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너미 계곡의 참사
세틴이 마우니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고, 북동부로 진격할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동안, 투너미 계곡에서도 역사에 남을 대전투가 준비되고 있었다.
우살리드는 투너미 계곡의 초입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하랑가 고원을 넘어오면서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자는 목적도 있고, 가능하면 투너미 계곡 너머까지 꼼꼼히 정찰을 마쳐 마지막에 있을지도 모를 변수를 없애자는 생각이었다.
우살리드의 이런 신중함은 매우 적절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저스틴과 토머스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우살리드가 투너미 계곡을 샅샅이 뒤지면서 적군의 매복이 있을 만한 지점들을 이잡듯이 살펴보았으나, 계곡의 삼분의 이 지점에 있는 커다란 폭포가 있는 곳이 이르기까지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폭포를 오른 쪽으로 우회하여 계곡을 오르는 길이 있기는 했으나, 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다.
우살리드가 폭포 위를 살피기 위해 몇 차례나 정찰대를 파견했으나, 누구도 폭포 위쪽으로 진입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정찰대가 특정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도저히 더 이상 전진을 계속할 수 없다는 보고가 반복되었다.
마침내 우살리드는 자신이 직접 정찰에 나서기로 했다.
우살리드가 화살 공격이 반복되었다는 지점에 도착해서 보니, 과연 절묘한 지형이었다.
가파른 데다 물기를 잔뜩 머금어 미끄럽기 짝이 없는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만 했는데, 그곳에 들어서기만 하면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니 도저히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여기에서 우살리드는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을 하고 말았다.
그는 이것을 북부에서 만약을 대비하여 만들어 둔 관문으로 보았다.
하랑가 방면에서 북부로 진입하려면 투너미 계곡만큼 적절한 곳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꼼꼼하게 조사를 해서 확인했다.
그렇다면 북부의 입장에서 투너미 계곡에서 가장 험한 곳에 극소수의 병사들만 배치해 놓더라도 만약의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으니, 그 정도의 대비를 한 것으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살리드가 살펴 보기에 폭포 위쪽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기는 했으나, 도저히 대군이 도사리고 있을 듯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살리드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약간 험한 지형들이 있기는 해도 아름답기 그지 없는 투너미 계곡의 풍광과 사람이 지나간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던 그간의 정찰 결과들을 종합한 결과, 이곳에 우살리드군을 막기 위한 대군은 없다는 결론을 이미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은연중에 하루라도 빨리 고개를 넘어 북부로 진입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살리드는 자기 자신과 최정예 레인져 부대 수십 명이 앞장 서서 지금 막혀 있는 지점을 일단 돌파해내기만 하면, 이후로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일단 물러난 우살리드는 예하 부대의 지휘관을 모두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열었다.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고, 우리 정찰대에 대한 대응이 있었다는 것은 북부에서도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비록 북부 자체에 우리를 막을 만한 군세가 없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황도에서 지원군이 급파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오늘 그동안 막혀 있던 폭포 주변을 직접 살펴 보았는데, 그곳을 막고 있는 병력은 소수였다.
설사 지원군이 온다 하더라도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폭포 지점을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돌파할 뿐만 아니라 곧바로 투너미 고개를 넘어 일거에 북부로 진입해야만 한다.
폭포를 우회하여 오르는 지형이 매우 험악하여 돌파가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이 앞장설 것이니, 부관들은 최정예 레인져 부대 50 명을 엄선하여 따르도록 하라.
또한 내가 막힌 지점을 돌파하는 즉시, 전군이 지체없이 뒤를 따르도록 하라.
우리는 그대로 고개를 넘어 북부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릴 것이다.
이상 !!!”
질문도 없고, 이의제기도 없었다.
이것이 그동안 우살리드가 군대를 이끌어온 방식이었고, 끊임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장수들과 병사들의 우살리드에 대한 무한 신뢰, 명령이 떨어지면 기필코 완수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바로 우살리드군의 힘이었다.
우살리드가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순식간에 기어오른 바위 위쪽에서 마주친 무인이었다.
우살리드는 이곳에 자신이 대적하기 힘들 정도의 무력을 지닌 장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저스틴과 상카, 두 소드 마스터가 정예병들의 단단한 방패진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오느라고 고생했소, 우살리드 장군.
나는 제국 중앙군의 정보부대를 맡고 있는 저스틴 브라스트라 하오.
세틴 사령관의 명을 받고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요.
이렇게 만났으니 오늘 신나게 한 번 겨뤄 봅시다.”
우살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사실을 세틴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
그 말 한 마디에 우살리드는 끝간 데를 알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운명이 여기에서 끝났구나 하는 직감에 몸이 떨려왔다.
저스틴 하나만 하더라도 우살리드가 최선의 상태에서 당당하게 맞붙는다 하더라도 힘겨운 상대였다.
하지만 저스틴의 말 한 마디에 이미 기가 꺾일대로 꺾여버린 우살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도망칠 길을 찾기 시작했다.
