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상 체계
세틴은 골트릿 부인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에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준 다음에 조용히 얘기를 꺼냈다.
“숙모님, 제가 미리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듣고 곧바로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골트릿 외숙부님이 어쩌면 천년 제국 황실의 마지막 자손이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황궁에 전에 없이 엄청난 변란이 일어날 거예요.
물론 제가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알고 계속 살피고 있으니, 바깥으로까지 번지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일을 꾸미고 있는 자들이 골트릿 숙부의 시신이나 외숙모에게도 손길을 뻗칠 가능성이 있어서입니다.
이 주변의 경호에도 충분히 신경을 쓰고 있으니 숙모님께서 불안해 하실 일은 없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기 전에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되나 조심할 필요는 있습니다.
외숙부께서는 자신이 가신 뒤에 숙모님께서 머물 곳을 마련해두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관례에 따르자면 돌아가신 황제나 황실 직계 자손의 식솔들은 황가의 무덤 근처에 있는 황가촌에서 살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숙모님은 장례를 마친 직후에 곧바로 황가촌이 아닌 외숙부께서 준비해두신 장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지금 황궁 내에서 일을 꾸미고 있는 자들의 힘이 가장 크게 미치는 곳이 바로 황가촌이거든요.”
세틴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골트릿 부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자세히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일이겠군요.
대략 무슨 얘기인지는 알아 들었으니 조카님의 말대로 따르지요.”
세틴은 한동안 숙모를 위로하며 얘기를 나누다 물러나왔다.
세틴이 다시 조문장을 둘러보니 전보다 더 떠들썩한 분위기였고, 도를 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열된 논쟁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만 하면 한 번 정도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도 있고, 숙연해야 할 조문 장소가 너무 어지럽다는 느낌도 있어 자신이 나서기로 작정을 했다.
세틴은 자신을 수행하고 있던 가우디에게 나서도록 지시했다.
“제국군 사령관이자 골트릿 황자 전하의 장례식에 상주를 맡고 계신 세틴 사령관님께서 드십니다.”
가우디가 일부러 목청을 높여 조문장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치자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세틴이 모두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제국의 앞날을 위해 모두가 이렇게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실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나, 골트릿 전하의 빈소가 너무 떠들썩한 것도 예의는 아닌 듯하여 어쩔 수 없이 훼방을 놓게 되었습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고 앞으로 여러 날 동안 주제별, 지역별, 사안별로 의견을 나눌 시간은 충분합니다.
이미 황태자 전하와 나는 이번 총독 회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총독들과 조정의 대신 여러분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나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대로 여러분께 따르라 하지는 않고, 오히려 여러분들이 충분한 논의를 해서 내놓는 결과에 따라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흥을 깨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골트릿 전하의 빈소임을 감안하셔서 조금 절제된 분위기에서 서로 목청을 높이기보다 차분하게 의견을 나눠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은 장례를 맡은 상주로서 여러분께 드리는 부탁이니 양해 바랍니다.”
내용이나 말하는 방식이나 충분히 모두를 존중해주는 세틴이었기에 다들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세틴은 자신이 떠나고 나면 또다시 열기가 달아오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논쟁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기에 얼마 안 있어서 빈소를 떠났다.
총독들과 조정 대신, 관료들의 만남이 이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타오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각 지방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총독들을 이번 기회에 다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준비한 것들이 만만치 않았고, 이미 세틴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지침을 하달받은 총독들 역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기 때문이었다.
논점의 중심은 역시 군상 체계였는데, 총독들 중에서 군상 체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총독은 숄츠와 나바니아 정도였기에 그 둘에게 조정 관료들의 화살이 집중되었고, 군상 체계가 제국을 송두리째 전변시킬 주축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진 두 총독은 관료들과의 입씨름에서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군상 체계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상업, 무역과 장원의 해체에 앞장서고 있는 사례들로 반박했고, 그로부터 소외된 귀족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 자들로 치부했다.
엄청난 부가 군상 체계로 모이고 있는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 그것이 일부라도 중앙 조정으로 올라오지 않고 있는지, 행여 총독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데 쓰이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의문도 많이 제기되었다.
총독들은 군상 체계에서 다루는 재정 중에서 총독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고, 군상 체계를 통해서 많은 부가 유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실제를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자들은 기존의 귀족과 상인들이며, 총독은 그들이 원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운송이나 안전문제 등을 지원하고 있은 뿐이라 반박했다.
