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 강 도강 작전
바움 강을 건너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강 자체라기보다 강 건너 노스롭 방면에 펼쳐진 드넓은 갈대밭이었다. 강 하류까지 산악이 이어지는 강 북쪽이 비해 노스롭 방면은 거대한 평야로 노스롭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바움 하류에 펼쳐진 드넓은 삼각주는 본격적인 농경 가능 지역이 시작되기 전에 갈대가 우거진 늪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을 건너자마자 노스롭의 주력과 일전을 치를 가능성은 낮았지만 일시에 대군이 도강하는 작전은 불가능했다. 대군이 늪지대에 진입했을 때 화공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수도 있었다.
세틴은 도강 작전지역에 속하는 늪지대를 7 일에 걸쳐 꼼꼼히 정찰한 후에야 비로소 도강을 감행했다. 첫날은 도강 특무대, 친위대, 선봉대, 기마대와 함께 세틴이 직접 도강 작전을 지휘했다.
전체 병력의 10분의 일 정도에 해당하는 일 만여 병력이지만 세틴군 최고의 정예부대 만을 앞세운 도강이었다.
많은 소형선을 이용하여 물길이 닿는 갈대숲 길을 최단 시간에 돌파했고 가장 후미의 도강 특무대는 진지 구축을 위한 자재를 실어 날랐다.
세틴은 강을 건너자마자 직접 군영 설치를 진두 지휘했다. 노스롭 전군에 몰려오더라도 버틸 수 있으려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방어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갈대밭과 농경지대 사이에는 완만한 구릉지대가 자연적인 방수둑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곳은 방어기지를 설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새벽같이 시작한 1차 도강 작전은 병사들이 미리 준비해온 간편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정오 즈음에는 기초적인 방어선 구축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있었다.
세틴은 곧 다가올 추수를 앞두고 풍성한 단내를 풍기고 있는 벌판을 바라보았다. 누렇게 익어가는 곡식은 아름다운 색과 자태를 뽐내며 맡기만 해도 배가 불러 오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세틴은 오클린을 소환했다.
“대장, 나를 대신해서 노스롭에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요. 가 주시겠습니까 ?”
오클린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장군의 명이라면 언제든지 불구덩이라도 마다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노스롭에 장군님의 전령에게 불경을 범할 용기 있는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다녀오겠습니다. 전하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세틴이 벌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익어가는 곡식을 보니 도저히 지금 전투를 벌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많은 백성의 목숨줄이 발굽에 짓밟히고 불타오른다면 그 죄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
추수를 마칠 때까지 절대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전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일체의 요구나 조건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오클린은 옆쪽에 꽂혀 있는 깃발을 뽑아 들고 곧바로 말을 달려 노스롭의 군영으로 향했다. 세틴의 애마 테오와 애병 ‘재커드의 송곳니’가 그려진 세틴군의 상징 깃발은 바네사와 난다, 완다가 정성을 다해 만든 것으로 여럿이 달라 붙어서야 운반이 가능한 대형기부터 세틴이 직접 전투 지휘에 사용하는 소형까지 여러 버전이 있었는데, 오클린이 들고 간 깃발은 그가 늘 들고 다니는 친위대의 상징 깃발이었다.
방어진지 구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 돌아온 오클린이 곧바로 세틴에게 찾아왔다.
“임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간단하게 말만 전하고 돌아오려 했는데 묻는 것도 많고, 전쟁을 피할 방법이 없을지 타진하려는 말들도 들어주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주로 어떤 자들이 무엇을 묻고 분위기는 어떻던가요 ?”
“그자들이 묻는 것에는 아무런 대답을 할 권한이 없다고 잘랐으니 주로 듣기만 하고 온 셈입니다. 대놓고 고맙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았으나 추수가 끝날 때까지 공격하지 않겠다는 말씀에는 무척이나 안도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좋게 끝낼 수도 있는데 장군께서 너무 하신다는 비난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결전의 각오를 다진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주제 넘지만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추수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장군의 약속이 저들에게 던진 파문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큰 피해 없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은 자들이 늘었을 것입니다.”
세틴이 기꺼운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하, 내가 그것을 노리고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적진의 작은 변화까지 탐지해 내는 대장의 식견이 놀랍습니다. 늘 묵묵히 제 옆을 지키고만 있어서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대장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상의해야겠어요.”
오클린이 겸연쩍게 말했다.
“아닙니다. 장군님 곁에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배우려 나름대로 노력해왔기에 약간이나마 보는 눈이 생겼을 뿐입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식견을 감히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직 상카님이나 시녀장님, 시녀님들의 발끝에도 따라 가기에 벅찹니다.”
세틴이 정색하며 말했다.
“너무 겸손하실 건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난 사람은 없고 나도 아직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굳이 하나를 권하자면 늘 솔라스경을 가까이 하고 시간 나는대로 탐독하세요.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솔라스경이 제시하는 도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경을 달달 외운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오늘 한 쪽을 읽고 찬찬히 돌이켜 보면 최근 수일 내에 참고할 만한 일이 반드시 하나는 있을 것입니다.”
