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했다
3 황자가 서둘러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때, 2 황자, 골트릿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오디어스는 골트릿 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많아서 자식도 없이 늙어가는 골트릿은 정치 일선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어도 두루 명망이 높았다. 일찍이 소년 시절에 솔라스를 본받아 학문에만 정진하겠다고 선언한 골트릿에게는 적이 없을 뿐아니라, 그가 저술한 ‘솔라스 경 해설’은 제국 아카데미의 정식 교재로 쓰일 정도로 평이 좋았다.
오디어스가 곧바로 골트릿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수십 년 전 정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나는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오늘 대전회의에 참석은 했지만 마찬가지로 국가 대사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 여러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세틴은 조카입니다. 우리들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누이가 낳은 아들이지요.
솔라스 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정을 잃은 정치는 방향을 잃은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정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시작점이다.’ 아무리 부모형제도 없이 싸우는 게 정치판이라지만, 인정을 배반한 자는 이겨도 이긴 게 아니고, 성공해도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는 사흘 밤낮을 떠들어도 모자랄 만큼 많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서론이 그리 기나 하실 분이 많을 듯하여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바로 드리겠습니다. 세틴을 전권대사로 삼는 게 황명이라 하니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채찍과 당근을 논하기에 앞서 전권대사의 신변 안전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부터 의논하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설마 하니 알아서 살아 돌아오라는 식으로 보낼 생각들은 아니시겠지요 ?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라도 이 일에 반대하겠습니다.
둘째, 내가 볼 때 옴비두스는 채찍과 당근이 아니라 제국의 반을 넘겨주겠다고 해도 항복할 자가 아닙니다. 도대체 사지를 묶어 폐하 앞에 엎드리게 한다는 발상은 무엇을 근거로 나온 말입니까 ? 옴비두스가 귀순할 가능성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그 근거를 논해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옴비두스가 귀순할 가능성이 없다면 ‘귀순 시키라’는 황명은 그 자체로 황당무계한 헛소리가 되고 맙니다. 황명을 그런 식으로 남용하면 폐하와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정국의 혼란상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황제의 특명 전권대사라면 임무의 내용이 분명하고 책임과 권한이 정확해야 합니다. 귀순시키라 했는데 귀순시키지 못하면 황명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현실성이 전혀 없는 ‘귀순시키라’는 황명을 제고할 방법이 없는지 의논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할까를 대신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길고 긴 골트릿의 발언은 대신들과 황자들 모두를 꾸짖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대전회의에 참석조차 않던 골트릿이 갑자기 나타나 쏟아낸 장광설은 모두에 대한 질책임과 동시에 적어도 세틴과 관계된 일 만큼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골트릿의 발언이 갖는 무게감은 누구도 무시할 성질이 아니었다. 그의 말 어느 하나 반박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내용이 없었고, 세틴을 전권대사로 파견한다는 계획이 얼마나 어설프게 준비한 일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계획이 이미 물 건너 갔음을 직감한 오디어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잊고 있었다.
1 황자 월칸도 한 마디 보탰다.
“세간에 ‘황실에 인재가 없고, 나라에 충신이 없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고 들었네. 나 자신부터 뼈아픈 얘기가 아닐 수 없지. 이번 일은 2 황자의 말대로 심사숙고 해야겠네. 더 이상 조정이 엉망이라는 말을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 오늘 대전회의는 이쯤 하고 대신들을 중심으로 치밀한 대책을 마련하여 다시 날을 잡도록 하세.”
이 대목에서 세틴이 손을 번쩍 들었다. 오디어스가 맘대로 하라는 듯이 손짓으로 발언을 허가했다.
