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 감찰의 끝
호아니와 토머스는 이미 세틴으로부터 황궁 전체를 들어 엎겠다는 방침을 전해 들었고, 그를 위해 이번 황궁 감찰에서 무엇에 주력해야 하는지 세부적인 지침까지 가지고 있었다.
내무부 참사관을 앞세운 호아니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사람은 바로 황태자였다.
감찰 결과는 결국 엉망진창인 황궁의 현실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느냐로 귀결될 것이고, 황궁 내관들 중에서 상당수가 처벌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렵다는 참사관의 압력은 비언차이를 통해 황태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디어스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자신들도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며 그들이 오디어스에게 내미는 카드는 충격적이었다.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하게 되자, 오디어스의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만약에 그런 폭로가 나온다면 죽는 것은 오디어스 만은 아닐 터였다.
오디어스의 친자 여부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황궁 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을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오디어스는 내관들이 실제로 그런 일을 벌이지는 못한다고 믿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황비들과 내관들의 압력이나 호소를 나몰라라 하고 있을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오디어스는 어떻게든 세틴을 설득해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다급해진 오디어스가 예고도 없이 직접 제국군 사령관의 관저로 불쑥 세틴을 찾아왔다.
“세틴, 네 속을 도통 모르겠다.
대체 황궁을 어디까지 손볼 생각이냐 ?”
세틴은 오디어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를 찾아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황태자께서는 그것을 제게 묻기 전에 황궁을 어떻게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먼저 말씀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저는 황궁 내부의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항간에 나도는 소문이나 조금 주워 들은 정도입니다.
비언차이가 나대는 꼴이 하도 한심하여 제가 황궁에 대한 감찰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기실 저는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무엇을 손 봐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진심으로 황태자께서는 황궁을 이대로 방치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오디어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지었다.
“나조차도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려울 정도로 궁내에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황비들께서는 폐하의 부인들이시고, 폐하께서 생존해계시는 동안에는 어쨌든 사적으로 나보다 어른들이지.
그런 황비들을 등에 업은 내관들 역시 내가 쉽게 볼 수 있는 자가 별로 없어.
사실 나도 내가 제위에 오르는 순간 황궁 내부를 깨끗이 정비하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내관 누구에게 손을 대면 자신도 목숨을 끊고야 말겠다는 소리까지 하는 황비도 있을 정도로 내게 불평과 하소연을 해대는 통에 내가 아주 죽을 맛이야.
너는 모르는 척 하지만, 황궁 감찰이 결국 세틴, 너의 뜻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내가 아둔하지는 않아.
너는 내가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기를 바라는 것이냐 ?”
세틴이 오디어스의 눈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당장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비언차이를 꺾어버릴 수는 없습니까 ?”
오디어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비언차이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황비가 무려 셋이야.
만약 비언차이에게 손을 쓴다면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비언차이를 비롯해서 궁내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시종장들은 모두 한통속으로 돌아가니 그들 중에 하나라도 건들기 힘든 게 현실이지.”
세틴이 말했다.
“당장은 내관들에게 직접 손을 대기는 어렵다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이미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밖에서 결정을 낼 수 있는 건 예산 뿐입니다.
황궁에서 쓰고 있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재정 계획과 집행 과정에 대한 감시 감독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은 예산을 거의 전액 삭감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는 정도로 봉합하면 되겠습니까 ?
내관들이 그동안 축적해 놓은 재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 방안을 받아들이도록 내관들을 설득해 보시지요.
제가 대략 전해 들은 감찰 결과만 보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내관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디어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산을 전액 삭감한다는 건 너무 심하기는 한데, 그래도 일단 내관들의 목숨이나 자리를 건들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넘겨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
세틴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감찰 도중에 나온 얘기들과 제국군 군사부에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얘기들을 들어 보니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상황이더군요.
전하께서도 황태자에 오르고 나서야 알게 된 일도 많고,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라 방치해둔 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평가는 냉정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현재 황궁 전체를 관리할 책임은 누구보다 전하께 있습니다.
저도 요즘 여러 날을 잠을 못이루고 썩어 문들어진 황비들과 내관들을 어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단 하나입니다.
더 이상 황비들과 내관들에게 휘둘리지 마세요.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제가 전하를 지켜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정 이겨내기가 힘드시면 제 핑계를 대세요.
‘나도 너희들을 돕고 싶지만 세틴이 너무 완강해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이에요.
제가 나름대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내관들이 전하께 충성을 바칠 자들도 아니고, 어떻게든 전하를 이용해 먹으려 할 뿐입니다.
제가 이번에 적당한 수준에서 넘어가려는 이유는 조정의 감찰이라는 방식으로 황궁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헤집어 버리면 만천하에 황실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방치해 둘 생각은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고 이번 기회에 내관들의 기를 확실히 꺾어 놓으셔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하께서 계속 내관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신다면 저도 전하를 지켜드릴 수 없습니다.”