“넵, 명심하겠습니다.”
이후 도강 작전과 구릉지대에 군영을 구축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추수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휴전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노스롭 측에서도 굳이 도발을 해서 아까운 기회를 놓칠 새라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스롭군은 추수하는 농민들을 보호하고 때로 일손을 돕기도 하는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전투를 벌이기보다 경계를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세틴군의 군영이 거의 완벽하게 구축되고 추수가 절반쯤 진행된 어느날, 세틴이 놀란에게 파견한 전령이 돌아왔다.
세틴은 놀란의 생각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가 연계하고 있는 세력이 어떻게 모그란데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몰랐으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장문의 서신을 보냈었다. 셔플린이 왔다 간 바로 다음날이었다.
세틴은 놀란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고, 반란으로 쓰러지기에는 그가 아깝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반란에 대한 생각을 제고해 볼 것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단지 더 넓은 영지를 가진 귀족으로 성장하는 것보다 제국 전체를 일신하는 대업에 동참해 줄 것을 절절히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전령이 받아 온 답은 모호했다. 결과적으로 반란에 가담할지 아닐지를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세틴 장군에게
먼저 장군께서 보내주신 서신을 읽고 제가 받은 감동이 작지 않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단지 브라스트 공국의 내전을 막기 위한 사탕발림이나 회유가 아니라는 점을 굳게 믿습니다.
또한 장군께서 저를 위하는 마음이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장군님에게 향하는 마음이 작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테오는 제가 가장 아끼는 말이었습니다.
장군께서 그리는 제국의 앞날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알 수는 없으나 저의 보잘 것 없는 포부와 맞닿는 지점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천년 제국이라고는 하나 이대로는 더 이상 제국이 지탱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모그란데 섭정도 같은 생각이고 현 귀족들의 특권을 허물지 않고서는 제국에 다른 활로가 없다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장군께서 우리의 반란 계획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조만간 모종의 시도가 있을 것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군께서 알고 있다면 대공 전하는 더욱 세밀하고 파악하고 대비하셨을 줄 압니다. 우리의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 이런 서신을 보낸 이유가 저의 몰락을 염려하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잘 알겠습니다.
공교롭게도 불과 하루 전에 예정했던 반란을 실행하라는 지령이 도착했습니다. 브라스틴과 리스톤에도 같은 지령이 갔을 것입니다. 제가 이 반란에서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정이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확실히 말씀드릴 내용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서신이 전달될 즈음에는 장군께서 노스롭과 치열한 일전의 한 복판에 계실 줄로 압니다. 마음을 다해 무운을 빕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반갑게 부둥켜 안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친구 놀란 백작 배상’
일말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편지 내용이었으나 세틴의 고심은 깊었다. 무엇보다 ‘반란에서 발을 빼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세틴이 호아니에게 편지를 보여주고 의견을 구했다. 놀란의 편지를 몇 차례에 걸쳐 정독하고 난 후 호아니가 말했다.
“장군.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새삼 장군의 인덕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놀란 백작과 접점이 없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우리 세대에서 제법 유명한 인물입니다. 아시다시피 저와 마찬가지로 서른 전후의 사람 아닙니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언젠가 크게 일을 벌일 인물로 평가합니다.
확신하지는 못하나 언젠가 장군께 큰 힘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장 아끼는 말을 선물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당장 그의 행보를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브라스트가 그렇게 큰 난관에 부딪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해 볼 만합니다.”
세틴이 회상하듯 말했다.
“놀란은 소탈하고 거침없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만한 형이 있었다면 대공가의 후계자 자리를 기꺼이 양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사내지요.
군사의 말대로 되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지금쯤이면 6백작령에서 이미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졌겠군요. 좋은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세틴이 화제를 바꿨다.
“추수가 끝나면 노스롭이 한 번의 싸움에 결판을 보고자 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반도 내에서조차 밀리기 시작하면 만회할 기회를 다시 찾기는 어려울 거라는 판단 정도는 할 테니까요.”
호아니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번 회전에서 패하게 되면 노스롭에 독립적인 영주들이 발을 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협상 사절로 왔던 보로킨은 반도 최남단의 영주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태도는 매우 강경해 보였지만,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 보려고 애쓰는 속마음을 감추지는 못했습니다.
장군께서 대의를 내세우면서도 반도인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보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무사히 추수를 마치도록 배려해주신 것도 영주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편제한 우리 정예군을 맛을 몇 차례 보여주면 노스롭군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대군이 정면으로 맞붙어 보면 우리 군의 높은 사기와 우월한 무구의 위력이 충분히 발휘될 것입니다.”
세틴은 추수가 끝나면 더 추워지기 전에 날짜를 정해 결판을 내자는 통보를 노스롭에 보냈다. 바야흐로 노스롭 토벌전쟁의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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