“새날의 빛의 반란은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현재 제국 제일의 중대사입니다. 저는 당사자로서 계획이 미흡하다 하여 이대로 무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임무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한 몸 바칠 각오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2 황자님 말씀대로 만전의 대책이 마련된다면 좋겠지만, 지금 제국의 여건이 약간의 모험조차 피해도 좋을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칫 이대로 유야무야 없던 일로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시간이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적어도 새날의 빛의 기세를 꺾어 놓거나, 제국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를 완화시키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갈수록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5 일 후에 제반 준비를 갖춰서 다시 대전회의를 소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결정되는 내용이 무엇이든 저는 그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틴이 자청해서 꺼져가던 불씨를 살려주자 3, 4, 5 황자의 눈에는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또 무슨 불똥이 떨어지기라도 할 새라 오디어스가 서둘러 폐회를 선언했다.
“좋네. 전권대사로서 당사자가 그런 각오라면 조정이 모두 힘껏 돕겠네. 각부 대신들은 2 황자의 말씀을 감안하여 만전의 대책을 준비하여 5 일 후에 다시 보도록 합시다. 이만 대전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세틴이 판을 뒤집기보다 성사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튼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황자들의 속내를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자신의 생사가 갈릴 상황이 올지도 몰랐고, 브라스트를 곤경에 빠뜨릴 계략이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국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새날의 빛의 반란, 그 한 복판으로 직접 뛰어들어 정확한 사실들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1, 2 황자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결정적이었다. 골트릿은 조스핀이 막연하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한 것과는 딴판으로 친족으로서의 정이 깊음은 물론이고 세틴을 통해 무언가 제국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보고싶어 한다고 느꼈다. 특히 골트릿의 영향력이 의외로 무척 크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큰 성과였다. 이는 향후 정국에 꽤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세틴의 개인적인 희망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 그는 새날의 빛 수뇌부와 접촉하다 보면 시오미의 행방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마지막으로 세틴은 황자들, 혹은 적어도 한 황자는 옴비두스와 연계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들이 한 통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황명을 빌미 삼아 그들을 만나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대전회의 바로 다음날 골트릿이 세틴을 찾아왔다.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허술하게 차려입은 골트릿은 세틴과 바네사, 올릿 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관저로 들어왔다.
“알게 된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만, 내가 널 부르면 감시망을 피할 수 없을 듯하여 이렇게 내가 왔어. 마음이 다급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보아 하니 저들이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지 대충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던데 왜 일을 맡겠다고 했느냐 ?”
골트릿은 세틴을 보자마자 다그쳐 물었다.
“우선 대전회의에서 2 황자께서 한 마디 해주셔서 저에게 힘을 보태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애초에 저는 기회를 보아 어떻게든 판을 뒤집어 버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2 황자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먼저 제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씀드리자면, 3 황자 주도로 황명이 조작되고 있다는 점, 3, 4, 5 황자가 브라스트와 저에 관한 문제에서는 한통속이라는 점, 저들 중 적어도 한 명은 옴비두스와 연계하고 있다는 점, 이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등에 업고 저들을 어느 정도 견제해 줄 세력이 있다면 저는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날의 빛이 반란을 일으킨지 몇 달이 지났는데 조정에서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어차피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거기에 저를 전면으로 내세우겠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변의 안전이라면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브라스트에 대공께서 건재해 계신 한은 누구라도 저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과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카가 싸움이라면 자신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한 몸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한 평생 골골대며 살아온 나는 네가 걱정되면서도 그 패기와 용기가 부럽고 가상하기도 하구나. 어려서부터 몸이 아픈 나를 제일 많이 걱정해주고 배려해 준 사람이 조스핀이었다. 어린 것이 영특하면서도 착해 빠져서 아랫 것들한테 이용도 많이 당했지. 그러면서도 한 번 고집하는 일은 절대로 포기하는 적이 없었다. 아마도 조스핀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너밖에 없을 듯 하구나.
