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 백작령
“설마 그 사이에 이미 결혼이라도 한 것이오 ?”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을까 걱정할 따름입니다. 숱한 유혹이 있었지만 바네사를 생각하며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바네사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공자께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평생 뼈를 갈아서라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스승님. 아니 상카. 이제부턴 이름을 부를 거에요. 어서 13 공자께 감사드리지 않고 뭐하는 거에요 ? 브라스트 궁의 시녀장이 결혼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아세요 ?”
대공가의 시녀장이 신분을 유지하며 결혼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궁을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결혼을 하고서도 궁의 일을 계속 하려면 훨씬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해야 했다. 그 첫 번째가 섬기는 주인의 허락임은 물론이다.
“감사드리기 전에 일 년에 얼굴 몇 번 보기 힘들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
“흥, 그거야 상카가 일방적으로 정할 건 아니죠. 설사 일 년에 얼굴 한 번 못본다 해도 13 년이나 못보는 것보다는 낫겠죠.”
언제까지고 평행선을 그릴 것 같던 두 사람의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한 세틴은 기분이 좋았다. 그가 보기에 상카라는 사내는 진국이었다. 바네사의 행복을 위해서도, 상카를 위해서도, 그리고 세틴 자신을 위해서도 이건 좋은 일이었다. 6 백작령에서 가장 믿을 만한 용병단이 세틴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기도 했으니......
12 폭포 가도의 남은 길은 확실히 전날보다 순조로웠다. 갈수록 경사는 완만해지고 가도는 넓어졌다. 몇 구비를 돌고 나자 마차를 타고 이동해도 괜찮다는 상카의 전언이 있었다.
평소에 걸을 일이 많지 않은 관리들은 너도나도 마차에 오르기에 바빴으나, 세틴은 흔들리는 마차보다 차라리 걷는 편이 좋았다. 연신 탄성을 발하는 난다, 완다와 함께 걸으며 장대한 폭포와 기암괴석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오스틴의 전경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크든 작든 온통 산간 분지인 대공령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산지를 벗어나 완연한 평지에 도달할 즈음에 사절단을 기다리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오스틴 백작이 직접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올란드 후작 각하, 13 공자. 험한 길을 오시느라 사절단 모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벌써부터 도적떼와 조우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이제부터는 백작령이니 안전은 저희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오스틴 백작은 늙고 말랐어도 듣던대로 후덕한 인상이었다. 율리가 답례를 했다.
“여기까지 마중나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너그러우신 백작께서 밤낮 없이 백성들의 진휼에 애쓰신 덕에 그나마 사정이 좀 났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백성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신분상 후작이 더 위라 해도 넓은 영지를 가진 백작인지라 올란드 후작은 오스틴을 극진히 예우했다.
“과찬이십니다. 내가 먹을 것까지 아껴가며 해도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오스틴이 워낙 궁벽한 지역인지라 백성들의 고통이 너무 큽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13 공자께는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어느 분이신지......”
말은 그래도 오스틴은 벌써부터 세틴을 주목하고 있었다.
“제가 13 공자, 세틴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작으나마 구호 활동에 힘을 보태고자 감히 나섰습니다. 백작께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스틴 백작은 세틴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가며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13 공자께서 조숙하고 영명하시다는 말은 익히 들었으나, 오늘 이렇게 뵈니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야말로 아래로 백성을 위하고 위로 대공께 충성하고자 하는 오스틴의 진심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격식을 갖춘 귀족들의 상견례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사절단을 영주성으로 모시겠다고 오스틴이 여러 차례 권했으나, 올란드 후작은 이번 사절단은 영주들의 대접은 일체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따라서 구호 물자 조정을 위한 회의는 야영지의 사절단 천막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잠정적으로 오스틴에 책정된 물자는 식량 10만 부르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대공가의 가용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빚까지 내가며 마련한 물자이니 요긴하게 써주길 바라오.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수치이니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시오.”
율리가 서두를 떼자 오스틴 백작은 난감한 표정이었으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이 나섰다.
