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 근위대
방울새의 속삭임은 목걸이 한 쌍으로 서로 간에만 통신이 가능한 마도구였다.
짙은 보라색 마석에 직접 마법진을 새겨 제작했는데 현재는 제작법이 전해지지 않는 마도구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했다.
확인해본 적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현존하는 어떤 통신 마도구보다 원거리에서 통신이 가능할 거라는 시오미의 추정이었다.
‘구름 속으로’도 마찬가지로 제작법이 전해지지 않는 마도구로 순식간에 100 미르 반경에 짙은 안개를 형성하는 용도였다.
사용 횟수가 한정된 마도구인데 충전하는 방법도 전해지지 않아서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시오미의 설명을 들은 세틴이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속삭임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마도구인 듯 ?
지금 갖고 있지 않아서 바로 줄 수 없는 것이 아쉽네.
혹시 나중에 비밀리에 오골보르 상단으로 와줄 수 있어 ?
시간을 미리 내게 통보해줘도 되고 어려우면 오골보르 상단주를 방문해서 나에게 연락을 주면 달려 갈게.”
시오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양부가 내게 감시를 붙여두기는 했을 거에요.
하지만 오골보르라면 내가 가끔 구할 물건이 있을 때 찾기도 하니 어렵진 않아요.
내일 양부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먼저 가 있도록 하죠.
그런데 내가 꼭 직접 가야 하나요 ?”
세틴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가야 해.
거기에 오늘 보여준 목록에 없는 물건들도 꽤 있고, 이름만 보고 알 수 없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알 만한 마도구가 있을 수도 있잖아.
나중에 상황이 허락하면 거기 있는 물건들 전부 넘겨줄게.
옆에 두고 연구해 보면 용도를 알게 될 수도 있고, 마법 연구에도 도움이 될 거야.”
시오미가 물었다.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잖아요. 마법에도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
세틴이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정치나 전쟁의 성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상업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마법이지.
지금 시오미가 마법 병단을 맡고 있다는데, 마법이 쓰일 곳은 전쟁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편안하고 편리하게 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해.
상업과 마법을 부흥시켜서 제국민의 삶을 개혁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이 처한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고 있어.
이건 나중에 좀더 긴 시간을 갖고 얘기해 보자.”
시오미가 말했다.
“대략은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사실 전투에 마법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쓸지 매달리고 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해요.
출중한 기사 한 명을 상대해서 치명적인 타격을 줄 만한 마법사가 많지도 않고, 설사 성공한다 해도 그 정도 마법을 한 번 사용하고 나면 꽤 오랜 시간 무력화되고 말죠.
화공이나 수공을 쓸 때 마법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는 있지만, 실제 전투에서 화공이나 수공을 쓸 조건을 갖추기조차 까다롭죠. 실제로 당장은 통신 마법보다 유용한 마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익히기도 힘든 마법을 전투에 써먹겠다는 생각 자체가 낭비지.
조명이나 동력이 필요한 도구나 장치만 생각해봐도 마법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할 거야.
나는 시오미가 그런 일들에 매진할 수 있는 상황이 빨리 오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어.”
시오미가 웃으며 말했다.
“생각만 해도 좋네요. 그러자면 어떻게든 이 전란부터 끝내야겠죠.”
시오미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당장 가장 대표적인 정적으로 맞서고 있는 세틴과 모그란데를 생각하면 하루도 불안에 떨지 않는 날이 없었다.
“시오미, 오늘 얘기를 하다 보니 나는 계속 반말을 하고 시오미는 공대를 하니 좀 불편하네.
다음부터는 시오미도 반말을 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존대하기로 하고. 호칭도 그냥 이름으로 불러 줘.”
시오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럴까요 ?
하긴 내가 나이도 두 살이나 많은데...... 하하하.
세틴, 내일부터는 반말로 바꿀게요.”
다음날 세틴은 모그란데를 황궁 섭정 집무실에서 만났다.
모그란데는 몹시 반갑고 다정한 태도로 세틴을 대했다.
“하하하, 반갑네.
솔직히 그동안 자네의 일거수 일투족까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는 지켜보고 있었네.
황자들을 한 번 씩 방문한 걸 제외하면 놀랄 정도로 사람들을 피하더군.
비밀리에 누군가를 만나 일을 꾸미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어.
시오미의 말을 들어보니 내게 누군 선택할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지 ?
지금이라도 자네가 원하는 황자가 있다면 솔직히 말해주게.
만약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고려해 보겠네.”
세틴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없습니다.
저는 누가 황태자가 되느냐보다 황실과 조정의 기강이 바로 설 것인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일단은 3 황자께서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황태자가 되든 저는 황자들의 조카로서 모든 황자들이 황태자와 반목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모그란데가 웃었다.
