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링 전투
거대한 사각 방패를 서로 겹치게 들고 전진하는 모그란데군의 위용은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 만큼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모그란데의 첫 공격은 페링 진지에 사다리를 걸치고 타고 넘는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높은 석벽이 아니라 기껏해야 두 길이 넘지 않는 높이였지만, 우살리드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방패병들이 진지에 근접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응전할 기미조차 없었고, 오히려 모그란데 궁병들의 지원사격에 방어태세로 일관하던 우살리드군은 사다리가 걸쳐지고, 돌격병들이 사다리에 오르기 시작하자 그들을 향해 집중적으로 석궁을 쏘아댔다.
한 시간 여에 걸친 일차 공격은 모그란데군의 무수한 희생을 초래했을 뿐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다리에 오른 돌격병들의 방어는 당연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거리도 가까운지라 석궁의 좋은 표적이 되었을 뿐이었다.
진지 상단을 넘어서는 돌격병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석궁 공격의 정확도와 위력이 빛을 발했다.
이날, 모그란데군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사다리를 타고 넘는 기초적인 방식의 공략으로는 페링 진지를 공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내려진 것이었다.
다음날 이어진 이차 공격에는 사다리가 동원되지 않았다.
전날 공격에서 나온 대부분의 희생이 돌격병들에게서 나왔기에 다른 방법을 들고 나왔다.
방패병들을 앞세워 진지 전면에 걸쳐 전진할 때까지의 양상은 마찬가지였으나, 석궁의 사거리 밖이라고 판단되는 지점에서 대열을 멈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삼각 쐐기진 형태로 진지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쐐기진도 진지에 가까워지면서 격렬한 석궁 공격에 맞닥뜨렸으나, 정면뿐만 아니라 비스듬한 사면과 위쪽에서 받는 공격까지 어느 정도 방어하는 진형이어서 석궁에 그리 큰 피해를 당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진지에 바짝 근접한 쐐기진 안쪽에서 물동이를 든 병사가 나타나 진지를 향해 검은 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진형을 유지한 채 서서히 퇴각하는 것이었다.
우살리드는 모그란데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검은 물이 뿌려지면서 진동하는 기름 냄새에 모그란데가 시도하려는 게 화공임을 직감했다.
한 두 동이를 뿌린다고 해서 진지가 불탈 정도로 불이 붙지는 않을 터였다. 연달아서 새롭게 출발하는 쐐기진들을 보며 우살리드가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어지간히 높은 순도로 특별한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는 이상 순식간에 엄청난 화력을 낼 수 있는 기름은 우살리드가 알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살리드는 물을 퍼와서 기름이 투하된 지점을 향해 붓도록 했다. 다행히도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해서 진지 바로 아래쪽에는 거대한 물동이들이 준비해 놓고 있었다.
진지 바로 전면에는 해자까지는 아니고, 물이 흐를 수 있는 고랑을 파놓은 상태라서 기름을 씻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지를 일거에 불태울 정도가 되려면 진지 벽과 그 아래에 충분한 기름이 쌓여야 하는데 우살리드의 적절한 대처로 사실상 화공이 성공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름을 씻어내기 위해 부은 물이 목조인 진지의 곳곳에 스며들면서 더더욱 불이 붙기는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었다.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저스틴과 세틴이 전투의 양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틴이 저스틴에게 물었다.
“형이 보기에 우살리드가 얼마나 버틸 것 같아요 ?”
저스틴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사실 목조 진지는 공략할 방법이 무수히 많지.
우살리드가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를 했다 해도 한계가 있을 거야.
어제 사다리 공격은 간을 보기 위한 전초전이라 해도 너무 쓸데 없는 손실이 많았어.
화공을 시도하려면 대비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해치워야 하는데, 뻔히 보면서 불을 붙일 때까지 기다려 줄 거라 생각한 건가 ?
모그란데에게도 바보들만 있지는 않을 테니 내일은 뭔가 확실한 방법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세틴이 웃으며 재차 물었다.
“형 같으면 어떤 방법을 쓸까요 ?”
저스틴이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난 페링 진지를 처음 볼 때부터 생각한 방법이 있어.
이곳 전체 지형이 경사지인데다 진지가 세워진 지역은 특히 경사가 심하지.
목조 진지는 튼튼하게 지었다 해도 한계가 있어.
나라면 땅을 파내서 진지를 허물었을 거야.
모그란데에게 남는 게 인력인데 방어하면서 땅을 파는 게 어렵지는 않겠지.”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랑 생각이 똑같네요.
우리가 쉽게 해낼 수 있는 생각을 모그란데군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진 않겠죠.
사다리, 화공을 동시에 같이 준비한다면 페링 진지가 한 순간에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요.
내일 두고 보자구요. 오늘은 거의 끝난 거 같아요.”
애써 준비한 화공도 실패가 확실해지자 모그란데군은 불을 붙여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셋째 날은 전투가 상당히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모그란데는 세틴과 저스틴의 예상대로 땅을 파내어 진지를 무너뜨리는 전술을 들고 나왔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고,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려야 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살리드의 마음이 초조해져갔다.
진지 위에서 공격할 수단이 석궁과 일반 화살 뿐인 것이 아쉬웠다.
가장 효과적인 화공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화공이 효과적이기는 하나 자칫 역으로 화공을 당하면 오히려 진지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우살리드군에서 출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냥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인지 우살리드가 기병 레인저부대와 설산표범 레인저 부대를 출진시켰다.
