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총독 회의
세틴이 골트릿의 장례를 중시하는 이유는 단지 개인적인 인연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겁난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기존 황실의 권위를 기회로 골트릿의 장례를 활용할 생각이었다.
황궁을 말 그대로 깨끗이 청소해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세틴은 그나마 골트릿 같은 황자가 있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각인하여 최소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차기 황제를 옹립하는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본격적인 장례절차가 시작되는 다음날 오전을 골트릿의 빈소를 지키며 보낸 세틴은 오후가 되어서야 나머지 네 총독을 한꺼번에 불렀다.
시간상 도저히 한 사람씩 따로 만날 수가 없는 탓이었다.
나바니아가 맡고 있는 브라스트, 페드로가 맡고 있는 에메랄드 호변의 서부, 베그던의 북부, 푸스킨의 북동부는 각기 지역 실정이 판이하게 다르고, 출신과 성향도 천차만별이었다.
나바니아는 브라스트의 유력한 귀족이고, 페드로와 푸스킨은 제국군 장군이며, 베그던은 북부의 영주이자 북부군 사령관을 역임한 바 있었다.
나바니아는 원래부터 나바니아산 강철과 무기로 대외 무역에 일가견이 있었던 데다 브라스틴의 반란을 잠재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바 있어, 브라스트 총독이 되면서 날개를 단 듯 승승장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바니아 백작은 처신이 신중한 사람으로 감히 브라스트 대공을 대체할 실력자로 떠오를 야심을 품지는 않았다.
차기 브라스트 대공인 세틴이 제국 전체에서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당에 헛된 꿈을 꾸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세상의 큰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고, 일방의 영주로서 자기 땅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던 시기는 끝났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바니아의 영주로서가 아니라 브라스트의 총독으로 무엇보다 6백작령 전체의 상업, 무역 증대를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페드로가 총독인 에메랄드 호변의 서부는 원래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에메랄드 호 근처에서 출토되는 양질의 점토가 많아 일찍이 도자기 산업이 발달해 있었고, 호수 남동 방면에 방대하게 펼쳐진 늪지대에서 나는 카토시라는 풀은 최고급 옷감을 만드는 재료여서 의류 생산도 제국에서 으뜸이었다.
그밖에도 고급 건축자재로 쓰이는 벽돌과 에메랄드 호수 동쪽에서 주로 생산되는 면화 등 풍부한 특산물을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에메랄드 호변의 영주들은 이재에 밝았고, 세틴이 노스롭을 토벌할 때에도 가장 많은 재정과 물자, 인력을 공급해준 곳이었다.
원래 그런 환경인 만큼 군상 체계를 구축하는 데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서부의 특산물들이 판매되지 않는 지역이 없다시피 할 정도였으니, 군상이 운송과 호위, 그리고 안정적인 판매까지 책임져 주는 상황을 누구보다 반긴 사람들이 바로 서부 귀족들과 상인들이었다.
서부의 가장 큰 숙제라면 에메랄드 호수와 아가란 강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에메랄드 호가 아가란 강의 가장 큰 수원지는 맞는데, 에메랄드 호의 남동 쪽으로 방대한 늪지대로 물길이 퍼져 나갔다가 다시 모이면서 아가란 강으로 합류하는 지형이어서 배가 지나다닐 수 없었다.
최근 서부에서는 이 늪지대를 뚫어 아가란 강으로 연결되는 수로를 개척하는 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재에 어두운 페드로 총독은 사실상 군상 체계에서는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고, 원래 총독의 역할인 군사 방면에만 전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군사를 제외한 행정적 지원이 가장 절실한 지역이 바로 서부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서부는 가장 많은 인재들을 중앙의 아카데미에 보내는 인재의 보고였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만큼 음악과 미술 등 예술 방면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마침 페드로는 그런 사정을 감안하여 서부의 유력 귀족 둘을 대동하고 있었다.
총독 회의에서 자신이 서부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하기 어려울 것에 대비하여 동반한 사람들이었다.
세틴은 그들도 총독 회의 개시 전에 만나보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어 무척이나 아쉬웠다.
북부와 북동부는 아직 군상 체계도 제대로 구축이 되지 않았고, 전란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전후 복구 사업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베그던과 푸스킨은 이번 총독 회의를 복구 사업을 조기에 완수하고 북부와 북동부의 경제를 빠르게 부흥시킬 방안을 모색할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사정을 경청한 세틴은 앞서 베르토프와 숄츠를 만나면서 더욱 구체화된 총독 회의에 대한 구상을 설명하고, 중앙 조정과 지방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취지에서 총독들이 자신감있고 당당하게 조정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도 좋다는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다음날 개시된 제국 총독 회의의 첫 번 째 일정은 여섯 총독이 황태자를 배알하는 자리였다.
총독들의 인사를 받고 보고서를 접수한 오디어스의 말이 걸작이었다.
“그동안 조정을 대신해서 각지의 군사를 도맡아 처리하느라 고생들이 많았소.
전국적으로 변란이 끊이지 않아 조정에서 임명한 총독들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이번에 여섯 지역의 총독들을 황도로 일시에 부른 이유는 단 하나요.
