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비두스의 행방
난다는 여전히 불만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잘낫 경은 역참장 경험도 있으니 그렇다 쳐도 베른 그 진상은 왜 이번 일에 끼워 넣으신 거에요 ?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인간을 데려 가서 어디 쓰라구요 ?”
세틴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베른이 왜 ?
젊고 패기 넘치는 장수라서 경험을 넓혀주려고 그러지.
아무리 시골 구석이라도 영주는 영주야.
자기 동네에서는 왕처럼 군림했을 테지.
현장에서 굴러 봐야 때를 벗고 좀 군인다워질 거야.”
난다는 화난 얼굴이었다.
“그 인간이 사령관께서 봐주는 것도 모르고 기를 쓰고 이기려 하는 걸 제국군이 다 봤어요.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기라도 하는 줄 아는지 기고만장해 하는 꼴이라니......
기병대장님하고 울브린 경이 베른 때문에 얼마나 골치 아파 하는지 알기는 하세요 ?”
세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데리고 가서 잘 가르쳐 봐.
베른이 좀 잘난 척 하는 거만 아니면 뛰어난 인재야.
그래도 작위까지 버리고 온 사람이잖아.
시류를 읽을 줄도 알고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우살리드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교전 상황에 대한 대비도 필요해.
베른 정도 능력이라면 우살리드의 정찰대 정도는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베른의 임무는 호위와 잡무 처리니까 실컷 굴려보라고.
우리 군에서 다들 난다의 갈굼 실력이 최상이라고 하더군.
고양이 앞의 쥐 꼴이 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던데 베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거야.”
난다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그러니까 이번에 경계, 경비, 호위, 야영, 식사 준비, 각종 심부름 같은 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치라는 거죠 ?
흠, 하루에 갈굼 항목이 최소 백 개는 넘겠네요.”
세틴이 끼어들었다.
“서류 작성, 수발, 기록도 가르쳐.
역참에 관련된 법률하고 병참을 어떻게 꾸리는지도 빼놓지 말고 말이야.”
난다가 조금은 신난 얼굴이 되었다.
“그걸 다 배우려면 잠 자고 밥 먹을 새도 없을 건데요 ?”
세틴이 태연히 말했다.
“군대에서 걸으면서 자기도 하고,
먹다 말고 튀어나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하지만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
그러다 멀쩡한 사람 하나 폐인 만들라.”
난다가 피식 웃었다.
“제가 뭐 마귀할멈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
다들 뒤에서 갈굼 대마왕이라고 하지만 나만큼 인기 좋은 장군은 없다구요.”
돌아가는 난다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넌 이제 죽었어’ 하는 모습에 세틴과 바네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나가는 바네사를 세틴이 붙잡았다.
“내가 신경을 쓴다 쓴다 하면서도 매번 일을 우선하다 보니 이번에도 상카 경을 멀리 보내버렸네.
바네사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해.”
바네사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결혼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애초에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한이 있어도’라는 단서를 달고 한 결혼이잖아요.
상카나 저나 이미 각오한 일이고, 떨어졌다가 가끔 보는 것도 나름 좋은 면이 있어요.
늘 새롭게 만나는 느낌이랄까......
상카가 옆에 있으면 오히려 사령관님의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까 좌불안석일 때가 많아요.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틴이 웃었다.
“상카 경이 들으면 서운해 할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하는 일들을 바네사가 대신해 주고 있는 걸 잘 알아.
이제 저스틴 형하고 토마스, 울브린도 곁에 있으니 그렇게 많은 일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거야.
난 진심으로 바네사가 스스로의 인생을 살기 바래.”
바네사의 태도는 단호했다.
“사령관님을 잘 모시는 것이 제 일이고 곧 제 삶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뭔가 더 멋진 인생을 살아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뭔가 다른 걸 찾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세틴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네사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 뿐이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저녁을 먹고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가슴에서 따끔할 정도로 뜨거운 기운이 왔다 사라졌다.
뜨겁지 않다 해도 민감한 가슴 부위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움직임을 모를 세틴이 아니었다.
서둘러 펜던트를 꺼내들고 원통을 조작하자 오래지 않아 시오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업무중이면 어쩌나 했는데 바로 받네 ?’
비록 작기는 해도 담긴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 또렷한 소리였다.
‘이제 막 자려는 참이었어.
방해받을 일은 전혀 없으니 안심하고 얘기해도 돼.’
나름 달콤한 정담을 기대한 세틴이었으나 시오미의 목소리가 자못 다급했다.
‘일이 생겼어.
오늘 저녁에 옴비두스가 이미 이틀 전에 황도를 빠져 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졌어.
아직 공공연히 알려지지는 않았고 양부는 노발대발이야.’
‘옴비두스라면 작은 일은 아니군.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모그란데와 옴비두스가 서로 짜고 움직였을 가능성은 ?’