진지 전면이 아니라 측면의 후미진 지점에서 출진한 레인저 부대들이 바람처럼 모그란데군을 휩쓸고 지나갔다.
천여 기에 불과한 레인저 부대였으나, 이들의 등장으로 모그란데군 전체에 커다란 파란이 일어났다.
레인저들은 모그란데군 안쪽으로 파고드는 일 없이 측면을 휘돌아가면서 석궁을 날렸는데, 미처 대비하지 못한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계속 모그란데군의 외곽을 돌고 있는 레인저들에 대처하기 위해 수천의 기사단이 출동했으나, 레인저들은 그들과도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레인저들에 의해 피해가 속출하는 가운데 기사단이 그들을 뒤쫓는 형국이 되고 있었다.
가벼운 무장에 기마 사격에 특화한 레인저 부대의 기동성은 기사단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땅을 파내는 작업이 진행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진도가 나가기는 힘들었다.
모그란데군 전체가 동요하다 보니 작업자들을 보호하는 방어력에도 틈이 생겨나고, 안정적인 작업이 될 리 만무했다.
모그란데군을 특히나 놀라게 한 것은 설산표범 레인저들이었다.
하얀 바탕에 옅은 옥색의 줄무늬가 아름다운 설산표범이 직접 병사들을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질주하는 가운데 간간이 질러대는 포효 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 틈을 타서 쏘아대는 레인저의 석궁은 백발박중이었다.
이렇게 모그란데의 20 만 대군이 불과 천 여 명의 레인저들에게 농락을 당하는 형국이었는데, 모그란데가 이들에게 대해 적절한 대비책을 내놓기도 전에 레인저들이 왔던 길을 돌아 복귀하고 말았다.
레인저들은 쫓아오는 기사단을 기다려주는 여유마저 보이다가 다가온 기사단을 향해 일제히 석궁을 날리고 나서야 여유 있게 진지로 돌아갔다.
여기서 당한 기사가 수십에 상한 말이 수백이었다.
모그란데는 이미 전열이 흩어지고 작업에 대한 집중도도 떨어진 상태에서 땅파기를 강행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해서 군을 물리고 말았다.
이렇게 셋째 날에도 모그란데군은 결정적인 전과를 거두는데 실패했다.
확실히 경사진 땅을 파내어 진지를 허문다는 전술이 효과적이기는 했으나, 언제 레인저들이 뛰쳐 나와 기습을 가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다란 변수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미 파둔 땅은 그대로였다.
우살리드가 밤새 그것을 다시 매울 수는 있더라도 한 번 파둔 땅을 다시 파내기는 더 쉬울 터였다.
이로써 우살리드가 무언가 획기적인 다른 수를 내지 않는 한, 조만간 진지 일부가 허물어지는 상황은 기정사실이 된 셈이었다.
세틴이 저스틴에게 말했다.
“내일 전투는 정말이지 기대가 되네.
과연 우살리드가 또 무슨 수를 준비해두고 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 하하하.”
저스틴이 말했다.
“오늘 레인저 부대의 위력을 확인한 것만 해도 큰 성과야.
실로 대처하기가 까다롭긴 하겠더라.
단지 그것으로 대군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한계도 분명해 보였어.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마지막에 레인저들이 복귀하기 직전에 기사단을 공격할 때, 기사들보다는 말에게 공격을 집중한 것이야.
부대 단위로 마주쳤을 때, 기사들을 공격하면 피해를 더 키울 수는 있지만, 말을 집중 공격하면 부대 전체가 일시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말더군.
수십, 수백 마리의 말들이 고통으로 날뛰면 그럴 수밖에 없겠어.”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확실히 우살리드의 레인저 부대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대비와 훈련을 착실하게 해놓았다는 걸 한눈에 알겠더라.
하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게 준비는 되어 있지요.
만약 내일도 모그란데가 진지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전투는 당분간 소강상태에 들어가겠군요.
나는 왠지 모그란데가 무슨 수를 들고 나와도 우살리드가 진지를 포기하게 만들지는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드네.
모그란데가 진지를 일부 허무는데 성공한다 해도 진지에 파고 들어가서 결정타를 날릴 역량이 있을지 미지수야.
우살리드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조차 대비를 착실하게 해두었을 거란 말이지.”
예상대로 우살리드는 모그란데군이 파놓은 땅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진지 바로 밑까지 파고든 곳도 여러 군데 보였고, 그 위의 진지가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모그란데군이 그런 상황을 보면 ‘내일은 반드시’라는 확신을 가질 만해 보였다.
넷째 날, 모그란데군은 날이 밝자마자 진군했다.
작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벽도 더욱 단단해 보였고, 레인저 부대의 출진에 대비하여 측면의 방패병들도 보강해둔 상태였다.
또한 기사단을 여럿으로 나누어 편제해서 레인저에 대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피해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땅파기 작업은 착착 진행되어 어느덧 진지의 일부분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는 모습도 몇 군데서 나타났다
한 순간, 진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깊숙하게 땅을 파들어가고 진지가 기울어가는 지점 몇 곳에서 모그란데군이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것이었다.
우살리드군이 진화작업을 하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활활 타오르는 진지를 보며 모그란데군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이제 됐다’는 승리의 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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