“하하하,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네.
내가 결심을 하는데 왜 그리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아는가 ?
3황자는 황태자가 되는 순간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설 생각부터 하더군.
나는 말이야.
자네가 나와 황태자 사이에서 가급적 내 편에 서주었으면 하고 바란다네.”
솔직하고 직선적인 모그란데의 말에 세틴은 과연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만 들어 주신다면 저는 두 분 사이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엄정한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제가 공작님의 편에 서서 황태자와 맞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그란데의 표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황태자와 힘을 합쳐 나를 몰아내려고만 하지 않아도 다행으로 생각하라 이건가 ?
섭섭하기는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겠네.
일단 들어는 보지. 원하는 게 무언가 ?”
세틴이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황궁 근위대를 내어 주십시오.
저는 황궁에서 예상치 못한 변고가 발생하는 것만은 막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는 날을 정하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일 말입니다.
공작에게도 결코 손해가 가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모그란데의 표정이 굳어지고 눈동자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안이네.
아무려면 내가 직접 황궁을 장악하는 것보다 자네에게 넘겨주는 게 나을 리야 없지 않겠나.
그 누군가가 바로 자네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황도 경비대가 있다고는 하지만 제국군과 근위대를 모두 갖겠다는 건 지나친 욕심 아닐까 ?”
세틴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저에게 다른 사심이 없음을 믿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저에게 넘기지 않는다 해도 황태자가 끈질기게 근위대를 넘기라 한다면 버티실 수 있을까요 ?
자칫 그 문제 하나로 공작께서 공적으로 몰리실 수도 있습니다.
미리 저에게 넘기는 걸로 황태자에게 선심도 배풀고 명분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다.
어전회의 전에는 입장을 정해 주시지요.”
모그란데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자넨 보면 볼수록 놀라워.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생각들을 다 해낼 수 있지 ?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결정을 서둘 수는 없네.
자네 말을 모두 인정한다 해도 황태자와 자네가 한통속으로 돌아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결과가 나올 거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어.”
세틴이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와 제가 한통속이 되어 근위대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상황보다는 낫겠지요.”
모그라데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내가 자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밀어 붙이겠다는 말인가 ?”
세틴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황궁에서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생기는 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말할 때, 영순위에 두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황태자 본인이라는 점만 알아 주십시오.”
모그란데의 눈동자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역시 당장 결정을 내리기는 힘든 기색이었다.
모그란데는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그 문제는 미뤄두세.
자네가 돌아가기 전에는 분명한 답을 주겠네.
황태자를 천거하는 일은 자네가 나와 약속한 것이 있으니 새삼 다시 다짐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
사실 오늘 내가 자네와 상의하려는 문제는 따로 있네.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황태자를 세우고 나를 끌어내리려 하는 대신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있겠나 ?
조정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말일세.
더구나 나는 섭정도 아니고 이제 승상으로 내려가야 할 판국이야.
자네가 조정 관료들과 그다지 왕래가 없고 따로 인맥을 만들지도 않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두고 싶어.
제국군이 앞으로도 쭉 조정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해줄 수 있을까 ?”
세틴은 마찬가지로 주저없이 말했다.
“제국군이 조정에서 중립을 고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군이 정치적인 파벌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이미 제국군이 아니게 되겠지요.
공작께서 알아서 정치력을 발휘하시리라 믿지만, 제가 추천하는 방안이 하나 있습니다.”
모그란데의 눈이 빛났다.
“아시다시피 일, 이황자께서는 권력에 미련이 없고 지금까지 파벌을 조장한 적도 없습니다.
황태자와 의견이 갈린다면 두 분을 조정자로 세우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두 분에 대해서는 3황자도 인정하는 부분이 있고, 공작께서도 그분들의 인품을 존중하신다 들었습니다.
조정 인사의 최종 결재권을 아예 두 분에게 일임하는 방안이라면 3황자님도 거부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모그란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묘안이군.
어차피 조정 인사가 내 뜻대로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네.
일, 이황자께서 무리한 결정을 하실 분들이 아니라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거야.
그럼 자네는 조정 인사에 일체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믿겠네.”
세틴이 재차 다짐했다.
“설사 제가 드린 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사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모그란데의 표정이 밝았다.
“좋아.
나만 좀스런 사람이 될 수는 없지.
황태자 옹립과 함께 근위대를 넘기겠네.
다만 어전회의 전에 오디어스에게도 답을 받아놓도록 하게.
오디어스가 다른 사람을 들이겠다고 우길 수도 있지 않은가.”
세틴이 싹싹하게 말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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