얘기를 들어 보니 중요한 대목들은 대체로 파악을 하고 있어. 하지만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황자들은 예외없이 전부 허깨비에 불과하다. 3 황자의 뒤에는 모그란데 공작, 4 황자의 뒤에는 갈리온 후작, 5 황자의 뒤에는 제국군 사령관이 있어. 그들 외에도 승냥이같은 자들이 널렸지만, 그 세 명은 정말 무서운 자들이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들 모두 제국을 끝장내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 그들 셋이 한통속은 아니고 각자 딴주머니를 차고 있지만, 셋 중 하나만 나서도 지금의 난국을 정리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터인데, 아무도 나서지를 않고 있어. 대전회의에서도 제국군 사령관이 한 마디도 않고 자리만 지키고 있지 않더냐.
제국은 이미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어. 눈앞에 보이는 황자들이 어설퍼 보여서 그렇지 그들이 꾸미고 있을 흉계는 상상을 초월할 거야. 새날의 빛은 그들이 그리고 있을 큰그림에서는 하나의 작은 장기말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그 정도일 줄은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새날의 빛에 대한 공론을 불러 일으키고 조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 가운데로 뛰어들지 않고서는 저들의 허실을 파악할 수도 없고, 음모의 단서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제 안위를 무엇보다 걱정하시는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2 황자님은 관저의 비밀 통로에 들어서시기 전에 길가를 서성이면서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주변을 살피셨지요. 이는 제가 감시자를 둬서 안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주변 5백 보 이내라면 평상시와 다른 변화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결코 걱정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골트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정녕 사실이란 말이냐 ?”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면 대략 백 보 이내에서 비슷한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고대 북방 이민족이 남긴 주술의 힘을 받아들여 다른 마스터와는 달리 그 분야에서는 특별하게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제가 브라스트 순행 사절단에 나갔을 때 그림자의 습격을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당시 마스터급 암살자를 일격에 척살한 것도 바로 저입니다.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다는 말이군. 대단하네. 하지만 일신의 무력이 능사는 아니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위기가 다가올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내가 옴비두스와는 인연이 조금 있어. 이미 수십 년이 흘렀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지. 남에게 지기를 죽도록 싫어하고, 조그만 일에도 깊은 원한을 새기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이지. 소문에는 8 서클에 올랐다 하는데 마법사들은 온갖 기기묘묘한 수작을 꾸미기를 좋아한다지 않느냐. 애초에 마법사들이 제국에서 배척당하게 된 계기도 겁 없이 황제에게 정신지배를 시도하다 들통난 일 때문이었다.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옴비두스와 인연이 있으시다니 그 얘기를 좀더 듣고 싶습니다. 어차피 제가 만나 봐야 할 자 아닙니까.”
“제국 아카데미 시절 동기였다. 둘 다 역사와 법률을 전공했기에 접촉이 많은 편이었지. 옴비두스는 귀족가의 사생아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신분이어서 그에 대한 자격지심이 심했어. 그의 아비가 나름 최대한 배려를 해서 아카데미에 넣어줬는데 고맙게 생각하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컸어. 아까 말한 성격들로 인해서 친구도 별로 없었지.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고, 성적도 별로여서 졸업을 하고도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어. 그 뒤로는 서로 만날 일도 없었는데 그가 마법에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저를 보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지 특사의 임무나 형식 등에는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황자님께서는 다음 대전회의에서 특사의 임무는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권한은 될수록 크게 부여하도록 힘써주셨으면 합니다. 안전문제는 크게 강조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간다 한들 그게 저에게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무력의 측면에서는 제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만 가는 편이 오히려 좋습니다. 저쪽에서도 감시역 정도는 붙이려 할 테니 관료들이나 몇 명 데려 가면 될 것입니다.”
“임무는 포괄적으로, 권한은 크게. 좋은 방향이다. 조정에서 새날의 빛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있으니, 황제를 대신하여 그들의 불만과 요구를 들어보고 들어줄 수 있는 부분은 들어준다는 쪽으로 무게를 실으면 되겠다. 그렇게 노력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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