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도일
황태자를 옹립하게 되면 모그란데가 섭정의 자리를 내놓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니 모그란데가 일을 서둘 까닭이 없었다.
조정과 황도의 여론 압박이 최고조에 이를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황자 선택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또한 황태자로 낙점할 황자와 줄다리기를 거듭할 터였다.
세틴은 사령관 관저에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제국군 재건에 관한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황군 근위대나 황도 경비대 재편에 대해서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세틴은 조정에 제국군 보강의 방침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영주군의 독자적인 합류는 모두 배제하고 제국군의 체제 강화를 위한 지원만 받겠다는 것이었다.
조정의 재정이 부실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는 영주들의 참여를 배제한다면 보강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도 굽히지 않았다.
많은 병력이 필요한 전쟁에 영주들이 자긴의 부대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참가를 독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세틴의 이런 방침은 관례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세틴은 징집병과 용병들을 최대한 모집해서 화살받이로 삼는 전통적인 전쟁 방식에 대한 개혁을 선언했다.
제국군을 최정예 상비군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세틴이 10만이 넘어가던 군세를 스스로 흩어버리고 3만 남짓만 남겼던 일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이유와 명분도 제국군을 최정예 상비군으로 만들겠다는 방향과 일치했다.
세틴은 천 명의 병력으로 제국군 300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부대가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방침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새롭게 구성되는 제국 중앙군에 자신의 세력을 편입시켜 키우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자들이 없을 리 없었고, 초기에는 세틴의 방침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신성인 세틴에게 등을 지고 싶은 자는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모그란데가 세틴의 방침을 적극 지지하고 나왔다.
그는 황도에서 세틴이 북부군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세틴의 방침을 내심 반기고 있었다.
제국군 지휘부는 대다수가 노스롭 토벌을 함께 했던 장수여서 정예화, 상비화라는 방침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적용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세틴이 황도에 입성한 뒤 시일이 좀 지나자 제국 서부, 북서부, 서부 가도 주변의 영주들이 하나 둘씩 병력을 이끌고 황도에 도착했다.
제국군에 편입을 바라는 거의 모든 영주들은 희망은 비슷했다.
더 늦기 전에 전쟁에 뛰어들어 공을 인정받음으로써 영지를 지키고, 나아가 더 큰 영주로 도약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주군의 구성은 대동소이했다.
영주 자신을 중심으로 기사단과 징집병인데, 세를 과시하기 위해 최대한 징집병을 모아온 자들이 많았다.
황도 남문 밖에서 한 나절 정도의 거리에 있는 제국 중앙군 주둔지에 도착한 영주는 제일 먼저 고진 수아레스 참모장과 면담에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다.
고진은 결코 고압적이지는 않으나 단호하게 제국군의 방침을 통고했다.
모든 영주, 기사, 일반 병사는 각각 심사를 거쳐 입대와 직위, 보직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영주와 기사들의 직위와 보직이 개인적인 무력과 군사지식, 경험, 전문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영주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다.
실제로 대다수 영주들은 군사적인 역량이 없다시피 했다.
큰 맘 먹고 영지가 가진 모든 것을 들여 상경한 영주들은 실망감이 컸다.
제국군의 방침을 받아들이자니 상경한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그런 영주들에게 고진은 그냥 돌아가도 상관은 없으나,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세틴과 면담을 해보라고 권했다.
세틴을 만나본다고 해도 기본 방침이 변경될 가능성은 없지만, 그 면담이 만약 제국군에 합류했을 때, 지위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뜻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세틴은 제국군 편입을 바라는 영주들과 만나는 일정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세틴은 영주들에게 제국군에 남기를 바란다는 전제로 얘기를 풀어나갔다.
제국군이 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모든 귀족의 특권을 배제하고 각자의 능력과 공적을 통해서만 성공하는 기풍을 정립해야 함을 역설했다.
무력이나 군사적인 식견이 부족하다면 군상이나 군 행정 체계에서 얼마든지 활약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휘하의 모든 병력을 데리고 돌아가는 선택을 하더라도 적어도 불이익을 주지는 않겠으나, 가능하면 힘을 보탤 것을 호소했다.
또한 그들의 영지에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세틴 자신과 제국군이 충분한 보장을 해주겠다 약속했다.
황도까지 찾아온 영주들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능동적으로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젊은 영주들이었다.
그대로 돌아가기보다는 제국군에 남는 선택을 할 여지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세틴은 모든 영주들을 일대일 면담을 통해 설득하고자 사력을 다했다.
기존의 귀족관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상당수의 영주들이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가더라도 일단 뭐라도 시도는 해보겠다는 자들이 더 많았다.
제국에서 영지 간의 전쟁도 쉽지 않은 일이라 영지전이 벌어지는 일은 극히 적었다.
그러니 영주 자신이 강한 무력을 갖거나 군사적인 경험이 있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몬스터 출몰이 잦은 최변방의 영주들이었다.
한 달 동안 제국군에 편입한 영주가 모두 14 명이었는데 그중 직접 전장에서 활약하고 싶다는 자는 6 명이었고, 나머지 8 명은 행정 쪽을 선택했다.
기사단은 해체되어 대부분 기병대에 소속하도록 했고, 일반 병사들은 원하는 경우 시험을 거쳐 선발했으나, 기준이 높아서 통과하는 인원이 극소수였다.