“저는 서스텐 오스틴이라 하오. 아직 작위는 없느나 영광스럽게도 백작께서 성을 쓰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스틴에서는 총관 일을 맡고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요청한 물량에서 1/3도 안 되는 배정이 이루어졌는지 그 사유를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난 순행 사절단의 부사, 발탄 남작이라 하오. 그걸 왜 우리가 일일이 설명해야 하지 ? 후작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건 어디까지나 잠정 수치임을 아셔야 하오. 최종 결정은 각 백작령에서 인구와 가구수, 작황, 남아 있는 식량 등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자료를 받아 검토를 하고 나서야 이루어질 것이오. 도움 받는 처지에 뭘 그리 따지고 든단 말이오.”
“그리 나오실 줄 알고 6 백작령의 총관들이 회합을 갖고 결정한 사항이 있소. 사절단이 우리 사정을 속속들이 캐묻는다면 우리는 일체 응하지 않을 것이오. 쥐꼬리 만한 선심이나 쓰면서 이 기회에 6 백작령을 장악해보겠다는 속셈이라면 꿈 깨시라고 말하고 싶군요.”
서스텐의 도발적인 언사에 누구보다 당황한 사람은 오스틴 백작이었다.
“이보게, 서스텐. 그게 도대체 무슨 망발인가 ? 설사 6 백작령이 대공 전하 휘하의 속령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를 돕기 위해 험한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오신 사절단에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네. 후작 각하, 13 공자, 그리고 사절단 여러분. 서스텐의 말은 결코 나의 뜻이 아니오. 오스틴 백작령은 사절단의 요구에 전적으로 응할 것이니 오해하지 말기 바라오.”
“나도 서스텐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저지른 망발이기를 바라지만, 총관이 백작님의 말씀을 순순히 따를지 걱정이오.”
백작령의 사정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올란드 후작의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스텐이 산을 넘어 승천할 기세로 소리쳐 말했다.
“백작님이 인자하시다 하여 그 아랫 사람들도 모두 물러터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오. 백작께서도 결국에는 백작령을 위하는 우리의 충정을 이해해 주실 것이오. 어쨌든 우리는 백작령의 상황에 대한 자료는 일체 내놓을 수 없소.”
“그러니까 요구하는 물자를 두말 없이 내놓고 가던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라는 말이지 ? 우리는 당연히 그쪽의 ‘분부’에 따를 생각이 없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굶주린 백성들의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권력자들의 줄다리기의 희생양으로 만들 수는 없어.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우리는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직접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줄 것이오.”
“누구 마음대로 ? 백작령이 당신들 안방인 줄 아시오 ? 직접 식량을 나눠준다는 건 대공께서 6 백작령에 전쟁을 선포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줄 아시오. 당신들이 그냥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소.”
세틴이 보기에 서스텐이라는 총관이 오스틴 백작령의 실세임은 분명해 보였다. 자세히 살펴 보니 지능이 한참 떨어지는 멍청한 자로 보이지도 않았고, 설사 다른 백작들의 눈치를 본다 해도 이렇게까지 오만불손한 태도와 안하무인은 필시 알지 못하는 내막이 있어 보였다.
“서스텐 오스틴. 나는 브라스트 대공가의 13 공자 세틴이라 하오. 혹시 이건 아시오 ? 6 백작령이 아무리 합심해서 밀어줘도 대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오스틴 백작이 될 수 없소. 설사 백작가의 장자라 하더라도 작위를 계승하려면 대공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백작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소. 하물며 백작의 근본도 알 수 없는 사위야 대공의 ‘절대 불가’ 단 한 마디면 끝장이지. 당신이 이처럼 작정하고 난장판을 만드니 오늘은 더 이상 얘기해 봐야 서로 얼굴만 붉힐 것 같소.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 말을 곰곰이 새겨 보시오. 우리도 그냥 손놓고 돌아갈 수는 없는 입장이란 걸 알고 막나가는 모양인데, 때린 사람도 손이 아프겠지만 맞은 사람 만이야 할까 ?”
