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참 기지
다빌라 백작령에 있는 제일 병참 기지는 창고, 숙소 등으로 사용할 목조 건물들을 짓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세틴 일행이 도착했을 때, 난다를 비롯한 정비단의 지휘부와 함께 다빌라 백작을 위시한 주변 영주들 다섯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원래 있었던 역참은 현재 병참 기지 건설을 위한 본부를 사용되고 있었다.
그곳에 준비된 조촐한 연회에서 세틴이 먼저 영주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가도 정비와 병참 건설에 영주들께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협조를 해주시고 있다 들었습니다.
갈수록 우살리드와의 일전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제국군이 우살리드 토벌에 앞장 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살리드의 기세가 만만치 않고 북동부의 많은 영주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년 제국은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제국군 사령관으로서 모든 제국의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되는 날까지 어떤 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가장 앞에서 싸울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협조와 지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빌라 백작이 영주들을 대표해서 일어났다.
그는 50 대로 나이보다 활력이 넘쳐 보이고, 절도있는 자세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 주변을 다스리는 다빌라 백작입니다.
사실상 동부에서 황도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에 병참을 건설하는 선택은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농한기여서 다빌라의 백성들이 건설을 도울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일꾼들의 일당과 숙식까지 빈틈없이 챙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황도 주변 영지들은 치안이 좋고 몬스터에 대한 걱정도 적은 편이라 군사적 대비가 허술합니다.
당장 내년 봄에 토벌이 시작된다고 해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거의 없습니다.
다빌라만 해도 호위 기사 둘이 전부이고 장원을 관리하는 관리들도 모두 문관입니다.
저희가 제국군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면 성심성의껏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주변 영지들의 사정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살리드 토벌에는 적어도 10 만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 조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영주님들의 협력이 절실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난다 정비단장과 협의해서 대책을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베른이 일어서려다 난다의 레이저 눈빛을 받고 다시 주저앉는 장면이 세틴의 눈에 포착되었다.
세틴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베른 경비대장,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베른이 주저주저 하다가 일어서더니 자세를 똑바로 했다.
“동부 가도 정비단의 경비대를 맡고 있는 베른이라 합니다.
나도 제국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작으나마 한 지역의 영주였습니다.
사령관님과 정비단장님께서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민폐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방침이 너무나 확고하시기에 이런 말을 하기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여기 참여하신 영주님들께 크게 실망했습니다.
말은 번드르르 하지만 병참 기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잇속을 챙기려고만 했지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노역에 참가하는 백성들의 숙식과 일당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백성들을 징발하고 이곳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까지, 그것도 어떻게든 부풀려서 받아내야만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말로만 성심성의껏 도우면 무엇합니까 ?
제국군의 행사를 돈벌이 기회로만 본다면 장사꾼들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
이미 말씀드렸지만 나도 한 지역의 영주였고, 사령관님께서도 브라스트 공국의 소가주이십니다.
황실의 은혜로 귀족 영주의 특혜를 누렸으면, 제국이 전례없는 난국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영주들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나서는 게 당연합니다.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합니다.”
베른의 발언이 길어지면서 점차 수위가 높아지고 영주들의 안색이 붉어졌다.
마침내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까지 나오자 30 대 후반의 젊은 영주가 벌떡 일어섰다.
“경비대장, 거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
부끄러운 줄 알라니 ?
당신만 충신이고 우리는 전부 장사꾼이 다름 없다는 말이오 ?
내가 장사꾼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난다 정비단장처럼 숫자 한 단위까지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소.
내가 정비단에 협력하면서 금화 한 닢이라도 이득을 취한 게 없다는 데 가문과 작위를 걸고 맹세할 수 있소.
사과하시오.”
베른이 다시 반박하려 하자 저지하려는 난다를 세틴이 저지했다.
“말 잘 하셨습니다.
나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금화 한 닢까지 따지는 계산속을 지적한 겁니다.
제국군의 병사들은 자기 목숨이 아까운 줄 몰라서, 공명심에 눈이 멀어서 싸우는 줄 아십니까 ?
이 자리에서 시시콜콜 손익을 따져야겠습니까 ?
수트롱 자작님, 바로 당신의 영지에 우살리드의 정탐꾼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우리 경비대가 그 중 몇을 잡아들였지요.
피튀기는 전투가 없다 뿐이지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군사력이 부족하면 어떻게 기여하고 참여할지 영주들께서 스스로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야지 왜 사령관님께 길을 알려 달라고 하십니까 ?
제국군은 당신들의 용병이 아닙니다.
나도 고민 끝에 영주 자리까지 박차고 나와 제국군에 합류한 경험이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언제까지 제국군을 그렇게 거래 대상으로만 취급할지 지켜보겠습니다.”
세틴이 다시 또 격해져가는 베른을 그쯤에서 저지하며 나섰다.
“베른 경비대장의 말이 다소 과격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제가 노스롭과 남서부 귀족들에게 내린 처분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단순히 반역에 참여한 데 대한 처벌이 아닙니다.
저는 명분과 자격이 없는 특권을 지켜주지 않을 겁니다.
