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지는 고민
만약에 이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한다면 황궁이 완전히 뒤집어짐은 물론이고, 황실의 권위는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이 떨어질 것이며, 어쩌면 기존 황실을 완전히 갈아엎고 새로운 황제가 등장할 명분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틴은 이해득실을 떠나서 애초에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황제는 자애롭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반면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결코 유능한 황제라고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세틴의 어머니인 조스핀이 황제의 성격을 빼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했다.
그런 황제가 정면으로 감당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정신줄을 놓을 정도의 엄청난 사안이었으니, 향후 이를 오롯히 혼자서 감당해 나가야 할 세틴으로서는 월칸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거의 반나절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세틴이 오골보르에게 물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네와 나 외에 또 있는가 ?”
오골보르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답했다.
“없습니다.
폐하께서 병이 깊어지기 전에 저를 불러 죽을 때까지 혼자서만 아는 비밀로 간직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지기 직전, 제게 일 황자님 곁으로 가서 도우라 당부하시면서 일 황자님께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 누구에게라도 조그만 실마리라도 준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세틴이 오골보르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에는 내가 어찌 하면 좋겠는가 ?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네.”
오골보르가 여전히 겸손한 자세로 말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일 황자 전하께서 사령관님께 그것을 전할 때는 모든 판단과 결정을 일임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제가 충실히 답변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대하고 끔찍하기도 한 사안인지라 저같은 일개 심부름꾼이 어떤 의견을 낼 수도 없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입장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네.
하도 답답해서 한 번 물어봤을 뿐이야.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겠네.
내가 몇 시간 동안 고민하면서 몇 가지 가닥을 잡기는 했어.
이 문제는 내가 다른 누구와 상의할 수도 없는 문제이니, 내 생각에 대한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
먼저, 나는 이 사안을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네.
자네와 나, 둘 만이 아는 비밀로 남겨두겠다는 거지.
둘째, 어떤 일이 있어도 현 황태자 이하 다른 황자들에게 황위가 돌아가는 일은 막아야겠네.
그동안 내가 살펴본 황자들이, 또는 그 중에 하나라도 황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판단도 달라졌을 수도 있어.
단지 핏줄이나 도덕성을 떠나서 제위를 감당할 만한 황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지.
이 사안을 몰랐다면 부족하더라도 내가 뒷받침을 해주면서 황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이지.
셋째,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여 죄있는 자들이 모두 죗값을 치르게 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냥 없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네.
적어도 황제 폐하와 월칸 전하의 억울함과 분노, 한맺힌 가슴을 풀어드릴 의무가 내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네.
물론, 음란하고 흉악한 심보를 가졌던 황비들과 그의 일당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
당장 이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네의 조언이 많이 필요할 걸세.
자, 내가 정리한 생각은 이 정도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
오골보르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일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에는 사령관님의 판단과 결정에 따를 것이며, 있는 힘을 다해 도우라고 말입니다.
세 가지 결정이 모두 이 사안에 대한 맥을 정확히 짚어내는 중요한 지점들입니다.
사령관님의 판단과 결정에 토를 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사안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차단하겠습니다.
두 번 째 결정 또한 지극히 현명하신 판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사령관님의 뜻을 거스르고 제위에 오를 만한 역량을 가진 황자는 없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지요.
세 번 째 문제에 대해 굳이 조언을 드린다면, 그 사안을 접어둔 채로 죄있는 자들을 일일이 징치하기는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사정을 잘 아는 제가 옆에서 돕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당장 어떤 계획을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사령관님의 뜻을 관철시키자면 다른 어떤 명분을 세워 황궁과 황실 전체를 갈아 엎어야만 합니다.”
이 대목에서 오골보르의 말이 세틴에게 영감을 주었던 듯, 세틴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폐하와 전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는데, 옛일을 꺼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을 벌이자면 몇 년을 매달려도 쉽지 않겠다 생각했네.
자네 말이 맞아.
아예 황궁 전체를 들어 엎어야지.
그런데 그러자면 황궁 내부에서 움직여 줄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근위대장이 내 사람이기는 하지만, 근위대장이 황궁 내의 시시콜콜한 일에 개입하기는 어렵겠지.
무슨 다른 방법이 없을까 ?”
오골보르가 되물었다.
“오늘 황태자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장을 보셨습니까 ?”
“봤네.
내가 보기에 조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황태자가 그에게 의존하는 것 같더군.”
“잘 보셨습니다.
