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판
우살리드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령관께서 관대하고 지혜롭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브라스트 대공령에서 시작한 행보에 대해서도 좋은 얘기가 많더군요.
오늘 말씀이 간략하기는 하나 대략 무슨 의도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무조건 나를 믿고 따르라’는 얘기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그란데가 우리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제국군이 급할 일이 없기는 하지요.
하지만 만약 내가 모그란데를 보기 좋게 물리친다면 ?
그땐 우리가 반드시 제국군에 협력한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나는 딱히 모그란데를 막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하신다니 분명히 말하지요.
북동부는 초대 황제께서 하신 것처럼 천하에 북동부인의 힘을 과시하고, 제국을 제패하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으로 뭉쳐 있습니다.
그저 말로 하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황도로 진격하는 발걸음을 멈출 일은 없습니다.”
세틴은 옆방에서 둘 사이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기운을 감지했지만 굳이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몇 마디 말로 우살리드의 마음을 돌려 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북동부와 힘으로 결판을 내는 일만은 피하고 싶다는 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물론 제국군이 북동부와의 전투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굳이 결전을 감수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실 제국군은 모그란데와 전투를 시작한 거나 다름 없습니다.
북부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동부왕국군의 힘을 빼놓기 위한 작전이 이미 진행되고 있지요.
페링 진지를 한 두 번만 잘 사수한다면 모그란데를 이기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북동부가 황도로 진격하겠다는 의사를 굽히지 않는다면 저의 작전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모그란데의 편을 들 수는 없지만, 북동부가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상황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제국군은 직접 나서지 않고도 두 호랑이가 서로 싸워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지요.
군략을 아시는 분이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하실 겁니다.
제국군은 힘이 없어 도움을 바라거나 그럴 듯한 말주변으로 위기를 넘겨보자는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협상 결과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살리드가 언성을 높였다.
“사령관님과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령관께서는 오늘 꼭 북동부가 진격을 멈추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겠다는 말씀입니까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굳이 변복까지 해가며 여기에 올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오늘 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한다고 해도 서두에 말씀드린 저 나름의 기본 방침이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병사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거고,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추후 북동부의 발전을 위한 계획도 꾸준히 추진할 겁니다.
성공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설사 황도로 진격해서 장악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이 끝은 아닐 겁니다.
내가 서부 몇 지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30 만을 훌쩍 넘고, 5 개 지역에 총독을 임명하여 만반의 준비까지 마친 상황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전쟁에 그들을 하나도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정예화한 제국군 5, 6 만으로도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도 하고, 죄없는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조정에 협력하지 않고 있는 남부의 갈리온 후작과, 모그란데와 북동부가 모두 힘을 합친다 해도 제국군을 이기기는 힘들 겁니다.
일단 한 번 결전이 벌어지고 나면 돌이킬 방법이 없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하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우살리드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세틴의 입을 통해 직접 힘의 우열에 대해 듣고 나니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소 과장이 있을지는 몰라도 세틴이 말을 크게 지어내서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내 혼자의 생각으로 황도 진격에 대한 입장을 바꿀 수는 없고, 앞으로도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모그란데와의 교전에서 협력할 방안과 조건을 논하는 자리일 거라고 생각했지, 다짜고짜 황도 진격을 멈추라는 요구를 들고 나올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황도 진격에 대한 입장 변화가 없으면 모그란데와의 교전에서 협력은 없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모그란데가 온갖 수를 동원해서 병력을 불릴대로 불려 놓았지만, 사실 나는 그를 별로 두려워 하지 않아요.
모그란데는 정치적인 술수에는 능하지만 전쟁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막상 한 번 붙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15 만의 병력이라는 게 그 자체로 엄청나기는 하지요.
하지만 군대를 운용해 보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입니다.
그 중에서 기사급 이상의 1 만 여를 제외하고는 전투에 목숨을 거는 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북동부군이 두렵습니다.
질까 봐 그런 것이 아니라, 북동부군을 무찌르려면 우리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행보에 대해 많이 들으셨다니 제가 꽤 많은 전투에서 진 적도 없고, 적과 아를 통틀어 많은 희생을 낸 적도 없다는 사실도 아시겠지요.
그래서 전장에서 단련된 정예군이 상당수 존재하는 북동부군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내가 북동부군을 두려워하는 만큼 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대비도 철저히 해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미 샘프라 장군이 이끄는 궁병부대를 경험해 보셨으니 아시겠지요.