우살리드는 속속 올라오는 자신의 정예병들에게 즉각 돌격할 것을 명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바윗길을 말 그래도 미끄럼 타듯이 타고 내려온 우살리드가 뒤따로 오는 자신의 군대에 즉각 후퇴할 것을 명하려는 순간, 자신의 정면, 즉 우살리군의 후미 부근에서 엄청난 산사태가 일어났다.
저스틴의 별동대가 양쪽 산정 쪽에서 바위와 나무들을 쏟아낸 것이었지만, 그 양이 너무나 엄청났기에 언뜻 보기에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우살리드군의 퇴로가 막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살리드군 전체가 진입한 상태는 아니었으니, 산사태가 일어난 지점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이 깔려죽었고, 미처 진입하지 못한 병력들은 양분된 상태였다.
이는 저스틴 군이 미리 치밀하게 계산하고 준비한 상황 그대로였다.
망연자실한 우살리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채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갇혀있는 우살리드군 전체를 향해 그야말로 화살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폭포를 우회하여 오르는 길은 폭포의 오른쪽 사면이었다.
왼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감이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지형이었다.
큰 폭포가 있는 곳은 경사가 가팔라 우회해서 오를 길조차 없는 경우도 많았고, 양 측면은 경사가 가파른 만큼 서로 거리가 가깝기 마련이었다.
화살이 날아드는 곳이 바로 폭포의 왼쪽 사면 위쪽이었다.
그곳에는 정확한 수를 알기 힘들 만큼 새까맣게 몰려든 병사들이 활을 당기고 있었다.
위쪽으로는 우살리드조차 뚫을 엄두를 내지 못할 장수와 정예병들이 진을 치고 있고, 아래 쪽으로는 산사태라 할 만큼 막대한 양의 바위돌과 나무로 길이 막혔다.
레인져들이 지니고 있는 석궁으로는 응사도 하기 힘든 거리, 그것도 위쪽에서 내려다 보며,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대는 병사들.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저스틴과 상카, 토마스가 치밀하게 준비한 덫이었고, 우살리드의 순간적인 방심이 불러온 참사였다.
우살리드가 이런 처지에 빠질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도 않은 만큼, 그는 정신줄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장군께서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셔서는 안됩니다.”
먼저 정신을 차린 몇몇 장수들이 우살리드에게 퇴각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살리드는 참담하게 무너진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 속에서는 세틴이 이미 그의 행보를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는 저스틴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고, 자신이 여기서 살아나간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일순, 샬롬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끝간 데 없이 치솟아 올랐다.
우살리드는 세틴을 한 번 만나보고 난 이후, 가능하면 그를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리지만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큰 그릇이었고, 자신의 야망마저 초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진지한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왜 그토록 말이 되지 않는 샬롬의 망상에 놀아나야 했는지, 자책감에 진저리를 쳤다.
어느 순간 우살리드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지.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기는 해야지.
돌아간다고 무슨 수가 생길 것같지는 않지만......”
우살리드가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했다고 생각한 장수들이 양쪽에서 굳게 팔짱을 끼고, 억지로 끌다시피 하면서 전장을 벗어날 길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한 일은 아직까지는 위쪽에서 보병들이 돌격을 시작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저스틴군은 화살 세례를 충분히 쏟아 부어 우살리드군을 거의 완벽하게 무너뜨린 이후에나 보병을 투입할 예정이었다.
우살리드가 이곳에서 살아나간 것은 수하 장수들과 병사들의 헌신적인 보호와 노력이 있기도 했고, 천행으로 한 병사가 산사태가 일어난 곳에서 밖으로 빠져나갈 만한 구멍을 발견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전투도 아니고 ‘참사’로 불리게 될 이날의 전투는 우살리드의 북동부군이 거의 완벽하게 와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살리드는 불과 이, 삼천의 병사와 함께 물과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다시 험악한 하랑가 고원을 돌아가야 했다.
우살리드는 추격군이 있을까 염려하여 힘든 길을 재촉하고 또 재촉했지만, 저스틴은 추격군을 전혀 파견하지 않았다.
‘투너미 계곡의 참사’는 세틴이 평소에 그렇게 강조하던 기본 원칙들을 충실하게, 넘치도록 구현해낸 전투였다.
하지만, 충실한 정찰을 통해 꼼꼼하게 대비하고, 확신이 없는 전투에 병사들을 내몰지 않으며, 최대한 희생을 줄인다는 원칙은 확고하게 지킨 셈이었다.
세틴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몰살에 가까운 승리를 오히려 꺼렸을 수는 있었다.
전공을 생각한다면 사실 우살리드를 죽이거나 생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스틴은 별동대의 원래 임무가 우살리드를 저지하는 것이지 완전히 궤멸하는 것도 아니고, 우살리드를 격살하거나 사로잡는 것도 아니라면서 추격을 반대했다.
거의 희생 없이 치러진 투너미 계곡에서의 전투와 달리 하랑가 고원에서의 추격전은 이쪽도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까지 해서 우살리드를 잡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상카와 토머스도 그게 충분히 공감했기에 투너미 계곡의 전투는 그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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