세틴의 파장 선언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스텐의 망발로 거의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졌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늦게 서스텐이 혼자서 세틴을 찾아왔다. 막 잘 준비를 하고 있던 식구들을 내몰 수는 없는지라 세틴이 밖으로 나와 서스텐을 만났다. 서스텐은 세틴을 보자마자 흙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백배 사죄하기 바빴다.
“제가 공자께 더 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짐작하신 대로 제가 한 말들은 다른 백작들이나 총관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 그대로입니다. 오스틴에도 다른 백작들의 눈과 귀가 적지 않은지라 그들이 원하는 얘기들을 과장해서 떠들었을 뿐입니다. 가장 궁색하고 힘 없는 오스틴의 입장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백작님은 물론 저의 본의도 결코 아닙니다. 사죄하는 뜻으로 드리오니 부디 오스틴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서스텐이 두툼한 문서철을 건넸다. 짐작키에 사절단이 요구한 바로 그 자료일 터였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을 정도로 그대의 사정도 딱하구려. 초장부터 사절단의 기를 꺾고 싶어 하는 자들이 얼마나 그대를 닦달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오. 오스틴을 위해 그런 식으로라도 한 몸 내던진 그대의 충정은 높이 살 만하오. 아마도 내일부터는 모습을 볼 수 없겠지 ?”
“그런 망발을 쏟아내고 어찌 다시 얼굴을 내밀겠습니까. ‘오스틴에서도 할 만큼은 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총관직을 걸었습니다. 제가 쫓겨나는 거야 큰 일이 아니지만 백작님 주변에 믿을 만한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각별히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잘 알겠소.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이곳에서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면 내게로 오시오. 내 그대를 중히 쓰리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스텐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세틴은 곧바로 율리를 찾았다. 후작은 매트를 불러 셋이 함께 서스텐이 주고 간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율리나 매트는 이런 일에 밤을 꼴딱 새우는 것을 마다 할 사람들이 아니었고, 세틴에게는 행정 사무를 배울 절호의 기회였다.
기나긴 겨울 밤을 지새우고 동녘이 어슴푸레 밝아올 즈음에야 율리의 천막을 나선 세틴은 경비 삼아 주변을 어슬렁 거리던 울브린, 토마스와 함께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바네사는 무언가 셈을 하고 있었고, 그 곁에서 난다와 완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다, 완다는 재우지 그랬어. 한창 잠이 많을 나이 아닌가.”
바네사가 반갑게 일어서며 말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잠을 자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는 공자께서도 같은 나이 아니신가요 ? 어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세요. 그래야 우리도 좀 잘 수 있어요.”
“후작이나 슈타인 남작이나 참 대단하신 분들이오. 별 내용도 없어 보이는 장부에서 그토록 많은 허실을 추려내고, 곡식에 달린 낱알 개수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걸 보니 진짜 세상 공부가 이런 거구나 싶더군. 결과적으로는 오스틴 백작이 좋은 점수를 받았어.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네. 차나 한 잔 내오고 내가 부탁한 일에 대해 얘기나 좀 하고 싶어.”
바네사가 차를 우리며 말했다.
“사절단 내에서 간자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반 하인이나 병사들이야 간자가 있다 해도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테고, 관리들을 탐지하기는 조심스럽지요. 그런데 용병단에서는 확연하게 눈에 띄는 자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용병단에 웬 여자가 있나 상카에게 물어 보니 이번 일을 위해 임시로 고용한 허드렛일꾼이더군요. 별달리 수상한 짓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데 일단 용모와 행동거지가 용병단 일꾼에는 어울리지 않고 일도 서툴렀습니다. 서둘러 추궁하기보다는 당분간 지켜볼 생각입니다.”
“상카 주변에 여자가 얼쩡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는 아니고 ?”
“공자께서 놀리신다 해도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배울까 걱정이군요.”
“걱정은 무슨. 그 ‘아이들’을 보고 내가 배운 건데 하하하.”
자기들 얘기를 하는 줄을 알기나 하듯 부스스 눈을 뜬 난다과 완다가 입가에 침을 닦고 머리를 매만지느라 부산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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