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를 사수하라
사실 토마스가 세틴의 얘기에 자꾸만 딴지를 거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오랜만에 파견임무에서 돌아와 바네사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된 상카가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 위험한 임무를 위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던 것이었다.
세틴도 그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 도리어 상카를 욕되게 하거나 난처하게 할 소지가 있기도 했고, 만약 그런 얘기가 나온다면 바네사 역시 ‘소가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으면 기꺼이 죽으러 가는 게 날 위하는 거다’는 식으로 나올 여자였다.
토마스가 얘기를 또 다른 식으로 비틀었다.
“그럼 울브린은요 ?
이번에 가면 저도 죽을지도 모르는데 기왕이면 울브린도 같이 가면 좋겠어요.
저 혼자만 죽으러 가기는 싫습니다.”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토마스는 참 변하지 않네요.
그 변함없는 진솔함 때문에 내가 그대를 좋아 하지.
안타깝지만 울브린은 안돼.
울브린은 그 진중하고 착실한 성격으로 젊은 나이에 제국군의 중추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중이야.
언젠가는 크게 쓰일 사람인 건 확실하지.
지금은 그대로 커나가게 두는 편이 나아.
울브린에게는 토마스처럼 번뜩이는 재지도 없고, 임기응변에 능하지도 않아서 이번처럼 변수가 많고 창의력이 필요한 임무에는 적합하지가 않아.
억울하면 어떻게든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저스틴이 물었다.
“내가 이곳에서 빠지게 되면 무인 정보 부대의 활동에 큰 차질이 불가피합니다.
무인들이라는 특성과 정보 부대의 특성상 모든 일들이 나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단시간 내에 대체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토마스까지 함께라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지금 외부 정보 활동을 모두 나와 토마스 경이 협력해서 처리하고 있는데, 지금처럼 정보가 중요한 시점에 우리 둘이 빠져야 한다면 대책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틴이 토마스를 쳐다보며 무언가 답을 바라고 있었다.
토마스는 세틴의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몇 번이나 몸을 외로 꼬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사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대체 조직을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저스틴 경은 핵심적인 수하만 일단 사령관님께 직접 인계를 해주세요.
그 다음은 사령관님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시겠지요.”
세틴이 말했다.
“하하하, 이런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내게는 참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이 친구 덕분이지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할 테니, 일단 하고 있던 일들은 되도록 간단하게 나하고 난다에게 인수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번 임무의 수장은 저스틴 형입니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고 모든 일처리에 능한 상카 경을 주장으로 삼을 생각도 했지만, 저스틴 경이 수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상카 경이 양해를 해주세요.
이번 임무를 반드시 성공해서 저스틴 경이 명실상부한 정식 귀족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올 새해맞이 모임에 상카 경이 참석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저스틴 형을 장가보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저스틴 경이 이번 임무를 계기로 무인의 틀을 벗어나서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상카 경에게는 늘 어려운 부탁만 해서 미안하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상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저는 애초에 출세하고 싶은 욕심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령관님을 옆에서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말씀하신 뜻은 충분히 이해를 했으니 있는 힘을 다해서 저스틴 경을 보좌하겠습니다.
저 말고 지혜주머니인 토마스 경도 함께 하니 모두 힘을 합쳐서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반드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겠습니다.”
세틴과 저스틴이 거듭 상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토마스가 또 나섰다.
“저는요 ?
저는 이번에 임무 성공하면 뭐 떨어지는 거 없나요 ?”
세틴이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마스는 지금도 나이에 비해 너무 지위도 높고 중한 일을 맡고 있지.
너무 출세가 빠른 것도 좋은 것만은 아냐.
나처럼 황금 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일보다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치고 끝이 좋은 법이 없어.”
토마스가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괜히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건졌네.
네네, 알았습니다.
전 그저 시키는 일만 죽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토마스의 너스레는 농담이라고는 입에 올려본 적도 없는 상카나 저스틴의 입가에조차 웃음이 번져 나가게 만들었다.
우살리드의 북부 진출을 제지하기 위한 별동대의 파견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고진과 샘프라를 비롯한 핵심 간부 몇 명에게만 언질을 주었을 뿐, 공식적으로는 모종의 비밀 임무를 맡은 별동대가 파견된다는 사실 만이 알려졌다.
1 만 5 천 병력은 브라스트 출신이거나 그동안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세틴과 인연이 있는 하급 장수들을 위주로 편성되었다.
처음으로 독자적인 작전을 총괄 지휘하게 될 저스틴을 위한 배려였다.
바네사가 조금도 아쉬워 하는 기색없이 상카를 등떠밀어 보내주었음은 물론이었다.
세틴은 십여 장에 달하는 긴 편지를 써서 호아니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모두 만약에 하랑가에서 일이 터질 경우 조정과 북부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에 관련된 것이었다.
