 기마대는 정면으로 돌격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우회하기 시작했다.
1 만에 달하는 돌격대가 모두 방진을 빠져 나가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고진과 베른, 울브린, 이 세 명의 맹장들이 선두에 선 돌격대는 정면의 방어진에서 그리 멀지 가지도 않은 지점에서 곧바로 방원진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고진이 방원진의 울타리를 넘었을 때, 돌격대의 후미는 아직 본진을 채 빠져나오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세틴군의 돌격대가 모그란데군의 방원진 안으로 파고 들었다.
나름대로 대비가 있었던 듯, 방원진 안에서도 돌격대를 제법 단단하게 막아 서는 부대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부대도 고진을 선두에 세운 돌격대의 돌진을 멈춰 서게 하지는 못했다.
돌격대의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그란데는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넓게 자리잡은 전의 진형으로 파고드는 돌격대는 대개 적의 수장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고진의 돌격대는 빠르게 전진하면서 막아서는 적을 치고, 여기 저기 불을 지르고 다닐 뿐이었다.
기마돌격대가 방원진을 넘어섰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모그란데군의 지휘부는 대부분 모그란데의 본영 주변에 집결하여 거기서 승부를 보려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진의 돌격대가 방원진 전체를 휩쓸고 다니면서 방화와 살상에 열을 올리면서 사실상 모그란데군은 커다란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모그란데에게는 일만에 달하는 기마돌격대와 정면으로 맞설 만한 기사단이 이미 없었다.
기사단을 따로 편성하기보다는 방원진의 단단한 방어와 어떤 방향에서 공격해오든 기민하게 대비하기 위한 수비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모두 흩어진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고진이 그야말로 마음껏 방원지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세틴의 본진이 본격적으로 진군하는 순간 방원진이 수수깡처럼 무너져 내릴 거라는 예상을 누구라도 할 수 있을 만큼 혼란이 커져갔다.
모그란데가 미리 군영을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마돌격대를 누구도 막아서지 못하는 상황이 확실해지자, 그는 모종의 결단을 내린 듯 모든 장수들에게 명했다.
“지금 본진을 사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 기마 돌격대를 이대로 방치하다간 우리 군영 전체가 쑥대밭이 되는 건 한 순간이야.
그래서 지금 명을 내리겠다.
모든 영주와 장수들은 들어라.
지금부터 모든 병력과 역량을 총동원해서 저 돌격대를 저지하라.
여기서 지켜보고만 있지 말고 나가서 싸우란 말이다.”
그렇게 명령을 내린 모그란데는 장수들이 주섬주섬 장비를 챙겨들고 자신 부하들을 인솔하러 나가자, 핵심 측근들과 정예 호위들 수십과 함께 군영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것으로 사실상 끝난 싸움이었다.
고진이 모그란데 군영의 안쪽을 휩쓸고 다니는 동안, 세틴은 본진을 굳게 지키고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그란데 군진의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멀리서 보기에도 방원진 전체가 큰 혼란에 빠져드는 모습이 분명해 보이자, 세틴은 그때서야 비로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우리 차례다.
북부군은 무력화시켜서 포로로 삼고, 동부왕국군을 최대한 찾아내서 척결하라는 명은 이미 들었을 것이다.
가우디, 베커 나와라.
세틴의 친위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지금부터 똑똑히 맛을 보여준다.
오늘 나는 끝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중간에라도 특이한 상황이 있으면 지체없이 보고하도록.
친위대를 선두로 전군 즉각 돌진하라.”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그리고 가뱝게 무너져버리는 모그란데군을 보며 세틴은 속으로 ‘오늘만은 직접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세틴군의 본대가 진격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모그란데가 이미 군영을 빠져나간 듯하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마우니 평원의 전투에서 세틴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점은 동부왕국군이었다.
머지 않아 동부왕국의 본대가 제국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모그란데에게 붙은 현재의 동부왕국군 선발대 5 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세틴의 주된 관심사였다.
세틴은 마우니에서 동부왕국군에게 호된 맛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사실상 동부왕국군이 전면전에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돌격대를 이끌고 ‘죽쑤기 작전’에 나서는 고진에게 세틴이 당부한 것도 단 하나였다.
모그란데군의 방원진 전체를 무력화시키는 일에 주력하되, 그 중에서도 동부왕국군의 부대들 위주로 공세를 벌이고, 특히 각 부대의 수장급들은 보이는 족족 처단할 것을 부탁했다.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후속 전투에 나서는 본진을 이끄는 지휘관 들에게도 똑같은 지침이 하달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병사들까지 무차별 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동부왕국군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절반 가까이가 빠져 나간 모그란데의 북부군은 방원진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린 순간 이미 와해된 것이나 다름 없었고, 북부군의 영주들이나 병사들은 세틴이 귀순한 북부군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는 동부왕국군과 북부군 간에는 언뜻 보기에도 확연한 차이가 드러났다.
북부군은 대부분 제대로 맞서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항복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동부왕국군은 어떻게든 후퇴할 길을 찾는 한편, 큰 피해 없이 후퇴하기 위해서라도 완강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전투는 대부분 세틴의 제국군과 동부왕국군 사이의 전투였다.
동쪽을 제외하고 삼면을 포위하는 형태로 방원진을 압박해 들어가는 세틴군의 본대가 마주치는 동부왕국군은 태반이 이미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 하고 있거나, 퇴로를 찾아 헤매고 있는 부대들이었다.
그러니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동부 방면을 열어둔 것은 포위 공격의 기본 전술에 충실한 방식이었다.
아무리 패퇴하는 부대라도 퇴로가 완전히 막혔다고 판단이 되면, 최후의 저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은 때로 가장 높은 사기를 지닌 부대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게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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