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의 비무
황태자 즉위식이 거행되고 오디어스가 황태자로 옹립되었다.
오클린이 황궁 근위대장으로 인수인계까지 받고 나자, 세틴은 황도를 빠져나갔다.
동부 가도 정비 상황을 점검한다는 명분이었으나, 당분간 치열하게 전개될 조정의 주도권 싸움에서 한 발 물러나 있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행보였다.
또한 새 봄이 오는대로 우살리드 토벌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는 신호를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조정의 주도권 다툼이 격화되는 가운데 제국군과 세틴이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니 만약 우살리드 토벌까지 세틴이 성공한다면 제국의 모든 민심이 세틴에게로 쏠릴 것이라는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상카가 군상 체계 구축을 위해 떠나고 오클린마저 황궁으로 들어가고 나니 세틴의 친위대는 몇 명 남지 않게 되었다.
세틴은 친위대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했다.
그동안은 브라스트에서 자신을 따르던 측근 위주였던 것을 사령부 참모로 있던 가우디 론과 배커 수들라만을 위주로 재편성했다.
가우디가 친위대장, 배커가 부대장을 맡게 되었다.
세틴은 친위대를 300 명에서 1200 명으로 대폭 늘렸고, 보병 중에서 정예 중의 정예로만 구성했다.
최상의 무력과 우수한 장비를 바탕으로 모든 전투에서 전술의 핵심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가우디와 배커는 세틴군 시절부터 가장 젊고 호전적인 장수들이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오클린 상카와 함께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앞장서며 세틴과 함께 전장을 누빈 경험이 있었다.
이제는 각각 3등 장군으로 승진해서 하나의 군단을 이끌 중견이라 할 수 있었다.
세틴은 저스틴, 호아니, 바네사와 함께 친위대만을 이끌고 황도를 떠났다.
세틴 부재중에 지휘 책임자는 고진이 맡도록 했다.
동부 가도의 제1 병참 기지는 황도에서 사흘 거리에 있는 다빌라 백작령에 설치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황도에서 가장 가까운 역참에서 첫날 밤을 보내게 된 세틴은 친위대 전원에게 술과 만찬을 베풀었다.
친위대 12 명의 백인장들은 모두 부장급이었고, 120 명의 십인장들 대부분이 노스롭 토벌전과 오우거 사냥을 하면서 세틴과 안면을 익힌 베테랑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는 역시 비무가 제일이었다.
세틴과 저스틴은 비무나 대련이 별 의미가 없는 마스터였으나, 친위대를 위해 비무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분이 나의 친 형님이자 내 첫 검술 스승이오.
저스틴 경은 일찍이 검귀라 부릴 정도로 검술에만 매진하셨고, 지금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소.
저스틴 형이 내가 그동안 브라스트 검술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겠다 하시니 여러분 앞에서 공증을 받고자 하오.”
이미 적당히 마신 술과 고기로 기분이 풀린 병사들이 하늘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댔다.
저스틴은 검을 품에 안은 채 중앙으로 나와 세틴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말없이 사방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다시 세틴을 바라보았다.
둘은 모두 평범한 훈련검을 들고 있었다.
세틴이 간단한 브라스트 검술 기수식으로 선공을 날리며 비무는 시작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둘의 검에서는 점차 진한 오러가 밝은 빛을 내며 흘렀고, 검이 마주칠 때마다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적당히 조절한다고는 했지만 오러의 기운이 강해지고 빨라질수록 세틴과 저스틴의 감정도 고양되었고, 지켜보는 모든 장수와 병사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 긴장감과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애초에 승부를 가르기 위한 비무가 아님을 서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브라스트 검술에 대해 그동안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나 개선, 새로운 시도 등을 서로 알려주고 시험해보는 의미가 컸다.
어려서부터 밥먹듯이 익힌 검술을 기본으로 하는 이런 대련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을 둘 모두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경험이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매 순간이 아슬아슬하고 생사의 벽을 넘나드는 것처럼 보였기에 숨죽이고 보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 저기서 답답한 숨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고, 고함으로 지나친 긴장을 풀어보려는 병사들도 많았다.
꽤 오랫동안 진행되던 비무가 상 중 하 삼단으로 검을 한 번씩 마주치고 나서 한 발 물러나 인사를 나누는 장면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세틴과 저스틴이 뒤돌아서서 각자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장내에는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비무를 구경하면서 각자가 느꼈던 감정과 정신적 고양, 검술에 대해 무언가 새로운 눈을 뜬 것 같다는 생각 등등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며 생기는 현상이었다.
세틴이 자리에 앉고 나서도 약간 시간이 지나서 가우디가 제일 먼저 박수를 치며 함성을 지르자, 그때서야 물결이 퍼져나가듯 함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세틴이 일어나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오늘 회식은 여기까지. 모두 즉시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도록!”
세틴은 저스틴과 호아니, 가우디, 배커를 따로 불러 자리를 마련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우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스터들의 비무를 감상할 기회를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든 친위대원들이 검술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떴을 것입니다.”
세틴이 말을 받았다.
“나도 무척이나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소.
마스터에 오르면서 초식이나 기교는 모두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형님과 검을 나누면서 느낀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역시 검의 길에는 끝이 없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소.
자주는 못하겠지만 앞으로도 가끔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게 좋을 듯하오.”
저스틴도 무거운 입을 열었다.
“마스터라고 모두 같은 마스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이 불쑥 불쑥 솟아오르는 사령관님의 기세에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세틴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튀어나오곤 하는 ‘재커드의 혼’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으나,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우살리드의 동태에 대해 점검을 하기 위함입니다.
