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연속
4 황자 파이란이 질롱 공작을 지원하고 나섰다.
“사령관의 말이 지극히 타당하오. 아무리 많은 군세를 지원하는 영주라도 독자적인 지휘권과 작전권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오.”
3 황자가 발끈했다.
“그러면 누가 황도에 와서 우리를 도우려 하겠소. 사령관의 주장이 말은 그럴 듯 하나 현실을 도외시한 주장일 뿐이오. 군사들을 징발하여 동원하고 그들을 무장시키고 먹이고 재우는 것을 모두 영주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오. 만약 아무도 와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제국과 황실이 끝장날 것이 뻔한데, 그런 상황이 되면 사령관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오 ? 아니면 그 모든 비용을 제국군이 감당하겠다는 것이오 ?”
반박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으나 질롱 돈프로스트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3 황자께서 지적하신 바를 제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내가 목숨을 열 개 바쳐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모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민들에게 제국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지 않다면 제국이 유지될 희망도 없습니다. 충심으로 뭉친 군대라면 우리가 노스롭에 비해 병사수가 절반이더라도 이길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병력이 두 배가 되더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사정이 다급할수록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제국 상비군과 수도경비대를 합하면 3만이 됩니다. 제국 최고의 정예부대지요. 영주들의 군세가 얼마가 오든 제국군을 중심으로 막아내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내가 목숨을 걸겠습니다. 야심만 가득한 어중이 떠중이들이 몰려들어서 난장판이 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습니다.”
제국의 사령관이 스스로 목숨을 걸겠다고 나오자 3 황자도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피워봐야 자신의 주장이 관철될 가능성이 없었다. 어차피 모그란데는 올 것이었다. 모그란데에게 질책을 받을 것이 두려웠으나, 모그란데가 황도에 입성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소. 사령관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입씨름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소. 당장 대책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니 내가 양보하겠소.”
대전회의가 서둘러 마무리되고 글재주가 좋기로 정평이 난 호아니가 포고령 작성을 맡았다. 글체의 유려함보다는 대전회의와 각 세력의 의사를 적절히 반영한 글을 빠른 시간 내에 작성해낼 적임자가 호아니라는 데에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그렇게 나온 포고령은 다음과 같았다.
‘제국의 망나니 노스롭 후작이 황실과 조정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짐은 노스롭의 작위를 즉시 박탈하고 그를 제국 백성의 적으로 선포하노라. 그의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 없고, 영주들을 핍박하고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괴롭히는 작태가 가히 도적이나 다름없다. 도적의 기세가 자못 흉악하니 제국의 백성들은 한결같이 그를 원수로 여길 것이며, 전국의 영주들은 즉시 있는 힘을 다하여 노스롭의 발호를 막도록 하라. 영주들은 가능한 빨리, 최대한 군사를 동원, 황도로 향하여 제국군에 합류하라. 제국군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제국 최대의 적을 무찌르는데 협력한 모든 영주들에게 짐은 섭섭지 않게 보상을 제공할 것이다. 이상. 제국력 1043년 가을, 제국 황제 하만’
세틴은 사령관 질롱이 주도권을 거머쥔 듯 보이는 상황이 믿음직하지 않았다. 질롱에게 무슨 복안이 있을지는 모르나, 황도로 달려온 영주들이 고분고분 그의 뜻을 수용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영주는 몰라도 모그란데 공작은 무슨 일을 꾸며도 이상하지 않을 자였다. 슬슬 황도에서 몸을 뺄 준비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질롱에게서 뜻밖의 제안이 왔다.
노스롭에 맞설 두 개의 선발대 중 하나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제국군 주력 2 만명을 두 개의 군단으로 편성하여 먼저 내보내는데, 제국의 백작위와 무위를 감안하면 1등급 장군도 가능은 하나 일단 2 등급 장군으로 임명하여 하나의 군단 책임자로 삼는다는 제안이었다.
일단 주력 2만을 먼저 내보내는 의도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상황이 질롱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지 않을 것이기에 만약의 상황에 안팎에서 상응할 태세를 갖추려는 의도였다. 거기에 최근 높아진 세틴의 명성과 브라스트라는 배경을 활용하려는 포석으로 보였다.
황도에서 미적거리고 있어 봐야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시점에 질롱의 제안은 세틴에게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덥썩 받아 들이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았기에 우선 질롱에게 독대를 원한다는 전언을 보냈다. 질롱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굳이 이 만남을 비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세틴은 당당히 제국군 사령부를 방문했다.
질롱 돈프로스트 제국군 사령관은 넓은 사령관실에서 단독으로 세틴을 맞았다. 세틴이 살펴보니 주변도 깨끗이 물린 상태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브라스트 가문의 소가주 세틴입니다.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질롱은 빙그레 웃으며 세틴을 반겼다.
“어서 오게. 진작부터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별로 없었네. 일전에 백작위 축하 파티에는 일부러 가지 않았네. 선발대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갑작스러웠을 텐데 이렇게 만남에 응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하네. 주변은 모두 멀리 물려두었으니 오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 보세.”
자리를 잡고 마주 앉자마자 세틴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움비두스에게 전권대사로 파견될 때까지 3, 4, 5 황자와 그들을 지지하고 있는 모그란데 공작, 갈리온 후작, 그리고 사령관님이 모두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그란데 공작의 입성을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질롱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세틴을 보며 말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짚고 있군. 엄밀히 말하자면 세 황자가 한통속으로 돌아간 적은 없었네. 모두의 이해가 일치했던 유일한 지점은 새날의 빛과 브라스트를 동시에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것이었네. 우리는 옴비두스가 모그란데의 수하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몰랐고, 자네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지만, 브라스트를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황도의 거의 모든 세력의 관점은 일치했었네. 모그란데가 처음에 제안한 계획은 자네가 어떤 합의를 하고 돌아오더라도 새날의 빛과 브라스트를 한통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었네. 우리는 자네가 옴비두스와 합의를 하고 돌아온 뒤에야 모그란데에게 완전히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결과는 자네도 알다시피 세틴 브라스트만 영웅으로 부각되었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완벽한 각본이었지. 모그란데는 정녕 무서운 자일세. 우리가 무슨 대비를 하든 그가 황도에 입성하는 순간,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을 걸세.”
