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어스의 발악
세틴이 간단한 말로 사죄까지 한 마당에 오디어스가 계속 세틴을 질책하는 분위기로 끌어가기는 어려웠는지 말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조문을 마쳤으면 서둘러 황궁으로 올 일이지 여기서 뭘 하고 꾸물거리고 있나.
설마 내가 친히 여기까지 발걸음을 할 때까지 기다린 건가 ?”
세틴이 말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
황자님들과 돌아가신 월칸 전하의 생전 모습을 되돌아 보고, 이 황자 전하의 건강을 걱정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문이랍시고 인사나 올리고 꽃 한 송이 놓고 가기에는 일 황자 전하께서 제게 배풀어 주신 은덕이 너무 큽니다.
황태자 전하께는 제가 내일 찾아 뵙고, 그간의 경과에 대해 상세한 보고도 드리고 앞으로의 일도 상의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일 황자 전하에 대해 애석한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세틴의 대답은 사실 일반적인 예에 비추어 나무랄 데 없는 말이었다.
오디어스도 더 이상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걸기는 민망했는지 말머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일전에 내가 보낸 편지에는 성의도 없고, 예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답변을 보냈더군.
그 일에 대해서 내가 계속 추궁할 생각은 없지만, 자네에게 사과는 받아야겠네.
어찌 천년 제국의 황태자에게 그리도 불손한 언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
세틴은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만약 그 편지의 내용을 까발리고 공론화한다면 결코 황태자에게 좋을 일이 없으련만 굳이 사과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세틴은 순간 한 번 들이 받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기 힘들었지만, 최대한 절제를 하여 간단하게 뜻을 밝혔다.
마냥 받아주기만 해서는 좋을 일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굳이 그 일을 공론화하시겠다면 저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동석하고 있던 세 황자들의 눈이 빛났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명백하게 황태자와 세틴이 대립하고 있었고, 이것은 최근 독주를 거듭하고 있는 황태자를 견제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안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오디어스가 세 황자들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됐네, 됐어.
고인의 영전이니 그쯤 하도록 하세.
어른인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지.”
그러더니 엉뚱하게 옆에 시립한 시종장을 꾸짖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할 말을 아마도 그 시종장과 상의했을 거라는 사실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오디어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너스레를 떨었다.
“아랫것들을 모두 내보내고 우리 식구끼리 오붓하게 일황자도 그리고, 또 여러 집안 일에 대해서 얘기도 나누도록 하세나.”
그러더니 시종장을 포함해서 동행했던 대신들과 관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내보내고 털털한 자세로 동석을 한 오디어스가 꺼낸 말은 또 엉뚱한 얘기였다.
“우리끼리니까 말이지만 저스틴 백작 말일세.
그 사람이 아주 걸물이야.
세틴이 그 동안 신분을 앞세워서 아랫 사람처럼 부렸다지 ?
이번에 큰 전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아까운 사람이 묻힐 뻔 했어.
세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세틴은 오디어스의 속셈이 뻔히 들여다 보였으나, 짐짓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저스틴 형이 대단한 인재인 것도 사실이고, 하마터면 제국이 큰 위기에 처할 뻔한 일을 막는 대단한 전공을 세운 것도 사실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좋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스틴 형이 제게 유감이 있는지는 형에게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디어스의 표정이 또 붉어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정녕 모른단 말인가 ?
저스틴은 결코 자네 밑이 있을 사람이 아니야.
저스틴이 자신은 제국군 정보부대 중 하나를 맡고 있는 부대장이고, 이번에 별동대의 임무를 맡았으나 임무가 종료되었으니 복귀를 해야 한다더군.
내가 아무리 다른 직위를 주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야.
그러니까 자네가 저스틴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지, 안 그런가 ?”
세틴이 담담하게 답했다.
“저스틴 형이 황태자 전하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 하시기를 저도 또한 바라 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법도상 임무를 마친 부대장이 일단 복귀하고 신고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일의 절차를 순리대로 따르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황태자께서 붙드시는 바람에 미처 복귀를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제 제가 황도에 왔으니 약식으로라도 복귀 절차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군직의 승진은 제국군의 소관이니 그 문제까지 매듭을 짓고 나서 황태자께서 어찌 쓰실 것인지를 정하시지요.
그렇게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세틴이 조곤조곤 사리를 따져 설명하자, 오디어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세틴이 저스틴을 어떻게든 자기 밑에 붙잡아 두려 한다고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야 뭐......
