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스 공략
세틴군 본진의 진군은 느렸다. 군영을 한 번 꾸리면 사나흘씩 눌러 앉기 일쑤였고, 노스롭군에게 ‘올 테면 와 보라’는 식으로 탄탄한 군영을 구축했다.
한편, 스프링스 각지에서 노략질을 하거나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노스롭 주둔군들이 속절없이 쓸려나갔고, 노스롭의 정찰망과 경계망이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그렇게 20 여 일이 지나자 노스롭은 더 이상 전면전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세틴군 본진을 향해 출병을 시작했다.
노스롭이 선택한 전장은 스프링스 평원이었다. 이제 막 파종이 시작된 스프링스 제일의 곡창지대였으나, 병력의 우위를 극대화하려면 평원 전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노스롭은 세틴군의 느린 진군 속도를 감안해서 자신들이 먼저 스프링스 평원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노스롭군이 출병하자마자 세틴군이 진군속도를 높여 하루 먼저 평원에 진지를 구축했다.
세틴군이 군영을 마련한 곳은 북쪽에서 스프링스 평원으로 진입하는 입구에 있는 천변이었다. 계곡을 빠져나오는 하천은 식수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깨끗했고, 천변의 백사장이 넓고 간간이 관목이 자라고 있는 둑이 자연스럽게 방어선을 구축하기 좋은 곳이었다.
노스롭군도 처음에는 스프링스 평원의 남쪽 입구 부근에 군영을 구축했다. 양 군영은 곧바로 전투에 진입하기에는 거리가 지나치게 멀었다. 하루 종일 진군을 해야 겨우 상대 진영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였기에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여건이 아닌 셈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줄 알았던 세틴군은 천변 진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노스롭은 주변 영지들에서 달려올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세틴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내심 반기고 있었다.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6 일이 흘러갔을 때, 노스롭에게 스프링스 자작성이 강을 건너온 베프토프군에 점령되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성이라고는 하나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같은 성은 아니어서 전술적인 중요성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문제는 노스롭이 양쪽에서 협공을 받을 처지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동시에 세틴군이 군영을 접고 진군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보고가 뒤를 이었다. 노스롭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물쭈물 하다가 자칫 양면에서 협공이라도 당하게 되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노스롭은 즉각 철수 명령을 내렸다. 10 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머물던 군영은 웬만한 도시 못지 않은 설비들을 갖추고 있었고, 식량과 각종 무기를 비롯한 군비 물자만 해도 규모가 어마어마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질서정연하게 추슬러 철수 준비를 하는 데만도 최소 삼 사 일은 걸리게 마련이었다.
세틴은 노스롭이 차분하게 철수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기병대, 기마대, 선봉대, 친위대가 번갈아가며 노스롭 군영을 휩쓸고 지나갔다. 숱한 병사들이 죽어 나갔고 물자들은 불타 오르기 일쑤였다. 철수 준비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 밤 낮을 당하고 나자 노스롭은 수많은 물자들을 포기하고라도 철수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군대만큼 취약한 군대는 없기 마련.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습공격에 대비하면서 후퇴하는 노스롭 군의 진군에는 속도가 붙지 않았다.
노스롭 군은 스프링스를 빠져 나가 더그움 령에 이르기까지 닷새 동안 병력이 거의 반토막이 났다. 노스롭을 제외한 주변 영지에서 합류했던 병력들이 속속 이탈한 것이 컸고, 세틴군의 집요한 기습공격에 죽거나 다친 병력도 적지 않은 탓이었다.
스프링스 영지에서 노스롭 반도로 가려면 더그움 령과 파리바 령이라는 두 개의 영지를 더 지나야 했고, 지형은 평지에서 점차 산악지대로 변했으며, 넘어야 하는 산은 점점 높고 험해지는 형세였다.
노스롭 군은 더그움 령에 들어서고 나서야 한숨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산악지형이 나타나면서 후퇴하는 와중에도 매복을 하거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서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틴군도 기병대 위주로 치고 빠지면서 노스롭의 피해를 극대화하는 전술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ㄱ’ 자로 꺾어진 협곡에서 호된 매복 공격에 한 차례 당하기도 했고,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고갯길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노스롭 군을 단번에 공략하기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세틴은 더그움에 진입한 지 이틀 만에 재정비를 선언했다. 당분간 쉬어갈 수 있도록 군영을 단단하게 구축하게 했고, 당일 저녁에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그동안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노스롭 군을 후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적병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병력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으니 우리가 승기를 잡은 셈입니다.
베르토프 군이 2, 3일 간격을 두고 우리의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이제 병력에서도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급하게 서둘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당분간 이곳에서 군을 재정비할 생각입니다.
갈수록 산악 지형이 늘어나고 앞으로는 더 험한 산들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상황이라 전술을 재구성해야 할 시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의견을 모아보고자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바드랑 숄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일단 재정비를 하자는 판단은 적절해 보입니다. 그동안 친위대, 정찰대, 기마대, 기병대, 선봉대가 올린 혁혁한 전과를 치하하고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다른 부대들이 이렇다 할 전투조차 해보지 못한 상황을 조금 답답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향후 전술을 구상할 때는 이 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프링스와 더그움의 영주들은 노스롭에 적극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항복하지 않고 협상을 시도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밖에 여섯 영주들은 그간 소극적으로 노스롭에 협력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세삼스레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계속 사절을 보내어 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주들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지 확고한 방침이 있어야 합니다.”
