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의 빛을 귀순시켜라
바로 다음날 카우스가 세틴을 찾아왔다.
“소가주, 그대가 황명을 받들기로 약조하였으니 하루 빨리 채비를 갖추어 동부로 떠나도록 하게. 황제 폐하의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새날의 빛의 귀순을 받아들인다는 문서를 만들어 주도록 하겠네.”
그런 수작이 세틴에게 통할 리 없었다.
“카우스 백작, 명색이 제국의 외무대신이라는 사람이 무슨 일처리를 그리 대충 하시오. 내가 어제 밤새 역도의 귀순에 대한 전례와 제국법의 관련 조항들을 모두 살펴 보았소. 제국에 반역을 꾀한 무리가 하나 이상의 영지를 점령하고 공공연하게 제국에 맞선 사례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도 몇 번 되지 않소. 일단 반역을 꾀한 자들은 본인들이 원한다고 귀순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제국법에 따르면 귀순이라 함은 생사를 불문하고 사지를 결박하여 황제 앞에 무릎 꿇고 죄를 청하도록 되어 있소. 또한 역도의 처리에 관한 문제는 반드시 대전회의를 통해서 모든 결정을 하도록 되어 있소. 조정의 공론도 없이 날더러 달랑 문서 한 장 들고 가서 새날의 빛의 수장을 묶어 오라고 ? 브라스트라면 아카데미에 입학한지 3 년만 지난 아이라도 코웃음을 칠 일이오. 다 좋은데 일단 대전회의를 열어서 공론을 모으는 절차라도 거쳐야 할 것이오.”
세틴의 조리있는 반박에 카우스는 할 말이 없었다.
“하, 폐하께서 불명하시니 대전회의가 유명무실해진 게 현실이오. 해보나 마나 영양가 없는 소리들만 난무할 게 뻔하니 3 황자께서 그렇게 명하신 거요. 필요한 게 있으면 최대한 편의를 봐줄 것이니 그냥 진행하면 안 되겠소 ?”
“아무리 정국이 혼란스럽다 하나, 이럴 때일수록 원칙에 따라 정도를 걷지 않으면 혼란을 키울 뿐이라고 배웠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봅시다. 새날의 빛이 투항을 하면 조정에서 무슨 대가를 치를 것인지, 투항하지 않으면 어떻게 응징을 할 것인지 이 두 가지만이라도 공론이 서야 일을 진행해 볼 수 있지 않겠소 ? 내가 아무리 공명에 눈이 어둡기로서니 무슨 수로 새날의 빛을 설복시킨단 말이오.”
황명을 내세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자들만 봐왔던 카우스는 세틴이 내세우는 정론을 무시할 방도가 없었다.
“알았소. 3 황자 전하께 그대로 전하겠소. 다음에 다시 의논해 봅시다.”
카우스에게 세틴의 말을 전해들은 오디어스는 골이 아파왔다. 일을 맡게 될 주장이 요구하는 대전회의를 거부할 만한 사안이 아님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새날의 빛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대전회의에서 논의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대는 소리에 난장판이 되곤 했고, 대책다운 대책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오디어스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다시 그런 상황이 되어 특사 파견이 무산되는 경우였다.
황제의 특명에 따라 세틴을 새날의 빛을 귀순시킬 전권대사로 파견한다는 안건으로 대전회의가 소집되었다. 꽤 오랜만에 열리는 대전회의인지라 3 일의 말미를 두고 소집 날짜가 정해졌다.
대전회의는 형식상 대리청정을 맡고 있는 1황자를 비롯하여 성인이 된 모든 황자, 8 부의 대신과 참사관 둘씩, 제국군 다섯, 황궁근위대 둘, 수도경비대 셋, 그밖에 황명에 따라 특별 업무를 맡고 있는 귀족들 몇몇이 참석할 수 있었다.