아무튼 저스틴은 내 사람일세.
조만간 아주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야.
이제부터 저스틴은 자네가 그리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게 되겠지.”
세틴이 한 마디로 답했다.
“저스틴 형을 함부로 대한 적 없습니다.”
세 황자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오디어스와 세틴 사이에 오가는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저스틴을 세틴에 대한 대항마로 쓰려는 오디어스의 의도는 분명하게 읽혔다.
다만 세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오디어스의 말에서 맹점을 간단하게 짚어 반발하고, 오디어스의 의도를 모를 리 없을 세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다.
갑자기 5황자 트리엄이 끼어들었다.
“아니 형님은 황태자가 되어서 형제 간에 이간질이나 하고 그러시오.
세틴이 형님 뜻에 반대하는 것도 없고, 정론대로 답하는데 막힘이 없는데 무슨 시비가 그리 많소 ?
식구끼리 오붓하게 정담이나 나누자더니 고작 그게 정담이란 말이오 ?”
트리엄다운 돌직구였다.
오디어스도 스스로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라릴 뿐 별 말이 없었다.
4 황자 파이란이 교묘한 시점에 교묘한 말투로 포문을 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스틴의 공이 하나라면 세틴의 공은 적어도 열, 아니 스물도 넘을 것이오.
저스틴이 투너미 계곡에서 우살리드를 무찌른 것도 세틴이 미리 우살리드의 계획을 간파하고 대비했기에 가능했다지 않습니까.
저스틴 백작도 그 점을 누차 강조했다고 들었소.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런 식으로야 어디 세틴을 견제할 수 있겠습니까 ?”
노골적으로 오디어스의 의도를 비웃는 말이었다.
오디어스가 발악하듯이 외쳤다.
“내가 무슨......
내가 언제......
세틴을 견제하다니 무슨 그 따위 말이 있어 ?
세틴, 이건 파이란 저놈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너와 나를 이간질 하는 소리이니 결코 귀담아 들을 필요 없다.
네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고, 지금처럼 안정되어가는 제국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어.
세틴, 네가 나를 오해하면 제국에 그것보다 큰 불행이 없단다.
날 이해해줄 거지 ?”
오디어스의 말은 갈수록 애절하기까지 할 정도로 들렸다.
세틴은 참으로 난감했다.
다른 황자들의 지적은 너무 당연했고, 이런 상황은 오디어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어린애도 아닌 황태자를 어르고 달랠 수도 없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도 없는 사정이 세틴에게도 있었다.
세틴은 오디어스가 결코 황제가 되어서는 안되기도 했지만, 당분간 황태자를 끌어 내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견제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주위 사람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황태자 전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달과 입지를 위해서 허튼 소리를 지껄여대는 자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리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전 제위에 뜻이 전혀 없습니다.
‘세틴이 제위를 노린다’는 전제로 하는 말들은 믿지 않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로 그런 믿음이 없다면 앞으로 닥칠 많은 난관을 황실과 조정이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병사들을 끌고 가서 혼구멍을 내주면 되는 일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 일이야 언제든 저를 부려주시면 됩니다.
천년 제국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새롭게 기반을 다지려면 우리가 함께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할 겁니다.
만만치 않은 반적들을 대부분 무찔렀고, 제국의 재정문제도 거의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정에 무엇을 요구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
제가 간곡하게 외삼촌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세틴이 제위를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는 생각을 거두어 주세요.
누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그런 전제라면 혼란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세틴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진심을 밝힌 셈이지만, 황자들이 곧이 곧대로 받아 들였을지는 미지수였다.
세틴도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었다.
삼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정치판에 뛰어든 사람이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말처럼 믿기 어려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
이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권력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사람은 있어도 나름의 사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지 않은가 ?
어려서부터 권력을 둘러싼 아귀다툼 속에서 살아온 황자들에게는 쇠 귀에 경읽기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세틴이 굳이 제위에 뜻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한 이유는 적어도 황태자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서였다.
‘세틴은 제위에 뜻이 없다고 스스로 여러 차례 선언했다’는 말을 황태자가 무기로 사용할 일이 적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황태자가 저스틴을 세틴에 대한 대항마로 키울 생각을 했다는 점은 세틴의 생각에는 호재였다.
세틴은 형제의 정은 물론 검술의 스승으로 저스틴을 대해왔고,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아도 저스틴은 세틴을 무척 아끼고 있음을 세틴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저스틴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처신에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오디어스를 위해 세틴에게 맞선다 ?
세틴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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