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데옹 대전회의
브라스트 궁에서 가장 큰 건물은 코데옹이라는 이름의 원형 건물이었다. 대신들과 유력한 귀족들, 6 백작의 대리인들, 대공가의 주요 인물들까지 모두 참여하여 중대한 일을 논의하는 대전 회의는 항상 코데옹에서 열렸으므로, 코데옹은 대전 회의를 가르키는 이름이기도 했다.
브라스트 궁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코데옹은 정문에서 300 미르(미터와 거의 같은 길이의 단위) 가량의 거리에 있고, 거대한 광장의 양 옆에 각 부서의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목조인 여타 건물과 다르게 코데옹은 검은색 벽돌를 쌓아 지은 건물이었다. 웬만한 돌보다 단단하고 밝게 빛나는 벽돌을 구워내는 기간만 3 년이 걸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코데옹에 참여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번 회의에서 결정될 순행 사절단에 대해 누가 정사(正使) 맡게 될지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등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대공이 입장할 시간이 다 됐다는 통보가 있고서야 모두 제각기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회의 공간은 반원형으로, 원형 극장처럼 중앙을 내려다 보는 형태에서 중앙에 대공 자리가 높게 자리하고, 거기서 양 옆으로 계단이 나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멀린은 자신의 자리인 상석의 뒤쪽에서 불쑥 나타나는 방식으로 입장하였다. 회의장에 참석한 사람들의 편에서는 그 뒤쪽에 통로가 어떻게 나있을지 절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구조였다.
“대공 전하의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대공의 입장을 알리자 장내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인사를 드렸다. 멀린이 가로로 길쭉한 모양의 탁자 앞에 자리하며 손짓으로 다들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실로 간만에 코데옹에서 보게 되는군. 안녕하지 못한 사람은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거니 안녕하냐는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아다시피 오늘 논의할 주제는 3 년에 한 번 씩 파견하는 순행 사절단에 관한 문제네. 제 1 부리마가 그간 대신들이 의논해서 결정한 사항들을 먼저 소개해 주게.”
브라스트 공국에는 총리가 없었다. 대공 외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대신 부리마라는 직책이 존재했는데 일종의 비서 역할이었다. 부리마란 서무(書務)라는 의미로 문서 수발이나 돕는 사람들이라고 낮춰 부르는 의미가 있었다. 이 역시 대공 주변에서 호가호위 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붙인 직책명이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게 최고 결정권자에 가까울수록, 자주 접할수록 커지는 것이 그렇게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관리들 사이에서는 부리마들을 대신 못지 않게 높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대신들조차도 부리마를 총리부나 마찬가지라고 존중하고 눈치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제일 부리마가 6 백작령의 상황을 개괄하고 공국의 지원대책의 취지와 규모, 방식 등을 모두 설명하는 데는 30 분이 넘게 걸렸다. 순행 사절단의 임무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려던 차에 멀린이 제지하고 나섰다. 일부 졸거나 잡담하는 사람들까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됐네. 일단 거기까지 하지. 거두절미하고 이번 순행은 ‘구호 사절’이나 다름없네. 재해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고,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는 게 할 일이야. 대접받을 일도 없고, 체면이 서는 자리도 아니라서 대신들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네. 하는 수없이 이번에도 외무대신이 정사를 맡기로 했어. 명색이 공국 유일의 후작이라는 사람이 40을 갓 넘긴 나이에 나보다 더 늙었어. 그 아비도 나랏일이면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다 너무 일찍 가버리고 말았지. 올란드 후작, 앞으로 나서게.”
대공의 바로 앞쪽에 앉아 있던 대신들의 자리에서 일어난 율리 올란드는 아닌 게 아니라 추레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대신의 복장이 아니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노인네라 여길 만도 했다. 그가 공국에 유일한 후작이라지만 자치권이 주어지는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징세권만 있는 식읍(食邑)이 있을 뿐이었다.
“저는 다만 맡인 바 소임을 다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번 순행은 대공 전하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멀린이 믿음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부사를 비롯해서 수행 관료는 모두 열 명일세. 그리고 이번 사절단의 호위는 백작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의미에서 최대한 간소하게 하기로 했네. 흑룡기사단 일곱이 모두 따라 나설 거야. 셔틀리 만자 앞으로.”
대신들의 반대편의 무신들, 각 기사단장 중에 검은 색 가죽갑옷을 입은 셔틀리가 일어나 대중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들 알겠지만 흑룡기사단은 수는 적어도 공국 최고의 정예이네. 한결같이 일당백의 용사들이니 임무에 차질이 있을 거라고 보지는 않아. 평상시 대공의 근접 호위를 담당하던 사람들을 보내는 내 마음을 다들 잘 헤아려주기 바라네.”
흑룡기사단이 나선다는 말에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여기저기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순행은 구호 물자의 조달과 수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다들 알 거네. 그래서 슈타인 남작을 특별히 또 한 명의 부사(副使)로 삼기로 했어. 남작이 상인이고 관직이 없다고 해서 괄시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네. 내가 오죽하면 ‘일개 상인’에게 세습 남작을 주었겠나. 나랏일이라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고, 이문보다 대의를 앞세울 줄 알지. 매트 슈타인 일어서게.”