우리가 북동부군을 상대한다면 한층 강화된 활로 무장하고, 충분한 훈련을 거친 5 만의 궁병대를 상대하셔야 합니다.
그쪽도 눈과 귀가 열려 있을 테니 제가 이번에 개발한 봉시진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담하건데 레인저 부대가 용감하고 잘 싸운다지만 봉시진에는 꽤나 애를 먹을 겁니다.”
우살리드가 실실 웃었다.
“하하, 이거 겁을 너무 주시네요.
누구나 계획은 있지요.
하지만 싸움은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막상 붙어 볼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아무튼 사령관님의 생각은 잘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은 변함이 없습니다.
많은 말씀을 들었으니 답례로 저도 하나만 알려 드리지요.
레인저 부대가 부리는 설인족은 일반적인 전투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그동안은 진지를 사수하는 데만 치중해서 한 번도 선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답변하기 곤란하시면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령관님의 목표는 제위입니까 ?”
세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게 엘프 공주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가 절 만나면 늘 묻는 게 바로 황제가 될 생각이냐입니다.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가끔 하지요.
제 주변에는 말은 하지 않아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기준이 있지요.
저는 제국에서 유일한 대공가의 막내이자 황제의 외손자로 태어나 누구도 부러울 게 없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저 스스로의 힘으로 후계자의 지위를 획득했고, 지금은 제국군의 사령관으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권력자의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그 동안 저를 움직이게 한 동력은 ‘제국의 귀족은 썩었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집안의 형님들과 브라스트 가문에 빌붙어 무위도식하는 수많은 자들을 보고 자라며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썩은 귀족들이 다스리는 제국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 귀족의 일원으로 무조건 귀족을 배척하자는 뜻은 아니나, 지금 천년 제국에는 백성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뒤바꿀 바람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싸우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황도로 향하는 북동부인의 발길을 멈추고자 하는 뜻도 같습니다.
북동부인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데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만하면 제 뜻은 충분히 전했습니다.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면 즉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다면 황제의 자리에 누가 오르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우살리드가 말했다.
“오늘 만남은 저의 예상과도 달랐고, 사령관님도 제가 생각한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앞으로 전장에서 만나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겠지만, 제게도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사령관님을 응원하고픈 마음이 듭니다.”
우살리드와의 만남에서 세틴이 거둔 가시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으나, 두 영웅들의 첫 만남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모그란데가 군영을 벗어나 페링 진지가 바라보이는 곳에 진을 쳤다.
비전투 인력까지 치면 20 만에 가까운 병력이 주는 위압감은 확실히 어마어마 했다.
모그란데와 우살리드의 진지전에 대해 세틴은 제국군을 직접 개입시키는 일은 일단 피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제국군의 입장에서 두 호랑이 중에 하나가 압승을 거두게 되면 좋을 일이 없었다.
누가 이기든 결국 제국군과 자웅을 겨루게 되니, 가능하면 서로 피터지게 싸워 양패구상을 하는 편이 최선이었다.
세틴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미 탈주한 북부 영지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을 북부군 내에 퍼트렸고, 동부왕국들이 참전하고 있는 동부왕국군에 대한 지원을 끊을 것이라는 소문도 함께 퍼뜨렸다.
당장은 직접적인 효과가 나지 않더라도 북부군과 동부왕국군의 군심이 상당히 흔들릴 것은 확실했다.
세틴은 만약에 모그란데가 일전을 벌여 패배라도 하는 날에는 이미 흔들린 군심이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보았다.
우살리드가 진지전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파악된 바가 없었다.
그도 나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는데, 계속 진지를 사수하는데 만족할지,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여 모그란데군을 일거에 무너뜨릴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틴은 일단 페링 진지에서 한 번의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는 관망하기로 했다.
제국군의 지휘부가 통째로 옮겨와 임시 본부를 차리고 교전 상황을 관찰할 준비를 마쳤다.
다른 곳에서는 봄 농사 준비가 한창이었으나, 페링 진지 주변의 옥토들에는 농부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완만한 경사지에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자태를 자랑하고, 윙윙거리는 벌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페링이 드넓은 개활지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경사지이고, 페링 진지는 그 중에서도 경사가 꽤 급한 지역에 자리를 잡아, 멀리서 보기에 단단한 성채와 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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