‘그건 나도 확신할 수는 없어.
사실 옴비두스보다 동부 왕국들과의 연계가 근본적인 문제인데, 그에 대해서는 내게도 철저히 비밀을 지키려는 분위기야.
양부가 동부 왕국들과 연계를 계속 갖고 있다면 옴비두스가 다리 역할을 할 가능성은 높다고 봐야지.
옴비두스가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동부왕국으로 갔을 거야.’
세틴은 ‘방울새의 속삭임’으로 시오미와 처음 갖는 통신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미안한데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라서 시급하게 의논을 좀 해야 하겠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알았어. 잘 자.’
세틴은 일단 급하게 호아니를 불렀다.
호아니가 자다 나온 얼굴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세틴이 옴비두스가 떠난 사실을 알렸다.
호아니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동부 왕국들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겠군요.
동부의 네 왕국들은 비록 각자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움직인다면 한 왕국만 따로 나서지는 않을 공산이 큽니다.
모그란데가 그들을 부추기고 끌어들이면 국면이 한층 복잡하고 힘겨워질 수도 있지요.
지금은 그들의 연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니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만약 모그란데가 그들을 끌어들이면 그건 명백한 매국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도 그걸 알기에 조심스럽게 활용하려는 분위기인 것같아요.
내 생각에 당장 동부왕국들이 침략을 감행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제국의 상황이 도저히 수습불가이거나 모그란데의 우위가 확실히 굳어진 상황에서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모그란데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겠지요.
한 가지 불확실한 것은 모그란데와 옴비두스의 불화입니다.
그들 간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나, 모그란데가 황도를 장악한 뒤로 둘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옴비두스가 승상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도 있고, 모그란데가 옴비두스의 제자들을 대부분 시오미 쪽으로 돌려버린 데 대한 원한도 있을 겁니다.”
호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확실히 그 둘의 관계는 큰 변수입니다.
시오미 공녀도 정확한 상황을 모르실까요 ?”
세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그란데가 옴비두스나 동부왕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시오미가 마음 시커먼 인간들의 속내를 읽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기도 하겠지요.
지금은 모그란데가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네요.
일단은 제국군에서 공식적으로 정보활동을 하기는 힘드니 저스틴 경에게 동부왕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라고 해야겠어요.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을 떠돌며 수행하는 무인들이 없지는 않으니.”
호아니가 말했다.
“저도 사적인 인맥을 통해서라도 동부 왕국들의 움직임을 주시해보겠습니다.
옴비두스가 그쪽으로 갔다면 어떤 식으로든 제국에 개입할 여지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오늘 모그란데와 황태자를 만난 일은 잘 되었나요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황궁 근위대를 내게 넘기기로 양쪽 모두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냈어요.
당장은 조정의 개편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될 겁니다.
내가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을 담보로 둘 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는 해뒀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을 안 부릴 사람들이 아니긴 하지요.
중립적이면서 능력과 경륜에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입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차피 최종 결정권은 새로운 황태자에게 있겠지만 모그란데의 견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인사문제만큼은 일, 이황자의 중재를 받도록 얘기해뒀어요.
아마 둘이 심하게 부딪히다 보면 중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에요.”
호아니가 말했다.
“갈리온과 설리반도 마냥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누구도 독주할 상황은 아니지요.
3황자께서 일, 이황자님과 잘 협력만 하셔도 황실과 조정이 많이 안정될 텐데 참 아쉽습니다.”
세틴이 화제를 돌렸다.
“모그란데를 우살리드와의 전쟁에 앞장 세우는 일은 잘 추진되고 있나요 ?”
호아니가 말했다.
“밑밥은 서서히 깔아두고 있습니다.
내년 봄에 날이 풀리면 곧바로 출진할 거라는 분위기는 잡아두었고, 동부 역참 정비가 시작되면 누구도 우리가 출진을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시중에는 모그란데가 제국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느냐, 북부군은 제국군에도 편입하지 않고 황도를 위협만 하고 있을 거냐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코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모그란데가 우살리드 대전에 나서야 한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모그란데가 스스로 나서야 해요.”
정국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모그란데가 어떤 선택을 할지에 따라 어떤 형국이 전개될지도 크게 달라질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승상인 옴비두스가 행방을 감추었고, 만약에 그다 동부왕국으로 건너갔다면 그 또한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세틴이 우려하는대로 모그란데가 동부왕국을 제국의 일에 끌어들이고, 만약 옴비두스가 그것을 위해 동부왕국으로 갔다면 실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일이었다.
섭정인 모그란데와 승상인 옴비두스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정확한 내막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태자를 옹립하고 모그란데가 섭정에서 물러난다면 설 자리를 잃게 될 옴비두스가 이 시점에 행방을 감췄다는 사실이 향후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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