오히려 지방 경제를 살리자는 목적에 충실하려면 총독들이 그들을 더욱 잘 지원할 수 있도록 조정에서 협력해주어야 한다는 반론을 폈다.
그밖에도 수많은 문제들이 중구난방으로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반박하고 설명하는 과정은 총독이 임명된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정 관료들이 나름 철저한 사전 조사를 했다고는 하나, 이미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한 자들에게 들은 정보가 많았고, 총독들을 깎아내리기 위한 우격다짐도 많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총독들에게 밀리는 형국이었다.
기존 귀족이나 관료들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변화들이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방의 현실에 대해 무지한 그들이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고 있는 총독들을 압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총독과 그들을 수행하고 있는 자들이 여러 가지 현실에 대해 알리고 설명하는 말들이 길어지고, 조정 관료들이 이를 경청하는 형세로 변해가고 있었다.
가끔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개별 총독의 비리나 무능 등을 문제삼고 나서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런 공격을 당한 총독치고 순순히 물러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막연히 전해 들은 얘기, 이런 소문도 있다더라 하는 식의 말로 총독들의 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세틴은 이런 자리가 여러 날 동안 계속 이어져서 이미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조정 중신과 관료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랬다.
현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어느 정도 달라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어떤 제도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첫날 골트릿의 빈소라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부터 시작된 소란스러운 입씨름들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총독 회의에서 조금은 정제된 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조금 일찍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변화와 논쟁의 핵심인 군상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놀란과 완다도 이미 황도에 들어와 있었지만, 그들은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놀란과 완다는 군상 체계 구축을 위해 세틴이 파견한 실무자였을 뿐, 조정에서 내린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놀란과 완다가 세틴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늘 할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은 역시 완다였다.
“군상 체계도 이제 한 번 정비를 하기는 해야 해요.
놀란 경과 제가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속출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이제는 군상 체계가 제국 전역을 포괄하다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문제는 열흘이 넘게 지나서야 전달되기 일쑤지요.
더구나 군상 체계는 제국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체계도 아니고 제국군 내에서 임시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보니, 그렇게는 더 이상 유지되기도 힘들어요.”
놀란이 덧붙였다.
“사실 군상 체계가 애초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기존 상인들이나 귀족들까지 발벗고 나서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역시나 군이 상업, 무역을 책임진다는 것은 확실히 무리입니다.
지금 총독들도 대다수가 아예 나몰라라 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요.
계속 제국군 산하에 묶어두려고 고집한다면 문제가 갈수록 커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상인들에게 맡겨버리면 문제는 혼란스러워 지겠지요.”
세틴이 말했다.
“제가 모그란데나 우살리드, 동부왕국까지 대적하느라 신경을 거의 못쓴 탓이 제일 큽니다.
일단 방향은 이렇게 잡으세요.
제국군 뿐만 아니라 제국 조정에서 일괄 관리하는 체계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처럼 일어나고 있는 백성들의 활력을 오히려 제한하고 꺾어버릴 수도 있어요.
당분간은 제국군이 관리하는 군상 체계를 어렵게라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지역별로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귀족, 상인, 생산자들의 조합을 만들도록 합니다.
각자 자신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출자를 하게 하고, 출자한 지분만큼 결정권을 갖게 하는 겁니다.
모인 출자금은 지금 만들어진 상업, 무역을 지원하고, 부조하고, 필요한 새로운 사업을 공동으로 만들어가는데 쓰도록 합니다.
차츰 조합을 그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하고, 총독이나 군상 체계에 수립된 해군과는 협력관계로 변화시키도록 합니다.
결국 제국군 자체에 남는 것은 총독과 해군 뿐이고, 상업과 무역은 그들이 알아서 꾸려가게 되겠지요.
거기까지 해놓고 나면 놀란 경과 완다의 일은 사실상 끝입니다.
그때 두 분은 어디 총독으로 가든 아니면 중앙 조정에서 전역의 상업 무역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으시면 됩니다.”
완다의 눈이 반짝였다.
도저히 깨끗하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세틴의 입에서 ‘조합’이라는 단어와 그 골격 및 운영 원리를 듣는 순간, 훅 하고 다가오는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맞아요.
왜 상인들을 우리가 계속 가르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그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맡기고, 꼭 지켜야 할 것들만 알려주고, 넘지 말아야 할 선만 확실하게 그어주면 될 일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놀란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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