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전선
활활 타오르며 무너져내리는 목조 진지는 누가 보더라도 페링 진지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보이는 상황이었다.
세틴이 진형을 갖춘 모그란데 본진의 본격적인 진군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전장에는 예기지 않았던 변화가 일어났다.
타오르는 페링 진지를 집요하게 공략하던 모그란데 군의 선봉이 오히려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것 아닌가 ?
세틴은 직감적으로 전선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그란데 군의 진지 공략이 진지 일부를 불태우고 무너뜨리는 선에서 중단된 상황은 모그란데가 우살리드에게 일정 선에서 힘을 보여주고 물러나는 모양새였다.
모그란데 본진이 무너진 진지를 통해 진군했을 때 벌어질 치열한 전투를 예상했던 세틴의 생각과는 정면으로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나흘에 걸친 페링 공략전이 조금은 싱겁게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이후로 모그란데군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그란데군은 우살리드가 불타고 무너진 진지를 보수하고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방관할 뿐이었다.
연일 그런 전선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세틴은 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예상할 수 있는 첫 번 째 변화는 모그란데와 우살리드 사이에 모종의 타협이 있었거나,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금방이라도 생사를 걸고 결전을 벌일 것처럼 연일 공세를 거듭하던 모그란데군이 드디어 어느 정도 승기를 잡는가 싶은 순간에 물러선 일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또다시 며칠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 깊었는데 저스틴이 급하게 세틴을 찾았다.
저스틴의 안색이 무척 안좋았다.
“세틴, 아무래도 큰 사단이 벌어진 것 같아.
조금 전에 우살리드 진영 안에 세작으로 잠입해 있는 요원에게서 전갈이 왔는데, 우살리드가 모그란데와 손을 잡을 것 같다고 한다.”
세틴이 급하게 물었다.
“그거 믿을 만한 정보야 ?”
저스틴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지금 우살리드 진영에 잠입해 있는 요원은 커스틸이라는 무인인데, 원래는 내가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깊이 믿는 사람도 아니야.
사람이 진중하지 못하고 말이 실천보다 앞서는 사람이라 중히 쓸 생각이 별로 없었지.
그런데 커스틸이 방랑 수련 중인 무인 행세를 하면서 ‘모름지기 무인이란......’ 하는 장광설을 얼마나 잘 풀었는지 몇몇 우살리드 휘하의 무인들과 죽이 맞은 모양이야.
지금은 그들과 속 깊은 얘기까지 주고받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지 뭔가.
커스틸을 보면서 사람은 각자 성격에 맞게 쓰임새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
그에게는 칼만 아는 무인보다 어쩌면 세작 일이 천성이었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커스틸이 전한 바에 따르면 우살리드는 모그란데와 손을 잡는 쪽으로 거의 기울었다고 해.”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좀 더 상세하게 얘기해 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말이야.”
저스틴이 생각을 가다듬으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얘기가 좀 긴데, 그래도 워낙 중요한 사안이니 내가 들은대로 상세하게 말해 줄게.
여기서 우살리드의 부인이 아주 중요한 인물로 등장을 해.
샬롬이라는 그 여자는 우살리드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지.
샬롬 페리앙은 북동부에서 가장 유서 깊고 단단한 기반을 가진 페리앙 가문의 장녀야.
그녀는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
북동부에서는 다른 종교보다 설산마녀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숭배가 이루어지는 곳이야.
전통적으로 설산 깊은 곳에서 오래 수행한 설산마녀를 받들어 모시는 분위기지.
귀족들 누구도 설산마녀를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고 해.
그런데 샬롬의 세 살 생일에 초대받은 설산마녀가 그녀에게 예언을 남겼어.
‘넌 이 세상을 지배할 남자의 부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이야.
샬롬은 자라면서 그 예언을 철석같이 믿고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고 해.
그래서 결혼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게 생각을 했는데,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남자를 어디 가서 찾느냐였지.
샬롬은 생각 끝에 세상의 지배자가 될 사람을 미리 알 수는 없으니,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상대를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해.
우살리드와 결혼한 이후 샬롬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우살리드를 지원했어.
사실상 오늘날 우살리드가 북동부 제일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 일등 공신이 바로 샬롬이라 할 수 있지.
그녀는 결혼한 이후에도 친정의 동생들을 휘어잡아서 페리앙 가문이 우살리드를 지원하는데 온힘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고 해.
결정적인 지점은 샬롬이 네가 우살리드와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옆방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는 거야.
그날 이후 샬롬은 우살리드에게 ‘세틴이라는 남자를 꺾지 못하면 당신은 결코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고 해.