또한 황도에 있는 시오미와도 긴급 통신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전하고, 호아니로 하여금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하랑가 고원 방면으로 긴급히 정찰을 강화한 고진은 수시로 그와 관련한 사항들을 세틴에게 보고했다.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넘는 작전을 개시한다 해도 상당한 준비가 필요할 터였기에 하루 아침에 무슨 결과가 나올 일은 아니었다.
중간에 미리 병참 기지가 마련되어 있지도 않은 하랑가 고원을 돌파하려면 물과 식량만 하더라도 꽤 많은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우살리드가 작전을 개시하려면 최소한의 정찰이나 선발대를 파견하는 일을 생략할 수는 없었다.
고진이 집중하고 있는 요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살리드의 정찰대나 선발대가 출몰하는 것이 포착된다면 세틴의 예견이 적중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며칠 후 아침, 우살리드가 페링에 건설했던 기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루 아침에 그 크고 기다란 진지가 사라졌다는 건 그만큼 우살리드의 통솔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또한 이는 우살리드가 경황도 없이 철수하기에 바쁜 상황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모그란데의 진영에서도 변화가 감지되었다.
페링 진지를 향하고 있던 군영을 조금 뒤로 물리면서 하라무스 방면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우살리드가 물러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군과 한바탕 해보겠다는 뜻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군영을 오히려 뒤로 더 물린 것은 당장은 급하게 제국군과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모그란데가 세틴에게 사절을 보내왔다.
용건은 어디서 어떻게 싸울 것인지 결정을 보자는 것이었다.
제국에서는 전쟁 시에 때로 그렇게 미리 싸울 장소와 방식을 서로 합의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서로 약속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이 귀족다운 방식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었다.
모그란데가 이제 와서 새삼 귀족적인 전투를 벌여보자고 나오는 것이 우습기는 했으나, 세틴은 일단 그의 사절을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안녕하십니까 ?
나는 북부 세프리언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말로론 세프리언 백작입니다.
승상께서 어떻게 싸울지를 상의해보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사령관께서 하라무스 진지에서 진지전을 고집하신다면, 승상께서는 한 일 년 정도 기다리시면 그때 쯤에나 싸워보겠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급하게 황도로 진격해야 할 이유도 없고, 지난 우살리드와의 전투로 상한 병사도 많아서 정비에 시간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동부왕국군이 대거 증파될 예정이기에 늦을수록 좋다고 하셨습니다.
사령관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
세틴이 말로론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하,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프리언 백작이시라면 안면은 있는 듯한데 제가 정확하게 기억을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일에는 늘 셔플린이 나섰습니다.
그라면 제가 조금은 편하게 얘기를 나눴을 텐데, 웬일로 백작께서 오시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군요.
그런데 동부왕국군이 증원된다니 그런 일은 기밀 사항이 아닙니까 ?
결국 동부왕국에서 오기 전에 한 번 때려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오신 겁니까 ?”
계속해서 비꼬는 듯한 세틴의 말에 다소 기분이 상한 세프리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알기로 사령관이 젊잖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군요.
서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거야 피차 일반이니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측의 내부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시다.
그래서 싸울 거요, 말 거요 ?”
세틴이 말했다.
“우리 군은 며칠 전에 3 만이 이미 증원되었고, 지금 제국 전역에서 계속 증원군을 모집하고 있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병력이 열세인 우리가 싸움을 서둘 이유가 있을까요 ?
오면서 봤겠지만 하라무스 진지는 흙과 돌을 섞어가며 계속 보강을 하고 있습니다.
병력도 조만간 우리가 오히려 더 많아집니다.
그쪽은 동부왕국군이나 기대를 하고 있지 더 끌어모을 병력도 없고, 있는 병력도 나날이 탈주자가 늘어 줄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살리드와는 협정을 맺은 것으로 보이는데 웬일인지 우살리드는 하루 아침에 진지를 거두고 물러 갔더군요.
시간이 그쪽의 편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을대로 하시오.
모그란데에게 전하십시오.
싸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곳으로 쳐들어 오라고 말입니다.”
진지 방어전을 고집하겠다는 세틴의 말을 들은 말로론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언성을 높여가며 말했다.
“그러면 승상께는 사령관님께서 선제공격을 하지는 않는다고 약속을 하신 것으로 전해도 되겠습니까 ?”
세틴이 웃었다.
“하하, 그게 왜 그런 얘기가 되지요 ?
나는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쪽에서 어떻게 싸울지 정해보자는 말을 하기에, 나는 장기전에 진지 방어전을 선호할 뿐이라는 입장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쪽에서도 정비와 보강을 위해 시간이 많을수록 좋다 하니 당장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싸울지를 서둘러 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지요.
나는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모그란데 군영을 공격할 것입니다.
제국 중앙군은 결코 싸움을 겁내는 군대가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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