세틴은 의혹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는 의심을 하지 않으십니까 ? 저도 모그란데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
“자네가 모그란데의 하수인인가 ? 그렇다고 해도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모그란데와 브라스트가 결코 한 배에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모그란데는 어떤 경우에도 브라스트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어. 그림자의 배후가 모그란데라는 소문을 들어봤는지 모르지만, 사실 그림자는 모그란데가 오래 전부터 직접 키운 조직이네. 영지 순행 중에 그림자의 습격을 받았다지 ? 멀린 대공과 자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모그란데가 내미는 손을 선뜻 잡을 리가 없다고 보네.”
세틴이 다시 물었다.
“서둘러 선발대를 내보내려는 이유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안팎으로 호응할 태세를 갖추기 위함으로 보았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제국군 내에도 모그란데 공작의 눈과 귀가 있는 것은 물론 그의 손과 발이 될 자들이 적지 않을 터인데 선발대가 나가는 것이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걸세.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국군 내에서도 내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장군급의 인재가 별로 없네. 선발대 2 만이라고는 하나 사실 제국 상비군은 최하 십인장급 이상의 최정예일세. 1 만 명의 한 군단이 유사시에는 10만의 군세를 이끌 수 있는 셈이지. 그런 중임을 맡길 만한 경력과 능력을 갖춘 자 중에서 내가 믿을 만한 자는 유일하네. 그래서 다른 한 명으로 자네를 선택한 거지.
군단을 이끌고 출정한 장군은 군단에 대한 무제한의 권한을 갖게 되네. 휘하 장수, 병사들의 생사여탈권은 물론이고, 현장 상황에 따라서는 상부의 지시마저 거부할 수도 있네. 물론 그만큼 책임도 커지지. 솔직히 자네가 그것을 감당할 역량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모그란데가 황도에 온 후 어떤 식으로 일을 벌일지도 예단하기 힘들어. 나는 단지 변수를 만들어 두고 싶을 뿐이네.
최악의 경우, 선발대로 나갔다가 노스롭와 모그란데 사이에 끼어 양쪽에서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네. 나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네가 비상한 능력을 발휘해주기만 바랄 뿐이네. 이런 모험이라도 할 수밖에 없는 나도 스스로 무기력하다고 여기고 있고, 자네가 이런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거나 나를 믿지 못해서 거부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네. 어쩌겠는가 ? 한 번 해볼 텐가 ?”
세틴이 다짐을 하듯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즉시 선발대를 파견한다는 결정과 제가 한 군단을 맡는다는 결정을 사령관님이 관철시킬 수 있겠습니까 ?”
질롱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가능할 것이네. 서둘러 아가란 강에서 대치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이 있고, 이미 포고령으로 노스롭에 대한 토벌을 제국군의 편제 하에 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네. 설사 반대가 있다 해도 내가 밀어붙이는데 무리가 없지. 오히려 우려스러운 점은 세틴 브라스트를 장군으로 삼는다는 인선이 될 걸세. ‘어떻게든 세틴을 황도에 잡아둔다’는 것은 3, 4, 5 황자가 모두 합의했던 대원칙이었거든. 표면적으로는 자격을 문제 삼고 나올 걸세. 군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자네가 감당할 수 없는 자리라는 식으로 말일세. 군령을 받고 전장에 나서는 장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해 줄 보증일세. 당사자가 자신 있게 나서주어야 하고, 대전회의에서 그것을 강력하게 지지해 줄 세력이 필요하다는 거지.”
세틴이 말했다.
“대전회의에서 제국군 참가자들은 일치된 의견을 낼 수 있습니까 ? 그것만 가능하다면 다른 지지세력은 제가 준비해 보겠습니다.”
질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현재 대전회의에 참여하는 장군들 중에는 모그란데와 밀접한 하수인이 있지는 않을 것이고, 사전에 단속할 수 있을 거네. 그런데 다른 지지세력이라면......”
“확실치 않기 때문에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4, 5 황자의 지지만 가능하다면 충분히 대세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 중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4, 5 황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군사에 관한 일에 다른 대신들이 큰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네. 그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세틴이 결심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령관님의 솔직하신 응답과 저에 대한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 나름대로 사령관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아직 서로 간의 신뢰가 깊다 할 수는 없으나 오늘의 만남을 계기로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노스롭에 대한 선발대 파견 문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질롱의 요구에 따라 긴급 소집된 대전회의에서 노스롭의 진격을 막을 유일한 기회는 아가란 강을 건너기 전 뿐이기에 시급하게 작전을 전개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제국군 2 만을 두 개 군단으로 편성하여 급파한다는 계획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노스롭 토벌 작전의 전권이 사령관에게 있다는 포고령이 결정적인 명분이었다.
두 선발대 중 하나를 세틴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맡긴다는 안은 3 황자와 카우스를 비롯한 몇몇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제국군 사령부의 일치된 의견이라는 점과 3 황자를 제외한 모든 황자들이 세틴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대세가 기울었다. 특히 1, 2, 6 황자가 모두 적극적으로 세틴을 최적임자로 추켜세운 것이 컸다.
그리하여 세틴은 일약 2등급 장군이라는 군직을 갖게 되었고, 노스롭 토벌군의 제 2 선발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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