사실 우살리드는 널 만난 이후에 과연 세틴과 제국군을 적대하는 게 바람직한 일인지, 승산을 있을지 고민이 많았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살리드가 유일하게 자기 뜻대로 고집을 세울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샬롬이야.
‘세상의 지배자의 부인’이 되겠다는 그녀의 믿음이나 목표에 공감하든 않든 그녀를 결코 무시하거나 쉽게 물러서게 할 수 없다는 거지.
우살리드의 진영 내에서도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는데, 결국 ‘이번 기회에 세틴을 꺾지 못하면 우살리드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다’는 샬롬의 주장이 통하는 상황이야.
때마침 페링 전투 이틀째 밤에 모그란데에게서 협상을 타진하는 사절이 우살리드를 방문했어.
곧바로 어떤 타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상황에서도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서로 간에 확인한 거지.
나흘째 전투에서 모그란데가 계속 밀어붙이지 않고 공략을 멈춘 것도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
아직까지는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우살리드 진영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조만간 모그란데와 모종의 협약을 맺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야.
듣기에 따라서는 좀 황당한 내용이라서 나도 여러 차례 확인을 했지만, 샬롬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인 모양이야.”
세틴이 침중하게 말했다.
“우살리드가 한 여인의 망상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는 말이 솔직히 잘 믿어지지는 않네.
하지만 세상엔 별 일이 다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믿고 싶지 않아도 당장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어.”
저스틴이 말했다.
“그렇지,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이해득실을 따져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어찌 보면 북동부인들의 그런 이상한 사고방식이 그들이 가진 힘일지도 몰라.
천년 제국의 초대 황제도 ‘어미의 배를 가르고 나온 용의 아들’이라는 북동부인들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죽을 때까지 온힘을 다했다는 거 아냐.”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무슨 이유로든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손을 잡는다면 엄청난 난관을 만난 셈이군.
우리 진지도 다시 한 번 보강을 하고 증원군도 서둘러서 불러 와야겠어.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완전히 하나가 될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둘의 협공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보고 대비를 해야지.
아직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일단 우리 군 내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거론하지 말도록 하자고.
무엇보다 샬롬이라는 여인 하나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어.
좀 더 다방면으로 정보 활동을 강화해야겠어.”
저스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게 다는 아닐 거야.
북동부와 우살리드 진영 내의 상황은 사실 이 정도면 비교적 충실하게 파악이 되고 있는 셈인데, 문제는 모그란데 진영이야.
우선 동부왕국에서 파견나온 자들이 왜 계속 눌러 앉았는지, 그들이 속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어.”
세틴이 말했다.
“그래, 상식적으로 동부왕국군은 모그란데가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알았을 때 물러갔어야 했지.
모그란데가 무엇을 조건으로 내걸었든 그들이 남아 있는 진실된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몰라.
그들이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모그란데가 제국을 통째로 갖다 바친다 한들 믿을 수 있겠어 ?
이런 상황 때문에 호아니 군사를 동부왕국으로 파견한 건데, 이럴 땐 참 군사의 부재가 안타깝네.”
페링 전선에서는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페링 진지는 다시 깨끗하게 보수를 마쳤고, 모그란데의 진영에서는 다시 전투를 재개할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세틴은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손을 잡고 제국군에 맞서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나 하나 대비를 해나갔다.
사실 세틴은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살리드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좀 쉽게 가려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상황이 실망스러웠고, 어쨌든 연합한 양군을 격파하려면 또다시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했다.
세상 일이 어디 뜻대로만 되는 것이던가.
세틴을 더욱 찜찜하게 하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세틴이 싸워야 할 진정한 상대는 어쩌면 모그란데도 우살리드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 하라무스 관문과 방책들을 재정비하고 주변 지형까지 꼼꼼하게 정비하여 방어전에 대비하면서 또 다시 며칠이 지나갔다.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전투를 재개할 움직임은 전혀 없는 반면, 우살리드의 진영에서는 진지를 나와 공격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살리드가 공격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는 지금에 와서는 모그란데를 공략하겠다는 생각은 아닐 것으로 보였다.
거꾸로 모그란데와 우살리드 사이에 무언가 협상의 진전이 있었고, 이에 따라 우살리드가 황도로 재진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이렇게 상황의 변화가 어느 정도 명확해지자 세틴은 제국군의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고, 제국군 내에서도 모그란데와 우살리드의 야합을 기정사실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세틴이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변화된 상황과 현재까지 파악된 사실들을 설명하고 있을 때, 반가운 사람이 반갑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동부왕국으로 갔던 호아니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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