그간 경황이 없어 총독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권한과 책임도 불분명하고 심지어 임기마저 명확하게 정하지 못했소.
이제는 강력한 반란 세력들이 모두 제거되고 제국도 안정을 되찾은 마당이오.
그동안 총독들이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부터라도 조정의 확실한 통제를 받아야 할 것이오.
그대들을 총독으로 천거하고 키워준 세틴 사령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처신을 똑바로 해주길 바라오.”
그러면서 옆에 서 있던 세틴에게 한 마디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신의 말을 뒷받침 하라는 뜻이었다.
세틴은 총독들이 아니라 오디어스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총독들을 사전에 한 번 씩 모두 만나 보았습니다.
할 얘기를 그 자리에서 이미 충분히 했으니 딱히 따로 할 말은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총독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은 다들 충분히 이해했을 거라 믿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총독 회의는 조정 중신들과 각 지방 사이에 실정을 충분히 공유하고, 앞으로 일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의견을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결론을 내리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나 황태자 전하나 앞으로 총독 회의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가는지 충분히 지켜본 다음에 향후 대책을 다시 논의해도 좋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총독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보시고, 묻고 싶거나 확인할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총독을 호출해서 만나 보시지요.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총독들을 놔주시지요.”
오디어스는 사실과 증거에 바탕을 두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해 어떤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세틴의 말이 그에게는 전혀 엉뚱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불쾌한 기분이 가득한 얼굴로 오디어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들 이만 물러 가시오.
세틴 사령관은 남아서 나랑 얘기 좀 하고.”
총독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자 오디어스가 다짜고짜 물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냐 ?
네 속을 도무지 모르겠구나.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이번에 내게 총독을 몇 자리 양보할 생각은 있는 거냐 ?”
어이없는 오디어스의 질문에 세틴도 일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디어스를 지긋히 쳐다 보며 생각을 정리한 세틴이 말했다.
“현재 제국에서 최고의 실권자는 황태자 전하십니다.
총독을 바꾸고 싶으면 전원 교체 하신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총독이라는 자리가 황태자 전하와 제가 거래를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제가 누차 말씀드리지만 바꿀 때 바꾸더라도 전하께서도 총독들의 보고서를 깊이 있게 검토해 보시고 현황부터 파악하셔야 합니다.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이나 보완할 지점들을 충분히 숙고하신 다음에 조정 중신들의 의견도 수렴을 해서 인사 문제는 최종적으로 검토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물으시니 일단 답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시점에서 총독을 교체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지금 총독을 맡고 있는 사람보다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추천하신다면 검토는 하겠습니다.
훨씬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교체해야지요.”
오디어스에게는 세틴의 말이 한 자리도 양보할 수 없다는 얘기로 들릴 뿐이었다.
“흥, 아무런 힘도 없는 내가 뭘 어쩔 건데 하는 소리를 태연하게도 하는구나.
그래, 힘없는 내가 말로 널 이길 수는 없지.
네 말대로 되나 어디 두고 보자꾸나.
총독 회의의 주체는 총독들과 조정 대신들로 정해졌으니, 회의 결과가 나오면 그때도 그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오디어스도 나름대로 대비를 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조정 대신들이 한 목소리로 몰아붙이면 어쨌든 명분상 하급자에 불과한 총독들이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보자는 소리였다.
세틴이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저는 또 골트릿 전하의 장례를 챙겨야 해서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총독 회의 첫날의 공식 일정은 황태자가 총독들을 접견하는 자리가 전부였다.
사실 오디어스가 제대로 된 황태자라면 어떻게든 총독들을 붙잡아 두고, 각 지역의 실정이나 애로사항 등을 경청하는 자리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오디어스는 총독들의 얘기를 제대로 들어보기도 전에 호통만 치다가 쫓아버린 꼴이었다.
황궁에서 물러나온 세틴이 곧바로 골트릿의 빈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하나의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용하고 숙연한 자리여야 마땅할 빈소가 여기 저기서 목청을 높여 가며 토론에 열중하는 자들로 떠들썩했다.
황궁에서 물러난 총독들이 모두 함께 골트릿의 빈소를 방문했고, 때마침 상당수의 대신들도 역시 조문을 와있던 터라 몇 마디씩 주고 받던 말이 점점 열기를 더해가더니 이런 광경을 연출하게 된 것이었다.
세틴은 이런 분위기를 깰 새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지도 못하게 하고 조용한 방에 머물고 있는 숙모를 찾아갔다.
골트릿 부인은 골트릿이 입을 수의를 손보고 있었다.
그녀는 들어서는 세틴을 보고도 간단하게 눈인사를 건냈을 뿐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수십 번은 살펴보았을 수의였으나 그래도 어디 문제가 없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골트릿 부인이 자신의 옆쪽에 세틴의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외숙부는 생전에 그리 좋은 옷감도 아니고 여러 벌 있는 옷도 아니지만, 늘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행여 구겨지거나 더럽혀진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고서야 옷을 입었지요.
먹는 것도 많이 드시지 못하고, 기름진 음식도 잘 못드시지만, 정갈한 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으셨구요.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입을 옷이 그이의 마음에 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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