나머지는 모두 귀향하도록 했다.
새로 합류한 영주와 기사들이 제국군에 적응하고 융화될 수 있도록 세틴과 기존 장수들이 세심한 배려와 주의를 다했다.
세틴이 제국군 재건을 위해 온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가을날, 특이한 영주가 하나 찾아왔으니 그의 이름이 베른 도일 자작이었다.
베른 도일은 8 명의 기사만을 대동하고 제국군에 들어오기를 원했고, 동생에게 작위까지 물려주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영지는 북서부 외진 변경, 인구가 2 만에 불과한 산골이었다.
세틴은 집무실에 들어오는 베른을 보자마자 걸물이 나타났다고 직감했다.
베른은 큰 키에 체구가 당당하고 오관이 뚜렷하고 진한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목소리에 힘이 넘쳐 흘렀고 마스터에 근접한 무력을 소유한 자였다.
“베른 경, 아, 제국군에서는 다른 직함이 없는 사람은 모두 경으로 칭하니 오해없기를 바라오.
여기서는 누구도 작위를 입에 올리지 않소.
새롭게 재편되는 제국군의 방침은 이미 들었을 거요. 먼저 새로운 방침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
베른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제가 생각한 그대로여서 불만은 없습니다.
저와 같이 온 기사들은 모두 기병대에 편입해주시면 됩니다.
직위와 보직은 어떻게 정합니까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우리는 말이 잘 통할 것 같네요.
일단 뚜렷한 군공이 없으면 장군직은 오를 수 없소.
지금 기병대에만 장군직을 가진 장수가 5 명이오.
적어도 그대의 상관이 5 명 이상이라는 말이오.
구체적으로는 기병대장 뱅골 도이어 장군의 결정에 따르면 되오.
기병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사문제에 나는 간여하지 않아요.
다만 그대의 무위를 미루어 보건대 부장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오.
그밖에 내게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지금 물어보시오.
내가 거만을 떠는 게 아니라 오늘 이 자리가 끝나면 당분간 우리가 서로 대면하기도 쉽지 않을 테니 말이오.”
베른이 허리를 곧게 펴며 말했다.
“저도 긴 말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습니다.
사령관님의 무력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믿기가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사령관님과 대련을 해보고 싶습니다.”
세틴이 흔쾌히 대답했다.
“오랜만에 패기 넘치는 무인을 만나 무척 반갑소.
나도 간만에 몸을 풀고 싶기는 하오.
그런데 어떤 방식의 대련을 원하시오 ?”
베른이 말했다.
“제 특기는 마상 전투입니다.
승부는 말에서 떨어지는 쪽이 지는 방식이 어떻겠습니까 ?”
세틴이 웃었다.
“하하하, 제일 자신있는 대련 방식을 주저없이 내세우는 것도 용기라 할 수 있겠군.
그런데 내 말이 워낙 뛰어나서 오히려 그쪽이 불리하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나는 다른 말을 타본 적도 없어서 말을 바꾸기는 어렵소.”
베른은 자신만만했다.
“제 말도 빠질 데 없는 명마입니다. 그러면 대련은 언제......”
세틴이 흥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둘이서 후다닥 대련을 해버리고 말면 섭섭할 사람이 많을 것이오.
제국군 전체에 공지를 하고, 내일 아침 제국군 연무장에서 겨뤄봅시다.”
베른이 약간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일을 크게 벌렸다가 혹시라도 제가 이기면 사령관님 체면이......”
세틴의 표정은 여전히 흥겨웠다.
“그대가 나를 이긴다면 우리 제국군에 새로운 무신이 태어나는 셈이니 누가 좋아라 하지 않겠소.
하지만 나를 이기려면 정말 특별한 기술을 발휘해야 할 것이오.
장수와 병사들에게 눈요기감도 되지 못하면 안되지 않겠소 ?
준비를 단단히 해서 나오세요.
무기는 무엇을 써도 좋소.
나는 검 한 자루를 들고 나설 것이오.”
오랜만에 제국군 연무장이 축제분위기로 뜨거웠다.
무엇보다 세틴 사령관의 무위를 목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병사들 뿐아니라 장수들도 모두 들떠 있었다.
더구나 세틴이 말을 타고 싸우는 장면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수 만의 병사들이 연병장을 둘러싼 가운데 세틴과 베른이 200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세틴은 말할 것도 없이 테오를 타고 있었고, 베른은 테오보다 키가 반 배 정도는 커 보이는 거대한 흑마를 타고 있었다.
세틴이 멀리서도 들리도록 오러까지 사용해서 외쳤다.
“이번에 기병대에 들어올 베른 경이 내게 대련을 청했소.
나도 간만에 몸도 풀 겸 흔쾌히 대련에 응했소.
내가 어제 베른 경에게도 경고했지만, 마상 전투는 말의 역량이 많은 것을 좌우하지요.
다시 말하는데 베른 경은 내 말, 테오를 극히 경계해야 할 것이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이니 말이오.”
베른이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시작하시지요.”
고진이 깃발을 들고 외쳤다.
“이 대련은 말에서 먼저 떨어지는 쪽이 지는 승부요.
그럼, 깃발을 내리면 대련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잠시 후, 고진의 깃발이 아래로 힘차게 내려가고 세틴과 베른은 서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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