이미 혼사 문제로 화제를 몰고 온 세틴이 황제의 특명으로 전권대사를 맡게 되었다는 화제성도 있어서인지 거의 모든 관료, 귀족들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특히 2 황자, 골트릿이 실로 간만에 대전회의에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언제나처럼 1황자를 허수아비처럼 세워놓고 3황자가 회의를 주재하려 나서려는 순간, 1 황자 월칸이 손짓으로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그간 명색이 대리청정이라 하나 내가 무능하여 뒷전에 물러나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소. 누구 탓을 할 생각은 없소. 다 내가 못나서 벌어진 일이지. 허나 조정에서 숱하게 회의를 하고도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 새날의 빛에 대한 문제를 폐하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세틴에게 전권대사를 맡기시겠다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 만은 아닐 것이오. 아마 2 황자도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대전회의에 얼굴을 비쳤을 것이오. 하여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내가 대신들을 비롯해서 여기 모인 모든 분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말이 있소. 세틴을 전권대사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황명으로 정해진 일이니 왈가왈부 할 수 없소. 하지만 그동안 무능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던 조정이 이번 만큼은 제대로 대책을 세워서 새날의 빛을 회유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잘 뒷받침해 주어야 할 것이오.”
월칸으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길고도 간곡한 발언이었다. 말을 마친 월칸이 3황자에게 이제부터 회의를 주재하라는 뜻으로 손짓을 보냈다.
월칸은 오디어스가 견제를 하거나 적대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기 주장이 없다시피 한 황자였기에 평소에도 오디어스는 월칸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편이었고 이례적으로 나서기는 했어도 딱히 흠잡을 만한 얘기도 없었다.
“1황자께서 말씀하신 대로요. 역도들을 회유하여 귀순시킨다는 게 말이 쉽지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보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요. 그들을 회유하자면 채찍과 당근이 필수일 것이요. 오늘은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자기 주장들만 늘어놓지 말고, 새날의 빛을 회유하는데 필요한 채찍과 당근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서만 공론을 모아주기 바라오. 그럼 외무대신이 준비한 내용이 있다 하니 먼저 들어보도록 하겠소.”
카우스가 두툼한 문서철을 들고 일어섰다.
“천년 제국의 역사에는 반역을 꾀하다가 귀순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굳이 사례를 일일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제국 법령에는 귀순하고자 하는 자에 대해 절차와 형식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예외없이 사지를 결박하고 황제 폐하의 면전에 엎드려 죄를 청해야 합니다. 이는 역모에 가담한 자들 가운데 이미 죽은 자가 있으면 역시 시체를 결박하여 함께 죄를 청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미 화해했으니 대충 넘어가자는 식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카우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새날의 빛의 수괴인 자칭 8 서클 마법사 옴비두스는 야심이 크고 수하들에 대한 지배력이 대단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동부 국경의 투앙 백작령을 점거하고 인접한 에반 왕국과 연계하여 저항하고 있습니다. 옴비두스를 투항케 하려면 그에 걸맞는 수혜를 주거나, 결코 저항을 용납하지 않고 전멸시키겠다는 제국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외무부에서 준비한 채찍과 당근은 마법사 전면 사면령과 제국군의 전력을 기울인 토벌계획입니다. 오늘의 논의는 귀순에 목적이 있는 만큼 특히 사면령에 대한 논의가 중요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여럿이 발언을 신청했으나 오디어스는 그 중에서 궁내부대신을 지명했다.
“사실 마법사 사면령이나 토벌 계획은 그간 대전회의에서 숱하게 논의했던 사안입니다. 늘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해서 문제였지요. 하지만 딱히 다른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면을 한다면 귀순을 전제로 조건부 사면을 할 것인지, 선제적으로 사면령을 내리고 귀순을 설득할 것인지만 정하면 된다고 봅니다. 저는 선제적으로 사면령을 내려 황제 폐하의 너그러우심을 보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에는 두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제국군과 각 영지에서 마법사들을 전력으로 활용할 길을 열어주는 것이 하나요. 적 도당의 결집을 약화시켜 개별적, 혹은 집단적 귀순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하나입니다.”
6 황자 맬덤이 발언권도 얻지 않고 반박에 나섰다.
“그 무슨 정신나간 소리요. 제국에 반역을 일으킨 자들을 사면부터 해주다니 ? 그게 제국의 대신이라는 사람이 할 소리란 말인가 ?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고만. 마법사 사면은 그들이 엎드려 빌더라도 심사숙고해도 모자란 사안이요. 궁내부대신이면 폐하를 보살피는 일이나 똑바로 하시오.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4 황자 파이란이 그런 맬덤을 나무랐다.
“맬덤, 대전회의네. 발언권도 얻지 않고 무슨 망발인가. 자네가 황자이기로서니 어찌 제국의 대신을 하인 나무라듯 하나 ?”