오디어스는 세틴의 말을 들으면서 세틴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심히 궁금했다.
말하는 본새를 보면 거의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하나,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없었다.
‘내관들에게 계속 휘둘리면 지켜줄 수 없다’는 말에 다른 뜻이 있는지 여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네 말은 황비들과 내관들에게 내가 선을 확실히 그으면, 네가 나를 끝까지 지켜주겠다는 말이냐 ?
네가 황궁의 사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나도 나 나름의 말 못할 사정이 있다.
그들을 단칼에 내치기는 어렵다는 말이지.
아무튼 너의 생각은 내가 알겠으니 차츰 타협점을 찾아가 보자꾸나.
그러면 황궁 감찰에서 내관들의 비리를 직접 추궁하지 않는 대신 어떤 조치를 내릴 생각이냐 ?
나도 황비님들과 내관들에게 할 말이 있어야 하니 그 점을 분명히 하자.”
세틴이 오디어스의 눈을 잠깐 직시하더니 말했다.
“첫째, 정사에 대한 관여를 일체 금한다.
이건 황태자 전하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황비나 내관이 전하께 정사에 관해 입이라도 벙끗 했다가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둘째, 내관들이 황비들의 처소에 출입하는 것을 당분간 일체 금한다.
이는 원래 황궁 내에서 일하는 내관들이 첫 번째로 알아야 하는 규칙입니다.
출입 자체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고, 어떤 용무로 얼마나 머물렀는지를 세밀하게 기록하여 남기는 방식으로 통제를 해왔던 문제이나, 지금은 이것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므로 당분간은 아예 출입을 금지시키고, 차츰 통제를 완화해 나가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셋째, 황궁으로 들어가는 조정의 예산 집행을 향후 6 개월 간 일체 하지 않는다.
사실 황태자 전하도 그렇고, 대부분 황비들이 상당한 재산을 하사 받아 일상 경비를 지출하는 데는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지출되는 예산은 용처도 근거도 분명하지 않게 사용한 것이 너무 많아서 이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당분간 일체의 지출을 중단하고, 역시 황비님들과 내관들이 하는 걸 봐서 풀어야 할 부분이 있으면 풀어주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이는 감찰단과 내관들이 다투면서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전하께서 직접 황비와 내관들에게 관철시켜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명분있게 감찰 결과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디어스가 망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날 보고 그런 세 가지 방침을 그들에게 통보하라고 ?
넌 그게 가능하리라고 보느냐 ?
내 입에서 말이 나오는 순간 날 잡아먹겠다고 덤비고도 남을 자들이야.”
세틴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만약 이대로 실행하지 않겠다면 세틴 사령관이 직접 황궁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비리를 일소하겠다더라고 하십시오.
저는 그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까지 황궁을 더럽고 추잡스러운 난장판으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황궁과 황실이 그 모양이고서야 어떻게 제국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만 백성의 어버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
오디어스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너는 그게 황비들이나 내관들 뿐 아니라 나까지도 벼랑으로 내모는 소리라는 걸 진정 모른단 말이냐 ?
그들이 그냥 다 같이 죽자고 나서면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 ?
세틴,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게 다 나를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벌이는 수작이란 걸 말이다.
아까부터 말하는 걸 보니 ‘그런 것도 못하면서 어찌 황태자 자리를 꿰차고 있냐’고 다그치는데, 너무 그러는 거 아니다.
네가 황궁이라는 데를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러나 본데, 무려 천 년 동안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를 이뤄온 곳이 바로 황궁이야.
네 핑계를 대라고 ?
황비나 내관들에게 제국군 사령관이란 그저 황제 폐하를 지키는 개나 말로 보일 뿐이야.”
계속 구구절절 못하겠다는 소리를 해댈 태세를 보이자 세틴이 말을 잘랐다.
“전하, 그러면 이렇게 하시지요.
황궁 근위대 전체가 호위하는 가운데 제가 제국군 장수 십 여 명과 함께 동참한 자리에서 전하께서 내관들의 대표에게 통보하는 방식으로 합시다.
전하께서 운만 띄우면 내관들에게는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저는 말씀드린 세 가지 방침에서 한 발자욱도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명확한 언질은 주지 마시고 그런 자리를 만들겠다고 통보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황궁 감찰을 어떤 선에서 어떻게 마무리 할지는 결정이 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이틀 후에 시행되었다.
오디어스가 일단 다같이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며 내관들을 구워삶아 세틴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세틴은 세 가지 방침을 엄숙하게 통보했다.
만약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자들이 있다면 감찰 결과를 바탕으로 당장 내관 전체에 대한 수사에 들어가겠다는 협박성 통보에 반발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내관은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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