세틴이 말했다.
“영주들에 대해서는 내가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이미 노스롭에게 죽임을 당한 영주 둘을 제외하고 나머지 6 영주들은 예외 없이 적으로 간주합니다.
이미 대부분이 빠져나갔다고 보이지만, 노스롭 군에는 엄연히 다른 영지의 부대들이 영주의 깃발을 들고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영주가 직접 내 앞에 무릎 꿇어 항복하기 전까지 용서는 없습니다.”
보병대장 하푼 페드로가 전에 없이 강경한 세틴의 태도에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영주들을 굳이 그렇게까지 몰아붙여서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 만약에 저들이 노스롭에게 붙어서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나오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그러나 세틴은 단호했다.
“이번 싸움으로 전란이 순조롭게 끝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노스롭은 시작에 불과할 것입니다. 영주들의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계속 용인한다면 전란은 끊임없는 악순환에 빠지고 맙니다.
옥석을 가려 쳐낼 자들은 쳐내고, 마음으로 승복하고 따르는 자들을 확고한 우리의 세력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단순히 세만 불린 군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국과 황실에 대한 확고한 충성으로 무장한 세틴군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럴 가능성도 별로 없지만, 설사 그들이 노스롭에 붙는 상황이 된다면 철저히 깨부순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런 저런 인연을 빌어서 접촉해오는 자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입니다. 조금의 여지도 줄 필요 없습니다. 영주들에 대한 세틴군의 방침은 단 하나입니다. ‘영주가 직접 와서 항복하지 않는 한 용서는 없다’”
각 대장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대체로 그간 세틴과 함께 했던 정찰대, 기마대, 기병대, 선봉대는 세틴의 방침을 수긍하는 기색이었고, 본대에 남아 있었던 기타 부대장들은 반신반의 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세틴의 어조가 너무나도 단호했기에 섣불리 발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군들 중에서도 최고참에 속하는 우군 대장 코머스 한셈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세틴 장군의 말씀에 어떤 하자도 없습니다. 다만, 아군을 늘리고 적군을 줄이는 것이 군략의 기본입니다. 영주들을 너무 궁지에 모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나도 지금에 와서 영주들이 노스롭과 생사를 같이 한다는 결정을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봅니다. 더구나 더그움과 파리바까지 장악하고 나면 반도를 제외한 제국 남서부가 우리의 손 안에 들어오게 되는 셈입니다.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세틴 장군의 방침은 방침대로 고수하되, 더그움과 파리바, 그리고 그 이후 노스롭 공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당장 달려와서 항복하라고 강요하기보다 향후 공적에 따라 처우를 정한다는 쪽으로 방침을 전하고 어떻게 나오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틴이 무릎을 치며 찬성했다.
“한셈 장군의 노련한 방책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는 좋은 방책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노스롭에게 협력한 죄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천명해둘 필요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나는 영주들이 눈치를 살피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꼴을 용납할 생각이 없습니다.
무턱대고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한셈 장군의 말씀에는 찬성하고 살 길을 열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한도는 분명합니다. 제국과 황실에 대한 확고한 충성이라는 명분까지 버려가면서 양보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맨든 백작가의 사람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자면, 사실 그 동안 꾸준히 아버지와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주들의 동향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고,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나올 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영주들에 대한 세틴 장군의 방침은 이미 오래 전에 맨든 백작가에는 알렸습니다. 노스롭에 협력한 죄는 유야무야 넘어갈 성질이 아니라는 점과 향후 협력과 전공에 따라 처우를 결정한다는 방침을 아버지를 통해 모든 영주들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칫 혼선을 빚을 우려도 있으니 다른 분들에게 접촉해오는 자들이 있다면 같은 원칙으로 대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력의 재정비와 재배치, 전술 구상, 당장 눈앞에 있는 더그움 영지의 공략 계획 등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오갔다. 일단 5 일 정도는 군을 재정비하면서 베르토프군이 합류할 때까지 그 자리에 주둔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세틴은 머리 위까지 올라올 정도로 쌓인 서류들을 검토하면서 세틴군의 현황에 대한 난다와 완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녀들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세틴의 개인 비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부대별 병력 현황과 보급 물자의 수급, 각 부대의 전과 기록, 회의록 등을 작성하는 일은 물론, 세틴과 각 부대의 수장들의 연락과 군대를 따라다니는 상인들에 대한 관리 또한 난다와 완다의 일이었다.
난다와 완다는 부대장들과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그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녀들의 꼼꼼하고 날카로운 일처리에 꼼짝달싹 못하면서도 한 번이라도 더 볼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처럼 화사하게 빛나는 그녀들의 외모는 검은 가죽갑옷과 허리에 찬 칼로도 감추기 어려웠다.
한국사회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회계에 대한 기초지식까지 갖춘 전생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세틴이 보기에도 난다와 완다의 업무처리 능력은 빈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그녀들의 탁월한 기억력은 때때로 세틴조차 흐름을 쫓아가지 버거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보급문제를 원활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향후 현지 조달의 비중을 크게 올려야 한다는 말이지 ? 하긴 에메랄드 쪽에 기대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모그란데가 우릴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리도 만무하니...... 알았어.
다음 회의 때는 현지 보급에 대한 방침을 주요 의제로 삼도록 해야겠군. 그런데 난다, 포상에 대해 의논할 게 있다는 건 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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