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하는 황실
파이란의 말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세틴은 그가 아직까지 대권의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말로는 오디어스를 끝까지 옹위하겠다고 하나, 갈리온의 핑계를 대면서 어딘가 여지를 두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초 3, 4, 5 황자는 모두 모그란데와 손을 잡고 있었고 내심 모그란데가 자신을 지지해 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모그란데가 황도를 장악하면서 황자들을 모두 연금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 차렸으나, 연금에서 풀리고 나서 황태자를 옹립할 때는 또다시 모그란데의 지지를 얻고자 애를 썼다.
결국 오디어스가 황태자가 되었지만, 파이란에게는 아직까지 믿는 게 있었다.
갈리온이 아직까지 힘을 잃지 않고, 제국에서 가장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구도 많은 남부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이상, 언젠가는 자신에게 기회가 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5 황자 트리엄은 원래 군부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제국군과 근위대, 경비대에 그의 기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그의 네 형들에 비해서는 자신이 황위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뿌리 깊었다.
트리엄이 뜬금없이 큰소리를 쳤다.
“너무 걱정할 것 없소.
우리에게는 제국군과 세틴 사령관이 있고, 일전에 세틴이 공언한 대로 유사시에는 30 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데, 작은 걱정거리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모그란데가 자기 무덤을 팠지.
동부왕국의 군사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소.
세틴이 황도를 지켜야 하니 필요하면 내가 제국군을 이끌고 나가 반도들을 모조리 정리할 용의도 있어요.
황자라고 황도에서 호강이나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오.”
오디어스가 대놓고 야단을 쳤다.
“군사가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는 거야 ?
말 타고 사냥이나 다닌 주제에 무슨 제국군을 이끌어 ?
황자가 지휘하겠다고 나서면 장수들과 병사들이 없던 힘까지 내서 싸워줄 줄 아는 모양인데, 하다 못해 병사들하고 훈련을 한 번 해봤나, 장수들하고 전술 논의라도 해봤나.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은 자네한테 딱 어울리는 소리야.
괜히 헛꿈 꾸지 말라고.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라니 원.”
화가 잔뜩 난 트리엄이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꾸 세틴을 쳐다봤다.
무언가 자신의 체면을 살려줄 말을 바라는 눈치였다.
세틴이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한 마디 했다.
“5 황자님이 직접 전장에 나가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모그란데와 우살리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를 논하는 자리입니다.
현재 동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제국의 흥망을 좌우할 중대한 국면입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제국의 운명이 갈릴 수 있습니다.
경험 삼아 참전해 볼 만한 전장은 아닙니다.
지금 제국군이 증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최대로 잡아도 6 만 정도입니다.
물론 제 기본 방침이 정예화이기 때문에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
제국군 5, 6 만이면 적어도 서 너 배의 군세에 맞서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제국군의 정예도는 단지 병사들의 훈련과 사기, 장수들의 전술 능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병력을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랫 동안 손발을 맞춰온 장수들이 아니라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국군에서는 신분에 따라 지휘권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서부의 여러 영주들도 자신의 영지군을 해산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대해서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5 황자님께서 직접 전장에 나서겠다는 용기를 보여주신 점은 본받아 마땅합니다.
제국군에 몸담으시겠다면 백인장 정도부터 경험을 쌓으셔야 할 겁니다.”
트리엄으로서는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었다.
세틴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백인장부터 시작하라는 말에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
뭐 ? 날 보고 백인장이나 하라고 ?
아니, 폐하의 외손주라는 자가, 조카라는 자가 어찌 나한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
즉시 내게 사과하고 그 말 취소하게.”
세틴은 단칼이었다.
“황자님 한 분 때문에 제국군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우선 제국군 사령관부터 바꾸십시오.”
6 황자 맬덤이 은근히 고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트리엄 형님, 억지를 부릴 걸 부려야지 그게 뭡니까 ?
제국군이 세틴 개인 소유물도 아니고 엄연히 법과 관행에 따라 강력한 체계를 갖추어 가고 있는데, 조카가 어리다고 말도 안 되는 시비 거리를 만든 건 형님 자신이지요.
황태자와 사령관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뚱딴지같이 제국군을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소리를 얼마나 염치가 없어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더 창피를 당하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 하시지요.”
트리엄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자기도 제국을 위해서 앞장 서 싸울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연달아서 조롱과 꾸중이 이어지자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트리엄이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대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오디어스가 급히 수습에 나섰다.
“저런 생각없는 사람은 차라리 자리에 없는 편이 낫겠소.
세틴이 제국군 6 만으로 몇 배가 되는 군세에도 능히 맞설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설사 모그란데가 우살리드와 연합을 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
세틴이 말했다.