맨 뒷줄에 앉아 있던 매트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괜히 한 마디 해 봐야 고깝게 여길 자들이 많은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공가를 대표해서 참가할 공자는 13 공자 세틴으로 정했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사절단의 모든 결정권은 정사에게 있네. 공자는 그저 ‘얼굴 마담’이야. 몇몇 공자들이 서로 가겠다고 했지만, 이제 갓 공자가 된 세틴이 자청하고 나선 것이 가상하여 보내기로 했네.”
집안의 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멀린이었다.
멀린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길이 험로가 될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하네. 공자의 안위에 각별히 유의해주길 바라네. 정신나간 것들이 공자를 빌미로 무슨 수작질을 벌일지 아나. 쓸데없는 소리인 줄은 알지만 먼길 떠나는 자식을 생각하는 아비의 심정이야 누구나 같은 게 아니겠나. 그리고 공자는 아니지만 저스틴이 동행하여 세틴을 도울 거야. 세틴과 저스틴 나서게.”
반원형의 회의실 양쪽 구석에 서 있던 세틴과 저스틴이 앞으로 나섰다. 공자들은 오른쪽, 공자가 아닌 대공가의 인물들이 왼쪽이었던지라 둘은 서로 반대편에서 나서는 모양새였다. 세틴은 저스틴이 동행할 거라는 통보를 미리 받지 못했기에 약간 놀랐다. 멀린은 이유없이 그런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한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세틴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졸업 파티에 이어 코데옹에서까지 세틴이 주목받는 상황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니 멀린의 후계 구도가 이미 굳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추론조차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자식들에게 누구보다 엄하고 가차없는 사람인 줄은 다들 알 거네. 같은 대공가의 자식이라도 해도 벌써 세틴과 저스틴은 엄연히 신분이 갈라지지. 이것이 다 공국과 대공가에 일말의 보탬이 안되면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국물도 없다는 증거야.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적인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후계문제만큼은 정에 휘둘릴 일은 없을 거야. 누가 보더라도 공정한 방식과 기준으로 후계를 정할 것임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천명하는 바이네.”
잠시 뜸을 들인 멀린이 말했다.
“자, 이번 순행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한 내용은 모두 공개했어. 어떤 문제라도 의견이 있거나 건의할 사항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보게.”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다시 한 번 대공 전하의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브라스틴 백작령 대사, 루이 핀들입니다. 공국에서 마련한 식량 등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가련한 공국 백성들을 위해 좀더 성의를 보이실 수는 없는지, 배분은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정사로 임명된 율리가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마른 수건 쥐어짜듯 당신이 말하는 ‘성의’를 마련했소. 그리고 식량 부족분과 요청한 물자들이 오류나 과장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 배분 문제는 현지에 가서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루이도 만만치 않았다.
“존경하는 후작 각하. 말씀이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어찌 대놓고 휘하의 백작들이 올린 보고를 의심부터 하십니까 ? 제가 매일같이 이곳 프라움 백성들의 생활을 봅니다. 지금 브라스틴의 백성들이 참상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나 다름없이 풍요롭고 여유가 있습니다. 제가 공국의 재정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절반도 아니고 요청한 것의 30%도 안되는 지원이라면 ‘주고 욕먹는’ 상황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뜩이나 지친 기색인 율리는 더 이상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명색이 코데옹에서 순행 사절이 출발도 하기 전부터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어 애써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프라움도 똑같이 지옥같아야 한다는 말은 아닌 걸로 받아 들이겠소. 그리고 믿고 안 믿고는 저간의 수많은 사례들을 대사도 익히 알 것이니 더 말하지 않겠소. 이번 구호 물자는 대공과 대공비 전하의 일용 비용까지 줄여가며 마련했다는 사실만 말해 두겠습니다.”
“후작의 말이 사실이네. 나와 대공비의 일용 비용을 향후 일 년간 절반으로 줄인 거야 생색낼 일도 아니지. 프라움에서 매일같이 술판이나 벌이는 작자들의 돈을 울궈낼 재주가 있으면 대사가 직접 해보시든가. 브라스틴 백작을 대신하는 그대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구호 물자를 마련하느라 저 꼴이 되고 목소리마저 갈라진 후작을 보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 엎드려 통사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대는 뭘 그리 떳떳하고 당당해. 주고도 욕먹을 바엔 차라리 모른 척이라도 할까 ?”
갑작스러운 멀린의 호통에 루이도 잠시 놀라는 듯 했으나, 그렇다고 숙일 기색은 전혀 없었다.
“대공 전하, 어인 말씀이십니까 ? 브라스틴의 백성도 똑같은 공국의 백성입니다. 부디 대공다운 자애로움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지금까지는 내가 자애롭지 않아서 브라스틴 공국의 상황에 대해 알 자격이 없었다는 거지 ? 대사라는 직책이 공국에 이것저것 요구하기 위해서 있는 건 아니야. 각 백작령의 상황에 대해 수시로 보고할 의무도 있지. 백작의 요구사항들을 전하기 바빴지 언제 한 번 내게 브라스틴의 상황을 제대로 보고한 적이 있나 ? 나는 그런 기억이 없네. 다른 대사들에게 한 번 물어나 봐. 그들이 평상시 어떻게 보고를 하는지.”
여기서 조금 더 하면 대공의 입에서 나올 얘기는 뻔했다. 대공이 돌아가라면 가야지 별 수 없는 대사직이었다. 이런 식의 외줄타기를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지라 루이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사절단의 안전 문제 등에 대해 여러 얘기가 오갔으나, 대부분 대공에게 존재감이나 보일 요량으로 하는 하나마나한 소리들이었다. 인선에 대한 불만이나 다른 의견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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