그자는 비언차이라는 시종장으로 사실 저와 함께 가장 황제의 신임을 받던 자였습니다.
비언차이가 요즘 황태자와 여러 대신, 관료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조정과 황실 전체를 쥐락펴락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의사를 협박하여 사실을 숨기게 한 것부터 이후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바로 비언차이가 있었습니다.
오늘 황궁에 이토록 참담한 상황이 벌어지게 만든 원흉이라 해도 틀림이 없는 자입니다.
그자가 황비들과 그 자손들의 약점까지 손에 틀어쥐고 있으니, 황궁에서 비언차이와 감히 맞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황궁에 사람을 넣는다 해도 이렇다 할 역할을 해내기 어렵습니다.”
보기 드물게 세틴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렇다는 말이지.
자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 황궁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인가 ?”
오골보르가 무척이나 부끄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모두 제가 부족하고 못난 탓입니다.
대부분 쫓겨나거나 누명을 쓰고 죽은 자들도 있습니다.
아직 몇 명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슨 일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할 만한 처지는 아닙니다.
간혹 황궁 내에서 일어나는 긴요한 소식이나 전할 따름이지요.”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밖에 나와 있는 자네가 힘을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겠지.
어차피 조급하게 서둘 일은 없으니, 차츰 활로를 모색해 보세나.
가능한 부분에서는 근위대장에게 끈을 대도록 해보게.
내가 미리 언질을 해둘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자네의 이름을 대고 오클린 근위대장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지.
오늘 비언차이에 대해 알게 해준 것만 해도 내게는 큰 소득이네.
어쩌면 그 자가 오히려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지.”
오골보르 상단은 이미 놀란의 군상 체계와도 선을 대고 있어서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아직 황도에는 군상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지라 실질적으로 황도에 각 지역의 군상을 연결하는 일을 오골보르가 도맡고 있었다.
그 말은 세틴의 재산이 엄청난 규모로 불어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오골보르의 보고에 따르면 전체 자산은 몰라도 가용한 현금 자산은 황실의 그것을 뛰어 넘을 정도였다.
세틴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무기가 생긴 셈이었다.
세틴이 오골보르에게 이에 관해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재산을 늘리느라 애쓸 필요는 없네.
특히 땅이나 농장, 골동품 등을 사들이는 일은 하지 말게.
당분간 내가 돈을 좀 써야겠어.
가능하면 현금을 최대한 확보해주게.
세상에 돈을 싫어 하는 사람은 없지.
내가 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는 건 아니지만, 돈 때문에라도 내게 함부로 대들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어.
가능하면 피를 보지 않고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게 내 유일한 바램이야.
그러자면 돈이 큰 무기가 될 수 있지.
구체적인 얘기는 차츰 하도록 하고, 일단은 내가 실컷 돈을 써볼 수 있게 준비해 주면 좋겠네.”
오골보르가 두 말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략 계산해도 당분간 한 달에 백 만 골드 정도는 쓰셔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밤이 깊어서야 사령관 사저로 돌아온 세틴을 시오미가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시오미가 이해심이 깊다 한들 자신이 기다릴 것을 알면서도 한 여름의 짧은 밤이 다 지나가서야 사저로 들어오는 세틴을 마냥 반갑에 맞아줄 수는 없었다.
“조금 있으면 날이 밝겠네.
이렇게 새벽같이 날 찾아와 주니 고마워 죽겠군.”
세틴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시오미를 안았다.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
제발 저리 좀 가라고 날 밀쳐낼 만큼 지겹도록 붙어 다닐 계획을 세우고 있어.”
시오미는 세틴에게 안기지 않고 비껴서는 자세를 취했다.
“퍽이나.
사람들이 세틴을 놔주기는 할 거 같아 ?
마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찰싹 달라붙어야 하나......”
짐짓 용을 쓰며 저항하는 시오미를 세틴이 다시 단단히 껴안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
시오미에게는 마법이 나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걸 다 알아.
마법 연구에 몰두할 때도 내 생각만 하는 건 아니잖아.
나도 그런 건 바라지 않고.”
사실이 그랬다.
시오미는 마법을 연구할 때 가장 뿌듯하고 활기가 넘치는 걸 체감하곤 했다.
“그렇다 쳐도 어떻게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게 와 ?”
사실 세틴은 시오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고뇌를 거듭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오골보르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시오미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
시오미의 표정은 여전히 셀쭉했다.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무슨 장사치야 ?
내게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스스로 생각해서 해 줘도 해 줘야지.
뭐,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
됐다, 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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