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미의 선물
갈리온 후작이 보낸 자는 다른 아무런 설명 없이 설파라는 이름만 알려왔는데, 그가 묶고 있는 호텔로 사람을 보내니 곧바로 달려왔다.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이자 제국의 백작이시며, 제국군 사령관이신 세틴 대장군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설파라고 하는데 죄송하지만 우선 주위를 모두 물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설파는 서른 중반에 깡마르고 키가 무척 큰 자였다.
세틴은 모든 사람들을 물리고 자리를 권했다.
상대를 한껏 추켜세우는 인사말로 보아 필시 귀족 가문의 사람이거나 귀족 가문에서 오래 종사한 자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내가 세틴이오만, 갈리리온 후작이 이렇게 사람을 직접 파견한 걸 보면 필히 중요한 용건이 있겠군요.
이곳의 보안은 철저한 편이니 거리낌 없이 말해 보시오.”
설파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서신을 하나 꺼내어 세틴에게 건냈다.
받아 보니 갈리온 후작의 친서였다.
‘친애하는 사령관 각하,
백작위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만난 뒤로 날로 승승장구하는 장군의 소식을 나도 또한 기쁘게 듣고 있소.
노스롭 토벌이 성공한 후에 내심 나와 같이 모그란데를 치자는 전갈이 올 거라고 기대해 마지 않았소.
그러나 모그란데의 술책임이 분명함에도 사령관직을 받아들이고 황도로 향한다는 소식에 한때는 무척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오.
비록 우리의 만남은 짧았지만, 장군이 모그란데에게 완전히 숙이고 들어갈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소.
황도에 입성하자마자 황자들의 연금을 풀고, 황태자를 옹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비로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소.
나와 우리 남부의 영주들은 모그란데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한, 현재의 조정에 협력할 수는 없소.
모그란데가 완전히 실권을 잃고 몰락했다는 확신이 들기까지는 말이오.
내 판단이 옳다면 장군과 모그란데는 결국 서로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오.
나는 장군에게는 아무런 유감도 없고, 제국 황실에 대한 그대의 충심을 믿고 있소.
하지만 모그란데는 현재 제국의 혼란과 난맥상을 조성한 장본인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소.
서신으로 모든 얘기를 다 할 수 없어 사람을 보내오.
설파는 원래 본인이 한 지역의 영주인 백작으로 내게 충성을 다하는 자요.
또한 내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기도 하니, 내가 장군과 협력할 방도에 대해 설파와 의논해 주길 바라오.
세틴 장군의 건승을 빌며 후작 갈리온 친서’
서신의 내용으로는 갈리온의 속내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세틴에게는 갈리온이 제국과 황실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믿을 근거가 전혀 없었다.
세틴이 설파에게 관찰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후작님의 마음이 가득 담긴 서신에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서신의 내용으로 보아 실제 하고 싶으신 말씀은 설파님을 통해서 들으라는 뜻으로 보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시기를 바라는지 들어볼까요 ?”
설파는 앉은 키가 무척이나 커서 세틴이 약간 올려다 보는 형국이었다.
그 역시 세틴을 가늠해보려는 시선이 역력했다.
“주인께서는 장군님이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밀약 같은 것을 반기지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그란데를 축출할 결정적인 기회가 오면 남부가 힘을 보탤 방안을 협의해 오라는 명이었습니다.”
세틴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남부가 군세를 몰아 황도로 들어올 명분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군요.
그런 제안이라면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거절하겠습니다.
제국은 지금 더 이상의 혼란을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내가 모그란데와 힘을 합해 우살리드를 진압하는 것으로 제국에서 모든 전쟁이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남부의 군사 행동은 혼란을 부추길 뿐입니다.
군세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조정의 재정 안정에 협력하는 것이 제국을 위해서 남부가 할 일입니다.”
설파는 쉽사리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남부가 군세를 몰아 황도로 진격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
세틴은 주저없이 곧바로 단언했다.
“반역군으로 토벌을 해야겠지요.”
설파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것이 제국군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
세틴이 말했다.
“내 생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남부가 군사를 동원할 명분이 없고, 아무런 명분 없이 황도를 향해 군사 행동을 개시하면 그것이 반역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
설파가 지지 않고 강변했다.
“북부군 10 만이 황도를 장악하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그것보다 확실한 명분이 어디 있습니까 ?
모그란데가 군세를 몰아 와서 황자들을 감금하고 스스로 섭정에 오른 일은 어떻습니까 ?”
세틴이 말했다.
“왜 그때 곧바로 모그란데를 공격하지 않고, 이제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새로운 분란을 일으키려 하죠 ?