“승패를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은 지금의 제국군이 병력으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훨씬 강력하다는 말씀입니다.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연합해서 병력이 30 만이 된다 해도 쉽게 지지는 않습니다.
단, 제 생각에 둘이 연합할 가능성이 크지 않고, 그런 상황이라면 전략적으로 활용할 여지가 꽤 있습니다.”
골트릿이 말했다.
“애초에 우살리드는 모그란데가 힘으로 황실과 조정을 장악하고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황도로 진격하는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모그란데가 동부왕국들을 끌어들인다면 우살리드는 황도로 진격하기보다 모그란데와 맞서 싸우는 편이 더 명분 있는 일이 되지요.
그래도 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고, 우살리드가 어떤 자인지도 명확치 않은 상황에서 둘 간의 연합을 막으려면, 모그란데가 동부왕국을 끌어들인 사실이 명확해지는 순간 곧바로 그를 제국의 제일 큰 적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우살리드를 포용해서, 모그란데를 물리치는 데 협력하는 조건으로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방책도 고려해야 합니다.”
세틴이 즉시 찬성을 표했다.
“2 황자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살리드를 설득할 수 있다면, 모그란데는 그야말로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 됩니다.
동부왕국의 전력을 잘 모르지만, 제국군이 북동부군과 연합한다면 모그란데를 물리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살리드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보다 오히려 쉬울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런 얘기들은 모두 가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직접 맞상대를 해보지 않고서는 어느 하나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일단, 저는 출전할 채비를 갖추겠습니다.
우리의 예상대로 상황이 전개된다면 제가 직접 페링 전선으로 가야 여러 변화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모그란데가 동부왕국을 끌어들이면 마법 병단과 북부군 내부에서도 등을 돌리는 자들이 꽤 나올 것입니다.”
오디어스가 놀란 듯이 물었다.
“오, 벌써 그런 것까지 준비했단 말인가 ?
모그란데가 벌일 일을 꽤 오래 전부터 대비했다는 말이군.”
세틴이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약간의 조치를 했을 뿐입니다.
실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모그란데를 그냥 두고서는 황실과 제국의 안정을 기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지는 오래입니다.
모그란데와의 일전은 일단 북부군을 황도 밖으로 내보낸 후라 생각해서 그가 우살리드 토벌을 자청할 때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할 때지요.”
골트릿이 말했다.
“나도 세틴의 부탁을 받아 모그란데가 우살리드 토벌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여론을 조성하는데 힘을 조금 보탰습니다.
모그란데가 나름대로 전세를 뒤집을 묘책을 생각해냈다고 여기겠지만,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오디어스가 말했다.
“흠...... 이건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
조카가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내게도 미리 넌지시 얘기를 해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
왠지 나만 바보처럼 굴었다는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구만.”
세틴이 말했다.
“모그란데는 누군가에게 밀려서 결정을 내리는 걸 가장 싫어 합니다.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굴러갈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되지 않을 바에야 아예 한꺼번에 뒤집어 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사실 이런 저의 계획을 2황자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습니다.
황도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일은 제가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에 부탁드렸고요.
말씀드린 모그란데의 성격상 만약에 자기를 토벌전에 내보내려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면 결코 그에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 자신조차도 토벌전은 무조건 제국군이 한다는 점을 꾸준히 강조했습니다.
딱히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모그란데의 출전 선언이 사실상 외세와 연합하여 본격적으로 반역의 길로 접어드는 정황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었다.
애초에 모그란데와 북부군을 황도에서 벗어나 전선으로 내몰고자 하는 계획은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었으나, 문제는 황실 자체에 있었다.
황제가 사실상 부재한 상황에서 합심해서 난국을 타개해나가는데 힘을 모아도 부족할 마당에 황자들은 여전히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일, 이황자에게는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힘이 없었고, 이제는 황태자가 된 오디어스는 동생들을 휘어잡을 역량이 부족했다.
이런 마당이니 세틴이 황도를 비울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도 어려웠다.
황자들은 아무리 본인이 못났다 해도 나면서부터 주어지는 봉토가 웬만한 귀족 못지 않게 컸고, 평생 주종관계로 엮여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귀족들이 기본적으로 몇 명은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 황자들이 제각기 다른 마음을 먹고 호시탐탐 자신에게도 대권을 노릴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황도의 안정이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갈리온의 후원을 받는 사황자나 아직까지 별다른 야심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해도 황도와 재력에서 압도적인 영향을 가진 장인의 후원을 받는 육황자도 언제 어떤 일을 벌일지 안심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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