맬덤도 지지 않았다.
“그러는 4 황자는 발언권을 얻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 말 그대로 대전회의요. 어디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고 그러시오 ?”
5 황자 트리엄이 나섰다.
“자자, 다들 자중합시다. 폐하께서 부재중이라 하나 어디까지나 어전회의 아니요.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서 어쩌자는 말이오. 우리 황자들은 발언을 좀 자제하고 우리 대신들과 장군들 얘기를 좀 들어봅시다.”
세틴이 보기에 3, 4, 5 황자가 적어도 브라스트와 세틴 자신의 문제에 관한 한 한통속으로 돌아간다는 짐작은 얼추 맞는 것 같았다. 맬덤은 세 형들이 한통속으로 뭔가를 꾸미는 것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돌아가는 상황과 사람들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세틴은 최대한 발언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디어스가 돌연 세틴에게 물었다.
“전권 대사로 발탁된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세틴은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하나 ?”
“조정에 탁월한 식견과 경륜을 가진 분들이 즐비한데 제가 갑자기 조정의 대사를 맡게 되어 황망할 따름입니다. 기왕 제가 가야 한다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조정에서 좋은 안을 내주시기만을 고대합니다. 사면령도 그렇고 토벌계획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이 오늘 처음 듣는 얘기들이라 제 의견이랄 게 있겠습니까 ?”
트리엄이 딴지를 걸고 나섰다.
“폐하의 신임을 얻어 막중 대사를 맡았으면 당연히 있는 힘을 다해 책임을 완수해야지. 더구나 멀린이 감히 승상으로 부임하라는 황명을 거부하는 죄를 저질렀으니, 자네는 공으로 죄를 갚겠다는 자세여야 마땅하지. 의견을 말하라면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소견을 말하면 될 걸, 뜨뜨미지근하게 공을 떠넘기는 태도가 도대체 뭔가 ?”
다른 건 몰라도 ‘멀린의 죄’ 운운하는 것만은 넘어갈 수 없었다.
“죄라니요 ? 칙서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적법한 후계자를 보내 짐을 보필하게 하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어떻게 브라스트 대공의 죄가 됩니까 ?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씀은 절대 묵과할 수 없습니다.”
트리엄이 목소리를 높여 화를 냈다.
“폐하께서 폐지했던 승상직을 부활하면서까지 불렀으면 두말없이 따르는 게 도리지. 멀린이 승상직을 거부한 것만 갖고도 세상 사람들의 브라스트의 충성심을 의심하고도 남을 일이야.”
세틴의 목소리는 한층 가라앉았다.
“5 황자의 생각이 맞다고 치겠습니다. 그럼 죄인의 자식에게 조정에서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막중 대사를 맡기는 건 무슨 도리입니까 ? 그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지금 폐하의 황명을 거부하겠다는 말이냐 ?”
“제 말이 어떻게 그렇게 해석이 됩니까 ? 저는 있지도 않은 아버지의 죄를 운운하시는 까닭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브라스트 대공 전하나 저나 제국과 황제 폐하에 대한 충심에는 티끌만큼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대사를 앞두고 당사자인 저의 기를 죽여 일을 망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멀린의 죄’ 운운한 발언은 취소해주시기 바랍니다.”
생각없이 본심을 드러낸 트리엄의 경망스러운 발언으로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하기조차 힘든 지경으로 치달아버리자, 은연중에 트리엄을 원망하는 눈길이 많았고, 어떻게든 세틴을 특사로 보낸다는 결정이 중요한 3, 4 황자도 트리엄을 째려보기까지 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트리엄은 얼굴이 똥빛이 되었다.
“내 말이 다소 과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지. 나는 그저 세상에는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많으니 감안하라는 뜻으로 한 건데, 내가 말재주가 없어서 자네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군. 기왕 이렇게 된 마당이니 앞으로 멀린의 죄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앞장 서서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지. 아무튼 내 말은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이야. 다른 뜻은 없어.”
세틴도 두 손 모아 겸손의 뜻을 보였다.
“존장께 사과를 강요하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친의 일인지라 저도 앞뒤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존장에 무례를 범한 과오는 훗날 어떻게든 갚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치판에서 수십 년 굴러먹은 사람들 못지 않게 칠 때 치고 빠질 때 빠지는 세틴의 처신에 대전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이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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