협박을 하는 것으로 들려도 어쩔 수는 없지만, 이미 제국은 대변혁의 격랑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적당히 처신을 잘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제국군에서는 이미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작위를 내세우는 일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과와 공훈에 대한 보상은 분명하고, 과오와 실수에 대한 처벌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살리드와의 전쟁 과정에서든 결과에서든 처벌과 보상은 엄격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권고는 분명합니다.
베른이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세요.”
노스롭 토벌 과정에서 세틴에 의해 처단된 귀족은 하나도 없었고, 작위를 완전히 박탈당한 귀족도 없었다. 노스롭 후작조차 황도로 올려보냈을 뿐, 자의로 처벌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모그란데와 반목하기보다 사령관직을 받아들이면서 타협하다 보니, 세틴에 대한 귀족들의 전반적인 평가가 나쁘지 않았고,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하지만 세틴을 직접 만나본 다빌라 주변 영주들은 기존의 생각을 바꿔야 했다.
처음 만나본 나이 어린 사령관이 언제든지 자신들의 미래를 심판할 능력과 자격과 의지를 두루 갖춘 무서운 존재로 부각되었다.
이 연회는 세틴이 베른을 한층 높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난다는 실무적으로 부하와 상대들을 상대하는 데에서 무적이었으나, 대국을 보는 식견과 귀족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세틴은 그런 점에서 난다와 베른의 조합이 생각보다 효능이 클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 얼핏 보아도 난다에게 잔뜩 주눅든 것이 분명한 가운데서도 자신이 나설 자리에서 똑부러지게 할 말은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잘낫과 베른이 제이 병참 기지까지 역참들을 정비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세틴 일행은 다빌라에 남아 며칠 머물 예정이었다.
7일 동안 이어질 황태자 등극 축하 연회의 번잡함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기에 제이 병참 기지가 들어설 지점까지 돌아본 뒤 귀경할 예정이었다.
친위대는 병참 기지의 연병장으로 예정된 곳을 하루 만에 나무랄 데 없는 훈련장으로 깨끗하게 정비하고, 그 다음날부터 실전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세틴이 호아니, 난다와 함께 훈련을 관람하고 있었다.
진행되고 있는 훈련은 당구라는 종목이었다.
당구는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공 3 개와 방패를 사용하는 경기로, 각각 자기 편에 속하는 공 하나씩과 목적공이 있는데 자기 공을 방패로 타격하여 목적구를 맞춰 상대편 골문에 넣는 시합이었다.
어떤 공이든 몸이나 방패로 건드리거나 맞기만 해도 즉시 퇴장 당하기 때문에 자기 편 공을 적당한 위치로 보내서 목적구를 맞추는데 집중해야 했다.
공을 건드리지는 못하지만 상대편을 몸으로 저지하는 것은 자유였기에 서로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몸싸움이 치열했다.
골문 근처에 반원형으로 그려진 선 안에는 진입만 해도 곧장 퇴장인데다 목적공을 몸으로 막으면 골로 인정되기 때문에 상대의 견제를 뚫고 목적공을 골문 근처에 접근시키기만 해도 꽤나 유리한 고지에 오르는 셈이었다.
진행되고 있는 결승전은 선수들 뿐 아니라 응원의 열기도 무척이나 뜨거웠다.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질 정도로 쌀쌀한 날씨에도 연병장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결승전에는 가우디와 배커가 이끄는 팀이 올라와 있었는데 점수는 서로 내지 못했고, 각각 30 명으로 시작한 인원은 양쪽 다 일곱, 여덟으로 줄어 있었다.
퇴장 당한 사람이 늘어나고 선수가 줄면 득점할 가능성은 높아지게 마련이었다.
상대의 공에 접근하거나 편하게 공을 치지 못하도록 견제를 한다 해도 한 명이라도 타격할 공에 접근하고 나면 오히려 피하기에 급급하는 상황이었다.
근거리에서는 아무래도 상대가 친 공에 맞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줄어들자 점차 상대에 대한 견제보다 타격한 공을 다시 적당한 위치로 보내기 위한 자리 배치와 날렵한 움직임이 중요해지고, 공수 전환을 위한 전술 싸움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세틴이 온몸에서 하얀 김을 풀풀 솟아오르는 선수들을 보며 말했다.
“양쪽 다 열 명 이내로 줄었으니 이제 한 점이라도 먼저 넣는 쪽이 승리하겠군요.
군사는 어느 편이 이길 것 같나요 ?”
대답은 난다 쪽에서 먼저 나왔다.
“나는 배커 편이요.
한 명이 더 많이 남아서 유리할 것 같아요.”
호아니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는 가우디 편이 이긴다에 걸겠습니다.
배커 쪽이 인원은 많지만 더 지쳐 보입니다.
이제부터는 누가 더 정확한 위치로 더 빨리 뛰느냐가 중요합니다.”
난다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군사님 내기 할래요 ?
제가 당구 시합은 군사님보다 훨씬 많이 봤을 걸요 ?
저는 그 동안의 기록에 의거해서 추측한 거라구요.”
그런데 난다가 말하는 동안 가우디 편에서 펑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때린 공이 목적구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더니 꽤나 긴 거리를 날아 배커 쪽 골문 근처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왔다.
호아니가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내기를 하기엔 이미 늦은 듯하네요.
이제 저걸 막으려면 공을 아예 못 치게 몸으로 막거나 공으로 공을 막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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