아직까지는 사령부 내에서는 내부 보안이 필요하기에 여기 나와서야 회의를 소집한 겁니다.
먼저 저스틴 경이 그동안의 성과부터 보고해 주세요.”
저스틴이 준비라도 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어 발언을 시작했다.
“우살리드의 주력은 뭐니뭐니 해도 레인저부대입니다.
첫 번째로 주목한 부분은 그들의 주 무장인 석궁인데, 사거리와 위력, 연사력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습니다.
유효 사거리는 50 보 정도로 일반 석궁에 비해 6-7 할 가량 깁니다.
위력은 어지간한 몬스터 가죽을 관통하는데 무리가 없을 만큼 강력합니다.
연사력은 일반 활에 비해서 떨어지기는 하나 개인마다 장착한 특수 장비로 대략 12 보를 걷는 시간에 장전이 가능합니다.
레인저부대의 총 규모는 2 만 가량입니다.
그 중 최정예는 설산표범에 탑승한 400 명입니다.
이들은 설산표범에 탑승하여 전속력으로 달리면서도 석궁 발사 및 재장전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기병 레인저는 3 천 가량으로 역시 정예입니다.
이들도 모두 마상에서 석궁 사용을 자유자재로 한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보병인데 일반 보병에 비해 기동력이 월등히 뛰어나고, 특히 밀집 대형을 이루고 쏘아내는 일제 사격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세틴이 끼어들었다.
“말만 들어도 무섭군요.
2 만 레인저부대를 맞상대 하다 했을 때, 우리 군으로 대처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호아니가 말했다.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수는 있으나, 저스틴 경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거나 그 이상이라 보고 대비해야 합니다.
일단 설산표범과 기병을 별도로 하고 일반적인 레인저부대를 상대하는 정공법은 거리입니다.
석궁의 사거리가 짧기 때문입니다.
사거리와 연사력에서 앞서는 궁병대가 천적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궁병대 만으로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에 한계가 분명합니다.
레인저부대라 해서 방패를 쓰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요.
더구나 궁병은 방패를 들고 활을 쏘지 못하지만, 석궁은 방패를 들고서도 발사할 수 있습니다.
레이저 부대를 전문적으로 상대할 궁병 훈련과 기병이나 보병의 연계 전술을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배커가 말했다.
“제가 석궁을 써본 경험이 조금 있습니다.
석궁은 활과 달리 성능이 천차만별입니다.
사실 제대로 만든 석궁은 극히 드물지요.
오랜 세월 레인저 부대를 운용해온 우살리드라면 나름대로 우수한 석궁을 제작하는 기술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레인저 부대를 양성하는 이유는 소규모 특수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레인저들의 활동 방식은 적으면 둘셋, 많아야 열 명 단위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대규모 전투를 치른 경험이 많지 않을 거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살리드가 치고 내려오면서 대적할 만한 상대가 거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우살리드는 상당히 뛰어난 군략가임은 분명합니다.
제국에 맞설 생각을 했다면 대규모 전투에 대해서도 나름 대비는 했다고 봐야겠지요.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조금 있으니 일단은 가장 기본적인 대비에 집중해봅시다.
구체적인 전술은 정보가 더 쌓이면 마련해 나가면 되오.
일단 병과에 상관없이 방어력을 높일 방안을 마련해야겠소.
석궁에 쓰이는 볼트는 대개 관통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얇은 금속판도 뚫을 수 있지만 두툼한 솜을 뚫지 못합니다.
가죽 갑옷 밑에 두툼하게 솜을 넣은 갬비슨을 껴입기만 해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겁니다.
궁병대는 그동안 전술에서 부차적이거나 일시적인 역할일 경우가 많았습니다.
레이저 부대에는 궁병이 상성상 가장 유리할 수 있으니 숫자도 늘리고 훈련을 강화해야겠습니다.
기병대는 대규모 레인저 부대와 부딪히면 자칫 피해만 커질 수 있겠어요.
일단은 설산표범대나 기병 레인저를 상대하기 위한 훈련에 집중하도록 하지요.”
저스틴이 말을 이었다.
“우살리드의 통솔력이 대단합니다.
북동부 영지들의 병력을 상당히 많이 끌어모았고, 지속적인 지원을 끌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우살리드 군에 참여하고 있는 영지군이 17 군데로 북동부 영지 대부분입니다.
영지군들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데 총규모가 5 만 가량이고 그 배로 키울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2만 정도만 결집을 시켜서 연합 훈련을 하고 있다는데, 상당히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국 북동부는 비교적 척박한 땅들이 많습니다.
또한 황도에 진출해서 영향력을 확보한 북동부 출신도 거의 없지요.
우살리드는 북동부 영주들이 갖고 있는 차별의식을 빌미로 단결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북동부인들의 차별의식에는 사실 깊은 연원이 있습니다.
천년 제국을 건설하신 초대 황제께서 바로 북동부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북동부는 전투력은 뛰어나지만 문화 수준이 매우 낮았다고 합니다.
초대 황제는 현재 제국 황도에 있던 왕국을 정복한 후에 주변 왕국들을 통합하기 위해 북동부인들을 배제하고 다른 왕국 출신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초대 황제께서 이루신 일을 우리가 다시 해보자’는 설득이 상당한 호응을 끌어냈을 수도 있습니다.
우살리드를 토벌하고자 한다면 가장 크게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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