나하고 입씨름이나 하자고 오신 게 아니라면 영양가 있는 얘기를 꺼내 보세요.
나는 제국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없으면서 입으로만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설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세틴의 반응이 자신들의 예상과 너무 다른 모양이었다.
한참 망설이던 설파가 결심이라도 한 듯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제국군이 우살리드를 칠 때 힘을 보태겠습니다.
모든 전비는 우리가 직접 부담을 하고요.”
세틴이 웃었다.
“하하하, 그건 참 좋은 생각입니다.
남부가 우살리드 토벌에 앞장 서겠다면 대환영입니다.
후작께서 조정에 직접 제안을 하신다면 저는 쌍수를 들고 지원하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따로 나를 만날 이유도 없습니다.
4황자님을 통해 조정에 주청을 한다면 누가 감히 반대를 하겠습니까 ?”
설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었다.
“그, 그것이...... 주인께서 원하시는 것은 장군님과의 확고한 동맹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남부가 우살리드의 화살받이가 될 이유가 없지요.”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화살받이가 될지 제국을 구한 영웅이 될지는 남부가 가진 역량과 진심어린 충심에 달려 있습니다.
나와의 동맹은 그 다음 문제지요.
나는 솔라스경의 충실한 제자로서 정도를 걷기만을 원합니다.
가는 길이 같으면 말로 백번을 약속한 동맹보다 강고한 친구이자 동맹이 되겠지요.
나는 남부와 갈리온 후작을 감히 가볍게 보지도 않고, 그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제국과 황실과 조정에 필요한 일에 힘을 보태고 참여한다면 언제든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드린 말씀 중에 내 생각을 숨기거나 과장하거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드린 말씀이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설파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장군님을 잘 몰랐을 수도 있고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가 온 목적에 합당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습니다.
장군님의 뜻은 제가 확실히 이해했으니, 돌아가서 주인님과 다른 영주님들에게 보고를 드리고 다시 방안은 마련하겠습니다.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매우 뜻깊은 만남이었습니다.
장군님의 진면목을 오늘에야 분명하게 볼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세틴은 설파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충실한 심부름꾼이면서 말귀가 밝은 편이었다.
어떻게든 세틴과 동맹을 맺는 것이 주 목적임이 분명했는데, 그것이 한 두 마디 약속이나 거래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물러갔다.
아버지가 황태자에 오름에 따라 이제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성이 된 카스텔라 하만이 왜 굳이 약속을 미뤄가며 저녁에 오라 했는지는 몰랐지만, 세틴은 고분고분 불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사전에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황궁 방문을 거부하고 하루 종일 제국군의 간부들을 면담한 세틴에게 시오미가 당장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만난지 하루 만에 무슨 일일까 싶었다.
일단 저녁 늦게 찾아오라고 답신을 하고 나서 세틴은 모그란데가 또 무슨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서야 세틴의 침실로 찾아온 시오미는 표정이 꽤나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하게 보자는 거야 ?
혹시 모그란데가 또 무슨 일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
시오미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냐.
어제 얘기를 그대로 전했더니 양부가 꽤나 고심하는 눈치야.
아직까지는 무슨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거야.”
“그럼 무슨 일로 ?”
시오미가 또 실없이 웃었다.
“우리가 뭐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볼 수 있는 사이야 ?
그냥 보고 싶어서 왔을 수도 있잖아.”
세틴도 따라 웃었다.
“그건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어서......”
“전에 내가 선물을 준비한다고 했잖아.
그 선물이 완성됐어.”
세틴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오, 그래 ?
그래서 그게 뭔데 ?”
시오미가 무언가를 꺼내지는 않고 약간 망설이는 듯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임신을 피할 수 있는 마도구를 만들었어.”
피임도구를 만들었다는 시오미의 말에 세틴은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세계에는 피임도구라는 개념이 있을지조차 의문일 정도로 과학지식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물론 종교적인 문화가 그리 발달되지 않아서 피임에 대한 정신적 거부감이 그리 크지 않을 듯했으나,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이 적지 않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만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신을 피하고 싶어하는 여성, 혹은 남성들도 넘쳐날 터였다.
하지만 시오미에게서 뜬금없이 피임도구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세틴이었기에 놀라움이 컸다.
그런 만큼 시오미가 피임도구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세틴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녀가 이 시국에 원치 않는 여성들을 위해 피임도구를 생각해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생물학이나 임신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고 확실하게 전파되어 있지도 않은 이 세계에서 마법의 힘을 빌어서 임신을 방지한다는 일이 결코 쉽거나 간단한 일은 아닐 터였다.
시오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마도구를 생각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세틴이 차마 스스로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시오미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세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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